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할렐루야

시 150:1-6

 

   시편은 일종의 구약시대의 기도​서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기도할 때 이 시편을 암송하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은 구약시대의 찬송가이기도 합니다. 성전제사 때 이 시편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시편은 전체가 150편으로 되어있습니다. 그 중에 시작하는 1편이 서론입니다. 여기에서 의인의 길은 악인의 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의인은 복 있는 사람이요, 그가 걷는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시편은 바로 이 의인의 기도요, 의인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끝을 맺는 150편이 결론입니다. 그 결론은 한 마디로 찬양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시편의 결론은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각 시를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고통 속에 부르짖는 탄원시가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탄원을 드립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결론은 찬양입니다. 그리고 눈물로 드리는 간구의 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간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결론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결론은 찬양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이 부르는 노래의 결론도 찬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의 삶의 결론 역시 찬양입니다. 그리고 결국 의인이 저 천국에 올라가 영원토록 할 일도 바로 찬양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 150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시편 전체의 결론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시 자체가 아주 독특합니다. 6절 밖에 안 되는 짧은 시에 찬양이라는 말이 무려 13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매 절을 끝맺으면서 후렴처럼 “찬양할지어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찬양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찬양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찬양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하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우선 본문은 1절에서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6절에서 할렐루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찬양을 할렐루야라는 말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라는 말고 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할렐루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할렐루야’(הַלְּלוּיָהּ)라는 말은 히브리어 두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할랄’(הָלַל)의 2인칭 복수명령형인 ‘할렐루’(הַלְּלו)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축약형인 ‘야’( יָהּ)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할렐루는 ‘너희는 찬양하라’라는 뜻이고, 야는 ‘여호와’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라는 말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발음입니다. ‘할/렐루야’ 또는 ‘할렐/루야’, 이렇게 발음하면 안 됩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발음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가 아니고,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음악에서 ‘알렐루야’라고 표기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할렐루야를 로마시대 헬라어나 라틴어로 표기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헬라어나 라틴어는 격음부호가 없어서 ‘하’를 표기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후대에 헬라어나 라틴어만 보고, 알렐루야로 쓰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할랄’ 즉 ‘찬양’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의 기본 의미는 ‘자랑하다’입니다. 남들에게 알리고 싶고,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마음속에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감출 수 없고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것을 말합니다.

   삼하 6:14-1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바라고 사모하던 언약궤를 우여곡절 끝에 다윗성으로 모셔오게 됐습니다. 다윗이 왕이지만 백성들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소리를 지르며 즐거이 환호하며 궤를 모셔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할랄 찬양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언약궤를 모셔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한 차례 언약궤를 모셔오려다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세 달 뒤에 다시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성공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하고 준비한대로, 언약궤를 다윗 성에 모시게 됐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가 거하는 성에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 생각하니 다윗은 그 기쁨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춤을 춥니다. 춤을 추려고 춘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춤이 추어집니다. 이 일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그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이 할랄 찬양입니다.

 

  저는 1986년, 처음 미국교회를 탐방할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한 흑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찬양을 부르는데 교인들이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몸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손을 높이 드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 무엇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 찬양이 멈춰지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30분이 넘도록 찬양이 이어집니다. 교인들의 얼굴에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당시 엄격한 장로교 예배를 드려온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화충격 바로 그것입니다. 제 뒤에 있던 어떤 분이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잡고 흔듭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저도 따랐습니다. 그날 제 심령에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다윗이 부르던 할랄 찬양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윗을 지켜보던 미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타오르던 그 기쁨을 알 수 없었습니다. 자랑하고 싶었던 다윗의 그 뜨거운 마음을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그 찬양을 공감하지 못했고,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체통 없이 그 꼴이 무어냐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할랄 찬양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아무나 표현할 수 있는 찬양이 아닙니다. 그 안에 주님 때문에 맛보게 되는 기쁨이 있는 사람만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무엇인가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을 자랑하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있는 사람만 드릴 수 있는 찬양입니다.

   할렐루야는 너희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주님 주신 그 기쁨을 찬양으로 표현하라는 뜻입니다. 깨닫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주님에 대한 자랑을 찬양으로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명령에 순종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주신 기쁨이 살아납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쁨은 찬양으로 표현할 때 배가 되어 살아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기쁨은 찬양하지 않을 때 마치 모닥불이 사그라지듯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그러면 할렐루야는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할랄 찬양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찬양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리고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리고 “그의 위대하심을 찬양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너무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찬양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찬양하는지 모르고 찬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그런데도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 15:8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 29:13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바리새인은 누구보다도 기도를 많이 드리고, 누구보다도 말씀을 철저히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눈에만 보이는 그들의 마음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지만, 속사람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겉사람은 말씀을 따라고 있었지만, 속사람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외식’이라며 책망하신 것입니다.

   찬양이 이럴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찬양을 하지만 마음으로 찬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찬양하는 것이 보이지만 실제는 그 마음은 찬양하고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할렐루야를 실천하려면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깨닫고 이것을 자랑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찬양을 드릴 때 마음을 다해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BTS가 잠깐 휴식기를 갖는다는 발표에 전세계 문화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당장 언론들이 해당기사를 뉴스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관련 주가도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아미들입니다.

  사실 BTS가 오늘의 BTS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아미들 때문입니다. 이 아미들은 지금까지 그 어떤 가수나 배우들의 팬들과는 다릅니다. 자기들끼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팬덤’이라고 한답니다. 정확한 아미의 수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전세계 여러 나라에 1000만 명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역대 최대 최고의 팬덤입니다.

  이 아미들은 처음에 BTS의 노래와 춤이 좋아서 가입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SNS를 통해서 BTS와 소통하면서, 이들을 좋아하게 된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영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삶의 큰 위로와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BTS를 응원하고 참여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아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보면 이들이 BTS를 할랄 찬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BTS에게서 영감을 얻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BTS를 생각하고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는 것 그 자체가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주변사람들에게 BTS를 자랑합니다. 이것이 찬양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렐루야 즉 할렐 찬양을 실천하려면 주님을 할랄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이 좋아서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더할 수 없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할 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으로 나가 감사를 드리고 노래로 찬양하고 싶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찬양해야 합니다.

   3-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 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선 주목할 것은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 퉁소, 제금과 같은 다양한 악기로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악기들은 이방제사 때 사용되던 악기들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처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하면서 성전제사 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할 때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해서 최선을 다해 찬양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원래 종교개혁 시절에는 오르간만 찬양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던 피아노를 비롯해서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들을 다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속 대중음악을 연주하던 악기들 예를 들어 기타, 드럼, 신디 그리고 록밴드가 사용하던 악기까지 다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국악 연주를 위해 사용하던 악기들까지 가리지 않고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기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나팔은 제사장이 연주하던 악기입니다. 비파와 수금은 레위인들이 연주하던 악기입니다. 그리고 소고는 여인들이 연주하던 악기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사용하여 찬양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기가 연주할 수 있는 것 다 동원해서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5절을 보면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금은 금속판으로 만든 타악기입니다. 현대 악기 중 심벌즈와 유사한 악기입니다. 그런데 이 악기를 큰소리로 그리고 높은 소리를 내게 해서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큰 소리로 그리고 높은 소리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열정을 다해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말씀을 종합해 보면, 찬양을 하되 최선을 다해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가끔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들 가운데 열정을 다 쏟아 부어 그 진심을 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관중들을 역시 뜨거운 마음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 담아 최선을 다해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찬양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을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좁은 의미로 해석을 해보면 숨 쉬고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호흡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악기로 찬양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번에는 목소리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로 해석해 보면 호흡할 수 있다면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더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은퇴도 하고 뒤로 물러납니다. 근육의 힘이 빠져서 힘든 일은 할 수가 없어집니다. 거동이 불편해서 나들이를 할 수도 없습니다. 눈이 침침해져서 책도 보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찬양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까지 힘써야 할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할렐루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받고 싶어하시는 것이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찬양이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찬양할 때 우리의 영이 깨어납니다. 찬양할 때 우리의 영이 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가장 힘써야 불러야 할 것이 찬양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