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고
갈 5:25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 여럿 있습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 또는 ‘교인’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기독교신자’ 또는 ‘신자’라고도 부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호칭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입니다. 행 11:26에 나오는 호칭인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호칭은 신약성경에 서너 차례 나올 뿐입니다.
성경에 주로 많이 나오는 호칭은 ‘성도’입니다. 이 말은 ‘거룩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을 이어서, 신약에서도 성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만 따져도 수십 차례 이상 나오고, 구약까지 합한다면 다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성도라고 부를 때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행 2장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절에는 누군가를 성도라고 부를 때,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전 3:16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도들은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롬 8:9를 보면,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 안에 성령이 거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곧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성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성도라면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성령이 거하시는 삶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살고
우선 “성령으로 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바로 앞 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앞 절의 말씀과 깊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도들은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그동안 육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욕과 탐심을 따라 살았는데, 예수 믿은 뒤에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육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욕과 탐심을 따라 살았는데, 예수 믿고 성도가 된 뒤에는 성령을 따라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을 보면 ‘리비도’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이 이론에서 리비도를 ‘인간 활동에너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프로이드는 사람은 이 리비도라는 에너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리비도가 가장 강력하게 분출되는 영역이 성적 본능이라고 해서 이것을 성적에너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로이드는 이 리비도가 자아 즉 ‘에고’에 모여 있다가 어떤 대상을 향해 움직일 때 인간 활동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에너지 흐름이 억제 당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하고, 어린 시절의 대상에 붙잡혀 있는 것을 ‘고착’이라고 하고, 이타적이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향할 때 ‘승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프로이드는 인간은 리비도로 산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바울도 예수 믿기 이전의 사람들이 이와 같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리비도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가 바로 정욕이고, 또 탐욕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믿고 성도가 되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즉 정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려서 설명해 보면, 이런 리비도와 같은 정욕과 탐욕의 육체 에너지를 억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신 성령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에너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의 5:17절에서 이런 사실을 다른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이 있고 또 성령의 소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고, 성령이 마찬 가지로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성령의 소욕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마음에 소원을 품는 대상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것이요, 채워도 채워도 다 채울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헛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망,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적인 욕망,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몸부림치는 권력욕과 명예욕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 마음은 우선 대상이 저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이요, 한 번 채우면 늘 충만한 기쁨을 주는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가 후원하고 있는 문성 이민아 선교사님이 최근에 안식년을 마치시고 다시 사역지인 파푸아뉴기니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들은 30년이 가까이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과 원시 밀림 속에 살면서 그들의 말로 글을 만들고, 그 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또 제자훈련을 해왔습니다.
이분들이 처음 이곳으로 보내심을 받아 갈 때 무척이나 두려움이 컸다고 합니다. 이 원주민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인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도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정말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성령께서 두 분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들을 찾아갔을 때 뜻밖에 두 분을 환대해 주더랍니다. 그리고 말도 잘 통하지 않을 때 나름대로 복음을 전했는데 스폰지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더랍니다. 이들의 말을 배우고 어느 정도 소통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가르쳤답니다. 이들은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으려고 진심으로 회개하더랍니다. 그 맑은 영혼을 보면서 두 분은 이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답니다.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이들을 보고 싶어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두 분이 정말 이 밀림의 부족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두 분에게 이들에게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주셨고, 두 분이 기도한 대로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 피하고 싶고 심지어 도망치고 싶은 곳에 가고 싶은 마음, 사람들이 외면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 낭비처럼 보이고 헛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 바로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육체가 주는 정욕이나 탐심 말고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내게 하고 싶도록 푸시하시는 소원이 있습니까? 성령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거룩한 갈망이 있습니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행하고
다음으로 본문은 “성령으로 행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행한다고 번역한 원어는 ‘스토이케오’(στοιχέ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열을 지어가다’, ‘발자취를 따라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앞의 5:16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는 말과 같은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성령으로 살면 당연히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선한 마음을 주셔도 그것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하도록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2:14-3:1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원어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를 번역한 말입니다. 인간 정신을 뜻하는 프쉬케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 성령 받지 못한 사람으로 인간의 죄악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원어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γοις)를 번역한 말입니다. 연약한 인간을 뜻하는 사르크스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았지만 죄악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는 신령한 사람입니다. 원어 ‘프뉴마티코이스’(πγευματικοίς)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을 뜻하는 프뉴마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을 다시 번역해 보면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을 받은 영이 주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둘입니다. 바로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성령을 받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연약한 본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체적 욕망을 느끼고, 또한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느끼지만 이를 따르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서 영에 속한 사람은 육체적 욕망을 느끼지만 이것을 잘 제어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따라 삽니다.
고전 3장에서 바울은 그 차이를 어른과 어린 아이의 차이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린아이가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직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따르기에는 영적으로 어리다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숙한 어른이 밥을 먹고 단단한 음식도 잘 소화해 내는 것처럼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잘 따라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강열하게 느끼고, 철저하게 그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육체적 욕망을 뿌리치고 거룩한 욕망만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행할 수 있을까요?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엡 5: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면서 술 취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과 술 취함이 유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술에 취한다는 것은 술 몇 잔을 마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자기가 술기운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아예 술기운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술기운이 자기감정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멀쩡하던 사람이 울기도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합니다. 또 자기 인격을 지배합니다. 얌전하던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옷을 벗고 아무데서나 소변을 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성령을 받아도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령으로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성령의 강력한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 감정을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생각을 지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선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지를 지배하십니다. 담대해지고 결단하게 되고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행하려면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사모하고,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성령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이 비슷한 점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의 열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술 취함은 그 열매가 엡 5:18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방탕함입니다. 술 취하게 되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 스스로 실수를 저질러 큰 손해를 보게 되고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됩니다. 갈 5:22가 그 열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런 열매들은 마치 맛있게 잘 익은 과일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기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렁주렁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 이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받은 성도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소중히 품고 성령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령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