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억 방정식
< 본문 – 출애굽기 2:23-25 >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Ebbinghaus’ Forgetting Curv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심리학자인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 1850-1909년)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에 남는 양도 감소한다는 논리입니다. 에빙하우스는 무의미한 철자를 학습한 뒤 망각현상을 관찰한 결과, 인간의 망각이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그림) 인간이 무언가를 학습한 뒤 10분이 지나면 망각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래프에서 보시는 것처럼, 20분이 지나면 처음 기억의 42%가 잊혀져 58%만 머리 속에 남습니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나면 처음 기억의 44%만 남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33.7%만 남아 처음 기억했던 것의 2/3는 잊혀지고 맙니다. 그리고 6일이 지나면 75%를 잊어버리고, 한 달 후에는 79%를 잊어버립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기억하는 용량이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느끼고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기억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기도 합니다. 현대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어렵게 기억된 것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기억과 관련된 것들은 더 잘 기억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배우고 기억한 것들을 잊어버리도록 설계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입니다. 피조물인 존재,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망각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망각할 수 있기에 용기를 갖고 다시 뛸 수 있습니다. 엄마들이 출산의 고통을 잊기 때문에 둘째도 낳고 셋째도 낳을 수 있습니다. 만일 첫째를 낳을 때의 고통이 조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둘째 셋째를 낳겠다고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힘들었던 순간을 잊을 수 있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겨납니다. 지난날 고통스러운 순간을 잊을 수 있기에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난날 내 삶에 찾아왔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생명을 이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잊혀지는 게 우리에는 축복이지만, 때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기도 합니다. 학생이 열심히 배운 것을 잊지 않으면 좋을텐데, 어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에서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배운지 불과 10분 만에 잊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반복학습이라는게 있습니다.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배운 것을 계속해서 다시 입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가 있다면 그것을 잊지 않아야 사람된 도리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너무 자주 잊습니다. 누군가와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아야 실수하지 않는데, 때로는 약속을 하고서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잊고 싶은 것은 잊혀지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사람다움의 예를 지키지 못한 채 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잊는 존재, 망각의 존재인데 하나님은 기억하셔야 할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는 말씀이 두 번 반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방법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기억 방정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법칙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처음 세운 언약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고 있을 때 그를 거기에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기 앞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세 가지 표현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서는 하늘을 울러러보게 하십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5) 두 번째는 땅의 티끌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데리고 온 조카 롯과 헤어질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세기 13:16) 세 번째는 바닷가의 모래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세기 22:17)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에 걸쳐 약속하셨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많은 자손들이 정착하여 살 땅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자손의 번성과 정착할 땅을 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약속하시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야곱이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지 400년이 되어갑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지는 5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때입니다. 5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흘렀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모두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오래 전에 당신이 하신 약속(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억은 결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하고 평생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대를 이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약속을 기억해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500년 전에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 24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또 모든 사람들이 그 약속을 잊었다 하더라도 결코 당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기억 방정식 첫 번째 전제이고, 첫 번째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방정식 두 번째 법칙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약속을 이룰 오늘의 상황을 돌아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세기 15:1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 땅에서 400년 동안 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처럼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후 400년 동안 그들은 애굽 땅에서 노예로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습니다. 그 땅에서 그들의 고통은 날로 더 심해졌습니다. 본문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은 너무 고된 노동으로 인해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스러움을 친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셨습니다. 그게 본문 25절의 말씀입니다. 2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다’는 말씀은 그들의 그 고통스러움을 보셨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는 말씀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의 형편을 자세히 관찰하고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에 우리를 자세히 관찰하실까요? 물론 하나님은 늘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 좀 봐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집중하여 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형편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내 형편 다 아시는데, 기도할 필요가 뭐 있나!’ 여러분, 혹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포장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성경에 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에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모르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그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문제가 잘 풀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문제가 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니까 그렇게 된 것인가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분명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 땅에서 객이 되어 이방 사람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400년의 세월이 흘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노예의 땅에서 건져내셔야 합니다. 당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게 단순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으니까 그 소리를 들으시고 옛적에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켜주시도록 기도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게 우리에게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바라십시다.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기억 방정식 두 번째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방정식의 첫 번째 법칙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고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법칙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다가서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기억 방정식 세 번째 법칙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배치된 순서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신 다음, 그들의 형편을 돌보신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모세를 준비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출애굽기 2장이 시작되면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가정에 모세가 태어나게 하셨고,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어할 상황에서 그 모세를 살려 애굽 왕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모세가 장성하여 나이 40이 되었을 때 자기 백성이 학대당하는 모습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고, 거기에서 결혼을 하고 장인의 양떼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세의 이야기를 기록한 후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때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후, 모세가 왕궁에서 자랄 때 왕이었던 바로가 죽은 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생활의 고역으로 인해 부르짖기 전에 이미 모세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모세를 왕궁에서 보호하시며 훈련시키셨고,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시키고 계신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미 뭔가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미 언약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시지만, 무계획으로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행동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계획을 세워놓으시고, 그 계획을 따라 준비를 하십니다. /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세우셨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4절의 표현대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로마서 5:8),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로 지낼 때에(로마서 5:10)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시고 당신이 먼저 행동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하십니다. 그것을 창세기 22장에서는 ‘여호와 이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준비하신다(이레)는 말은 미리 생각하시고 미리 바라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미리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는 미리 보시고 준비하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미리 생각하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때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돌아보셨습니다. 그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은밀하게 준비하여 훈련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즉시 모세를 보내 그들을 건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모세를 준비하신 시간은 무려 80년이나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이삭을 낳게 하시기까지는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면 애타하며 기다리게 하지 말고 즉시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25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낳을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고된 노역으로 인해 부르짖기 전에 모세를 보내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역으로 힘들어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약속을 이루실 때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오래 기다리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하나님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잊어버린는 데서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1:7절까지는 야곱의 가족이 애굽 땅으로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8절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요셉을 기억하지 못한 새로운 왕이 등장함으로 이스라엘은 노예로 전락했고, 고통의 시간을 살아야 했습니다. 요셉은 큰 흉년에서 애굽을 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 요셉을 잊었습니다. 요셉을 잊었을 때 이스라엘에게는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다. 사람은 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9:14-16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는데 어떻게 잊겠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하신 약속도 잊지 않으십니다.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사십시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면 우리에게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면 부족할 것도 없습니다. 기억은 곧 사랑이고, 기억은 곧 성취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