브엘라해로이
< 본문 – 창세기 25:11 >
여러분, 혹 여러분에게 결코 잊지 못할 장소가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힘들고 몸이 지쳐 있을 때 삶의 자리를 훌쩍 떠나, 가고 싶은 장소가 있습니까? 아마도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장소, 언제든지 나를 안아줄 것만 같은 따뜻하게 기억되는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추억이 있는 장소는 우리가 힘들 때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용기를 주는 힘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장소는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을 싸매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멋진 추억이 깃든 장소는 그곳을 생각만 해도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 같이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세상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옛날 시골집이 그런 곳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처음 만났던 장소가 그런 곳일 수도 있습니다.처음 신앙생활했던 고향교회는 우리의 신앙이 약해질 때 다시금 우리에게 신앙의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처음 주님을 만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자리는 그곳을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뜨거움을 다시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 혹 여러분에게 그런 장소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해 살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오늘 본문은 이삭이 아버지가 죽은 후에 브엘라해로이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삭이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했다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관심이 끄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이사를 할 때마다 그들이 거주하는 곳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주로 거주해 살던 곳은 브엘세바와 헤브론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려 한 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창세기 22:19) 이삭을 낳은 후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려 한 그 때까지 아브라함은 주로 브엘세바에 살고 있었습니다.(창세기 21:33) 그리고 그로부터 약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는 헤브론에서 묘지를 장만해 아내를 거기에 묻었습니다. 사라가 헤브론에서 죽었다고 기록(창세기 23:2)한 것으로 보아 그때 아브라함의 가족은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라가 죽은 후에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기 위해 늙은 종을 하란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 종은 하란에서 이삭의 아내감으로 리브가를 데리고 옵니다. 리브가가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이삭이 자기 아내를 맞으러 나오는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다.”(창세기 24:62) 비록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와서 자기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맞아들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 때 아브라함과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브엘라해로이로 이사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 그 때 그들은 거기에 거주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은 왜 브엘라해로이에 계속 거주하고 있었을까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같은 장소에 살았다면 왜 굳이 오늘 본문은 이삭이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살던 그곳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 살았다면 굳이 그 장소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 거주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브엘라해로이가 어떤 곳인가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연유가 창세기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올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라는 말씀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자식을 낳을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될 때, 아브라함은 고대사회의 전통에 따라 자신에게 속한 종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고 믿을만한 사람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세기 15: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자신의 종들 가운데 하나를 상속자로 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온지도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점점 나이는 들어가고 자식을 낳을 가망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낸 꾀가 ‘아브라함이 더 힘이 없어지기 전에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자’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자식을 얻는 방법으로 종종 사용하던 풍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묻지도 않고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했고, 그들의 계획대로 하갈이 아들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자기들의 계획대로 잘 풀려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여종 하갈이 주인의 아들을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게 됩니다. ‘여주인’이라는 말은 원래 ‘무겁다’는 뜻을 가진 까바르(גבר)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고 ‘멸시했다’는 말은 ‘가볍게 여기다(קלל)’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주인을 무겁게 여겨야 할 하갈이 자신이 주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여주인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마치 자신이 무겁게 여겨져야 할 여주인이 되는 것처럼 행세했고, 여주인인 사라를 자신의 종처럼 여겼다는 뜻입니다.
이에 분노한 여주인 사라가 저 배은망덕한 여인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브라함에 간청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하갈은 사라의 괴롬힘을 견디지 못하고 주인의 집에서 도망쳐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향인 애굽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도망쳐 나와 고향으로 행해 가던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으로 도망치던 하갈을 만난 곳을 성경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창세기 16:7)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광야를 가로질러 도망치다가 사막의 오아스시와 같은 샘을 만나 거기에서 타들어 가는 목마름을 해갈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샘물 옆에서 목을 축이며 잠시 쉬고 있는 적막한 시간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갈에게 여주인 사라에게로 되돌아가라고 말씀하면서 ‘네가 낳을 그 아들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까지 해 주십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명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하갈의 뱃속 아이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씨앗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서 태어날 그 아이도 당신의 특별하신 은혜로 돌봐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갈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을 돌봐주신 하나님, 그리고 자신의 뱃속 자식까지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만난 그곳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붙였습니다. 브엘라해로이라는 말은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를 돌보시고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갈에게 하나님은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여주인 사라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그녀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때 그저 옆에서 바라만 보았지,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신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은 주인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여주인 사라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자신의 하나님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브엘라해로이에서는 아닙니다. 그곳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났습니다.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 만났습니다. 여주인 사라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돌보시고 나를 살피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신 그곳, 자신이 나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만난 그곳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거기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했다고 기록한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삭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기록 순서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 거주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받은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 거주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자신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복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이삭은 자신에게 복주심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마치 하갈이 처음 브엘라해로이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한 것처럼, 이삭도 아버지가 죽은 후에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브엘라해로이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나에게도 브엘라해로이(나를 보살피시는 나의 하나님)로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하나님은 브엘라해로이이십니까?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아직까지도 브엘라해로이를 경험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별히 부모님을 대를 이어 신앙생활하는 분들 가운데는 브엘라해로이의 경험이 없이, 아버지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어머니의 하나님일뿐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되고 고백되지 않는 신앙으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태신앙인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반드시 경험되어야 할 신앙이 바로 브엘라해로이의 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브엘라해로이의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만난 하나님을 전수받는 신앙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깊은 은혜 안에 머무르는 기쁨을 맛보는 신앙으로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되지 않는 신앙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지 않는 신앙은 결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브엘라해로이, 나의 하나님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나를 살피시고 감찰하시는 나의 하나님, 나에게 은혜의 샘물을 공급해 주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했다고 기록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삭과 관련해서 브엘라해로이가 처음 언급된 것은 창세기 24:62절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삭이 자신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만나기 위해서 브엘라해로이에서 나와 그녀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렇게 결론 맺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세기 24:66) 어머니 사라가 죽은 후에 이삭은 아주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90세의 늙은 몸으로 자신을 낳은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위해서 어머니 사라가 어떤 사랑을 베풀었을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늘그막에 낳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나은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러니 어머니로서 아들 이삭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부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아왔는데, 그 어머니가 이삭의 나이 37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직 자신은 장가도 가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 가운데 있던 이삭을 위해 아버지 아브라함은 가능하면 빨리 이삭이 결혼해서 마음에 안정을 찾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종을 하란으로 보내 리브가를 아내감으로 데리고 오게 한 것입니다. 어머니를 떠나 보내고 공허한 마음과 깊은 슬픔 중에 있던 이삭에게 리브가는 크나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워줄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아내로 삼아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어머니의 장례 이후에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막이 있던 곳, 리브가로 인해서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에 위로를 받았던 곧이 바로 브엘라해로이였습니다. 브엘라해로이는 어머니의 장막이 있던 곳입니다. 아내 리브가로 인해 큰 위로를 얻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혼한 지 35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이삭의 마음이 어머니를 떠나보낸 이후의 마음처럼 깊은 슬픔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큰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아버지입니다. 비록 연세가 많았지만, 언제나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과 같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제 떠나고 없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혈육은 이복형 이스마엘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에 형 이스마엘은 다시 자기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남겨진 것은 자신뿐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마음에 위로를 얻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어머니의 장막이 있던 곳 브엘라해로이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자신을 위로해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힘을 얻게 해 주는 어머니의 장막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에게 브엘라해로이는 위로의 장소였습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리브가를 통해서 위로를 얻었던 곳이 브엘라해로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곳도 바로 거기, 브엘라해로이였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에 머물렀고, 오늘 본문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삭이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처하면서 하나님으로 인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깊은 슬픔 중에 있을 때, 세상을 살아가다가 마음이 찢겨지는 듯한 아픔과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를 얻습니까? 나를 위로해 주는 자리가 있습니까? 이삭에게는 브엘라해로이가 위로의 자리였습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에도 그랬고, 지금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에도 그랬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위로의 자리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품이 브엘라해로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삶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품에 머물기만 하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위로를 얻고,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으면 곧 아픔이 다 사라질만큼의 강렬함을 느끼질 못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슬픔을 이겨나갈 용기, 아픔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브엘라해로이의 신앙으로 사십시다. 나에게 하나님이 누군가의 하나님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되어야 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주셨던 은혜를 내개 경험해야 하고,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내가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은 나의 자녀들 하나하나에게도 브엘라해로이로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품 안에서만이 진정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브엘라해로이의 하나님, 그 하나님 품 안에서 세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위로와 평강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품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든 하나님의 품은 늘 열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품만이 우리의 위로가 됩니다. 그 품이 브엘라해로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