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따르라!

< 본문 요한복음 21:20-22 >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형제가 함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형제로서 같은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고 또 같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내용은 너무나도 많이 달랐습니다.

  먼저 베드로와 안드레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6)라고 고백한 사람도 베드로였고,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나도 물 위로 걷고 싶다고 해서 잠깐이지만 물 위를 걸었던 사람도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늘 곁에 데리고 다니던 제자 3명 가운 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성경에 그렇게 많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온 것처럼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먼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기 형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준 사람이 안드레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실 때, 한 아이가 갖고 있던 작은 도시락인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알려드린 사람이 안드레입니다. 그것 외에 안드레가 무엇을 했는지는 거의 기록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활동했던 반면 안드레는 조용히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동역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지도자로서 적극적으로 그의 역할을 감당한 반면, 안드레는 단 한 번도 그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고, 알려진 바에 의하면 흑해 연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안드레는 드러난 존재감은 없었지만 묵묵히 그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야고보와 요한도 너무나 다른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 두 형제를 우레의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물론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늘 예수님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외에는 야고보가 예수님의 생전에 무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순교당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당한 사람이 야고보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당시 땅끝이라고 알려진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던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아무튼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반면 그의 동생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십자가 아래에까지 동행했던 유일한 제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어머니 마리아를 돌봐줄 것을 부탁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순교당하지 않고 노년이 될 때까지 살았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같은 형제인데, 형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한 제자였고, 동생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고 가장 오래 산 제자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어머니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 형제들입니다. 같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한 형제들입니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살아온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격도 달랐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 그들의 활동도 달랐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도 그들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누가 더 나은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베드로가 더 나은 제자였습니까? 아니면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으면서도 조용히 일했던 안드레가 더 나은 제자입니까? 똑같이 우레의 아들이라 불렸지만 한 사람은 이른 시기에 순교자가 되었고, 그의 동생은 순교하지 않고 늙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누가 더 나은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된 야고보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오랫동안 살았던 요한입니까?

  우리는 종종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이미 초등학교를 지내오면서 성적에 등수를 매기는 문화에서 자라온 우리는 누가 더 위인가? 누가 더 잘 했나?’ 하는 등수를 매기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등수를 매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왜요?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비록 뒤쳐진다 하더라도 자신이 가야할 길에 서 있만 하면 그는 충성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큰 업적을 남기진 못했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모두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7-8)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만 하나님께서 면류관을 씌워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나만큼 주님을 위해 고난받지 않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면류관을 씌워주시지 않을거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면류관을 씌워주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대 올림픽에서는 우승한 사람에게만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승자 한 사람에게만 씌워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달려온 모든 사람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모두 자기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며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베드로, 네가 더 잘 했어! 첫 번째 순교자 야고보, 네가 더 귀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베드로가 가야할 길을 간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야고보는 그것이 그의 사명의 길이고, 늙을 때까지 순교하지 않았던 요한 역시 그것이 그의 사명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 모두는 그들의 삶에서 값지고 귀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말씀하신 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제자들의 실망감은 너무 컸고, 그들은 권력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들이 살아왔던 갈릴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일에도 베드로가 앞장 섰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하자 나머지 여섯 명의 제자들이 따라나선 것입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는 이 말을 문맥에 맞게 번역한다면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그런 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기 전에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나는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만 생각하면 베드로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긴 했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그런 부끄러운 과거가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라 나 같은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놈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제자로 살지 못할 것 같으니 옛날 고기잡이하며 살던 그때로 돌아갈 거야.’ 그러면서 갈릴리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잡이나 하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게 오늘 본문 바로 앞까지의 내용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고는 물고기 153마리를 잡도록 하셨고, 밤새 고기잡이하느라 고생하던 제자들을 위해서 떡을 구워놓으시곤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세 번이나 그렇게 물으신 예수님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다시금 제자의 길을 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결국 순교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매인 바 되어 충성스럽게 살다가 순교당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그게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이 사람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2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 품에 안겨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입니까 라고 묻던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너무나도 부족하여 제자의 길을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고기잡이하러 온 자신을 주님께서 다시금 용기를 주시어 제자의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결국 주님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신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요한,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요한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나이 어린 요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요한도 자신처럼 순교의 길을 가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너는 요한에 대해서 신경 쓸 것 없어! 너는 너의 길을 가기만 하면 돼!’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야할 길이 있고, 요한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순교의 길을 가는데, 요한도 순교의 길을 가야하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무슨 사명을 맡기셨든지 요한은 요한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나와 비교할 일도 아니고, 그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바르게 깨닫고 그 길을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의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요한을 요한의 길을 가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길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두 형제의 역할을 각각 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만 남겨졌을 때에도 베드로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길과 안드레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길은 다릅니다. 내 동생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느냐고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들도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형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를 당했지만, 동생 요한은 늙도록 순교당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요한이 주님의 제자나 사도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길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고 늙도록 교회들을 돌보면서 로마 황제의 박해 속에서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믿음을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저술했고, 요한일,,삼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그게 요한이 가야할 사명의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길과 나의 길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옷을 입고 같이 행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부유한 신앙인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지지리도 가난한 삶을 산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왜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사람을 대하시느냐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압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와 같아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똑같이 가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왜 아무개는 고생 하나 하지 않느냐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그가 가는 길을 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욥기 1:3)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모든 것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은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한날한시에 죽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친하다는 친구들로부터 마음 상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소망도 없고, 붙잡을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여러분, 이 고백 속에서 나의 가는 길이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욥이 가고 있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고통의 길입니다. 어쩌면 어디를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묵묵히 그 길을 갈 뿐입니다. 그 길 끝이 어디인지 자신은 모릅니다. 단지 아는 것은 나의 길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이 시련의 길 끝에 나를 순금같이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희망뿐입니다.

  그는 그런 시련의 길, 고난을 길을 가면서 왜 나만 이런 길을 가야 하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의 친구들에게는 나와 같이 고난이 없느냐고 따져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것 뿐입니다.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 이 고난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께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고백합니다. 내가 알기에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 19:25-26) 이 길을 가다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대속자이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은 욥의 길을 가는 것 뿐입니다. 그의 길이 너무나고 고통스럽고 힘든 길이지만 그 길을 묵묵히 감당할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큰 상급으로 갚아주셨습니다. 베드로도 베드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게 순교의 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순교의 길! 결코 쉽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베드로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어느 길로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요한이 가야할 길이 어떻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야 할 길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너는 네가 가야할 길, 네가 나를 따라야 할 그 길만 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이 가는 길에 관심 갖지 말고, 네가 가야할 길만을 충실하게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기 위해서 온 힘을 다 쏟는다면 다른 누군가가에 어떤 길을 가는지 하는 것이 내겐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따라 사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다른 길을 간 바나바에 대해서 뭐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바나바도 바나바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길, 그 길을 바르게 가고 있습니까? 그 길을 가면서 자꾸만 곁눈질하고 있진 않습니까? 아무개는 저 길을 가는데 왜 나는 이 길을 가야만 하느냐고 불평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사십시다. 너는 나를 따르라!” 내가 따라가야 할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에만 집중하며 사십시다. 내가 주님을 따라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에게 넉넉히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찬송하며, 기쁨으로 나의 길을 가십시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족한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