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무얼 향해 달리고 있는가?
< 본문 – 빌립보서 3:12-16 >
흔히 우리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참 좋아합니다. 인생은 정말 마라톤 경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마라톤은 다른 경기에 비해 스타트(start)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운동 경기 중에 스타트가 중요하지 않는 경기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마라톤은 그 중에서도 스타트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거리 경기에서는 모든 선수가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경기를 시작합니다. 0.1초, 또는 0,00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단거리 경기에서는 작은 차이가 순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공정하게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라톤 경기에서는 출발선 맨 앞에 선 사람도 있지만 그 뒤에서 출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사진1-2020년 보스톤 마라톤대회 출발선> 물론 그 동안의 성적이 좋은 사람을 앞자리에 세우긴 하지만, 그렇다고 뒤에서 출발한 사람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뒤에서 출발해서 불이익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차이가 많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습니다. 각자 출발점이 다릅니다. 어느 나라, 어떤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으냐 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보다 나은 환경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열악하기 그지 않는 환경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나라일지라도 생활이 넉넉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때론 그게 불평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만, 마라톤과 같은 인생에서 그 환경만을 탓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던 수저이론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절망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데 나는 흙수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다 인생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흙수저라고 해서 인생에 다 낙오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출발선은 각각 다를지라도 내가 달려야 할 인생의 길을 힘차게 달리다 보면 누구나 행복한 인생, 성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마라톤이 우리 인생과 비슷한 또 하나는 무조건 빨리 달린다고 완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경기보다 마라톤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지구력과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출발할 때 있는 힘껏 달리다 보면 나중에는 체력이 달려 낙오하고 맙니다. 42.195km를 완주할 때까지 체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체력 안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중도에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구간에서 빨리 달려놓는다고 나머지 구간이 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출발할 때 앞 사람 따라잡겠다고 힘껏 달리다가 곧 지쳐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무난하게 완주하기 위해서는 어떤 한 구간에서 무리하게 질주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 가운데 그렇게 무리하게 질주하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에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 가운데 하나가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화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가상화폐에 단순히 수익률이 좋다는 이유로 투자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열심히 직장생활하는 것만으로는 내 집 마련하는 것이 힘든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가상화폐는 마치 도박을 하는 것 같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열심히 땀흘려 일해서 벌기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려스러운 현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파이어족이란 젊었을 때 열심히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자립한 후에 조기에 은퇴하고 노년을 즐기면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모으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절약합니다. 하고 싶은 것도 하지 않고, 즐기는 것도 다 포기합니다. 차도 사지 않고 죽을 고생을 해서라도 돈을 모으는 것이 목표입니다. 젊었을 때 거지처럼 살더라도, 빨리 돈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충분한 자금을 모아 40대에 퇴직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돈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틀렸다』의 저자인 수즈 오만(Suze Orman)이 지적한 대로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만 달러(약 60억)를 모아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최소한 수십억을 모아야 조기에 퇴직하고 노년을 즐길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만큼의 돈을 모으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젊었을 때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고 돈을 모아 노년을 즐긴다고 하지만, 오늘의 삶을 즐기지 못한 사람들이 노년이 되면 인생을 보람되게 보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삶에서 행복을 포기하고 내일의 꿈만 꾸다가 나중에 희망하는 그런 삶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죽도록 고생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보는 것처럼, 젊었을 때 파이어족만큼은 아니어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조금 여유있게 살려 하는데, 건강이 나빠지고 가정이 위기를 맞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만 했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네 인생은 빨리 간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적절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우리 선조들이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라고 교훈했을까요? 누구나 빨리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우리보다 먼저 인생을 산 사람들이 일확천금이 인생을 망친다고 가르쳐줍니다. 조금 늦더라도 나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여 있는 돈을 모아야 가치있고 보람된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도 무조건 빠르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절할 때 승진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이 마라톤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인생을 망치거나 뒤떨어진다고 말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처럼 ‘인생을 짧고 굵게’라는 말로 포장하여 우리의 헛된 욕망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결코 내 마음대로 짧고 굵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의 거짓된 욕망이 우리를 그렇게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라톤만이 아니라 모든 경기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목표점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으면 그 선수의 기록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무슨 경기이든 경기를 하던 과정에서 공정하게 경기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규칙을 어길 경우 실격처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경기하는 과정도 중요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결승선입니다. 아무리 힘들게 42.195km를 달려온 마라톤 선수라 하더라도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달려간다면 그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결승선은 중요합니다. 그 결승선이 마라톤을 하는 선수들에게는 달려야 할 목표지점입니다. 그 목표점을 향해서 선수들은 힘찬 발걸음으로 달음질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의 결승선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목표점으로 설정하고 달리고 있습니까? 특별히 오늘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청년들에게 묻소 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목표점이 있습니까? 그 목표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특별히 신앙을 가진 우리 젊은이들은 이 질문을 깊이 새기며 대답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 젊은이여! 그대 지금 무얼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마라톤과 같은 인생에서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말씀을 마라톤에 비유하여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이런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도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위대한 사도라도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노년이 되어 그의 인생을 마감해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주후 61-62년 경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말합니다. 감옥에서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후 약 5년 후인 주후 67년, 네로 황제 때에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생애에서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쓴 편지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열심히 수고했으니 쉴만도 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힘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요즘으로 말하면 금수저출신입니다. 교육의 도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집안이 탄탄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그는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온 사람이었고,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헬라문화와 헬라철학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그의 스펙으로 말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만난 이후 사도 바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에게 지금까지의 스펙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의 과거를 그는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빌립보서 3:7절 이하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 3:7-9)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펙, 그의 과거, 그리고 그가 얻었던 모든 경험과 지식과 꿈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귀한 것들을 다 버린 것입니까? 그건 그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달려갈 결승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승점이 무엇일까요? 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1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그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도 달려가고 있습니다. 비록 그의 인생은 노년에 이르렀고, 몸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부활을 소망하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부활을 소망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구원의 완성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아직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달음질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1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구원의 완성은 자신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다스리시고 자신을 지배해 주셔야만 온전히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자신에게 주어질 상이 있음도 압니다. 본문 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로 하여금 힘든 인생의 경주에서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게 만든 힘은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디모데후서 4:7-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렇습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완주하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종종 황제가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명예요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라톤 경주를 마치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머리에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임을 압니다. 그것보다 더 큰 명예와 영광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에서 황제가 씌워주는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지만, 인생의 경주-신앙의 경주에서는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며 완주한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그리고 이런 믿음이 이 고백을 하던 사도 바울과 같이 노년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날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늘 믿음의 길을 올곧게 달려가야 합니다. 비록 청년의 때일지라도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마음속에 늘 간직된 목표였습니다. 그게 그의 꿈이었고, 그게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만들어준 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계십니까? 우리 젊은이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대는 지금 무얼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믿음은 우리에게 꿈을 이 땅에 것에 머물지 않게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할 꿈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만 하는 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면서 많이 들어본 말 가운데 하나가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는 문구입니다. 이 말의 태동지는 일본입니다. 일본은 1876년 정부 주도로 북해도에 농업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미국의 그랜트(Ulysses S. Grant, 1822—1885) 대통령에게 전문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선발된 사람이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장이었던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 1825-1886) 박사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클라크 박사는 1876년 8월, 성경 40권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왔는데, 당시 일본 세관에서는 성경의 반입을 거절했습니다. 클라크 박사는 ‘성경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면 자신은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상부의 지시에 의해 결국 성경을 가지고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삿보로 농업학교의 부학장으로 8개월 동안 있으면서 클라크 박사는 농업과 자연과학 일반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성경과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77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사랑하는 젊은 제자들에게 고별인사로 남긴 말이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중요한 문구가 빠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for Christ’라는 단어입니다. 야망을 품되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먕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Boys, be Ambitious for Christ!’클라크 박사가 원래 한 말은 이렇다고 합니다. “소년들이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야망을 품으십시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리사욕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성이라는 허망을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유능한 인간으로 살 것인가 하는 야망을 품으십시오.” 그렇게 신앙교육을 받고 야망을 품은 사람 가운데 일본의 정신적 스승인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와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이 빠진 채 ‘야망을 가지라’는 말만 취하게 되었습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신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야망을 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삶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고, 그 삶의 목적이 그의 삶의 질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나찌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도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거 로마제국을 뛰어넘는 게르마니아(Germania)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방해가 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은 과감하게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유대인들과 주변 나라 백성들을 살해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꿈을 꾸되 무엇을 위해서 어떤 꿈을 꾸느냐. 야망을 가지되 무엇을 위해서 어떤 야망을 가지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꿈의 목적, 삶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했던 ‘소년들이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야망을 품으십시오!’라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굉장한 도전이 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야망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복음을 외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땅끝이라고 알려진 스페인에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부활에 이르러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고린도전서 10:31) 삶을 살았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니까 삶의 방법이 정해졌습니다. 인간적인 욕심도 버릴 수 있었고, 세상의 헛된 것에 목숨 걸지도 않았습니다.
청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열심히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픈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성공하고 싶습니까?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까?
이런 질문에 조금이라도 내가 신앙인이라는 자의식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진짜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에 ‘영원한 가치, 신앙의 가치’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오늘을 꿈꾸며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가 단순히 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신앙인일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게 우리의 꿈이요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 여려분, 그리고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내가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는 그 길 끝에 주님이 서 계십니까? 그 길 끝에 주님이 보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