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

 

 

고린도전서 12: 25~26

할렐루야!
5월입니다. 5월이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은‘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렇다고 어린이에게 선물 주는 날이란 뜻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도록 가르치고,

부모와 교사들은 어린이들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잘 양육하겠노라 결단하는 날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들을 신앙의 주인공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를 다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유산을 잘 물려줘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어린이들이 교회에 오지 못해서 무엇을 주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귀히 여기는 마음에는 변함없습니다.

 

요즘은 어른과 아이가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노래를 같이 부를 수 있겠어요? 게임을 같이 하겠어요?
옛날이야기를 아이들이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어른이 좋아하는 음식이 다릅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어른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찬송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모아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헬라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친교, 교제, 사귐’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fellowship(NIV)’으로 번역했는데,
신앙생활 오래하신 분들은 익숙하고, 친근한 단어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이 오해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친교, 교제’라는 말을 단순히 성도들끼리 커피를 마시는 것,
혹은 맛있는 걸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 존 스토트, 『목회자와 평신도』, 아바서원, p.127. 참조. >

 

속회나 선교회로 모이면 먼저 예배를 드리고 다과나 식사를 나눕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시면 안되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빨리, 짧게, 신속히’ 드리고, 예배 후 시간은 ‘길게, 느긋하게’갖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얘기하는 것, 웃다가 헤어지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가 아닙니다.
‘수다’, ‘잡담’, ‘즐김’을 ‘코이노니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대화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를 오래 했다고 ‘주 안에서 교제’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꽃놀이 가고 단풍놀이 가서 잘 놀고 오면 그것이 교회에서의‘코이노니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모임이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코이노니아가 그 수준에만 머문다면 일반적인 ‘친목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코이노니아’는‘연합, 공유, 참여’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 바울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과 교제(코이노니아)하게 하셨습니다.
이 교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의 연합된 신분을 의미하는데,
이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능력의 원천(샘, 근원)이기도 합니다.(요 15:1~5) -비전성경사전 참조-

 

‣ 요한1서 1장에서는 ‘공유’의 측면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7)
여기서 말하는 “사귐”은 복음의 유익을 함께 소유한다(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공통된 믿음’과 ‘공통된 구원’을 소유하고(가지고) 있으며,
은혜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입니다.(딛 1:4; 유 3절; 빌 1:7)
믿음, 구원, 은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분모입니다.
믿음/구원/은혜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태어나 성자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아
성령님이 거하시는/ 함께 계시는 처소가 되는 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 존 스토트, 『목회자와 평신도』, 아바서원, p.137~139. & 비전성경사전 참조 ]

 

‣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에서는 ‘참여’의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했고, 체험, 동참, 함께하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4절에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4) 했습니다.
여기서 ‘코이노니아’는 ‘참여’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의 인내와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동반자들입니다. <비전성경사전 참조>

 

이처럼 ‘코이노니아’는 성도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처럼 행하는 것,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5~26절 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5~26)

 

그래서 우리는 …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해 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귐’이요, ‘친교’이며, ‘교제’입니다.
또한 ‘코이노니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은‘하나님’과 ‘나’/ ‘나’와 ‘너’가 얽혀 있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성도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좋으면 성도들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 반대로 성도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나빠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누군가를 통해 마음 아픔을 겪게 되면
교회를 등지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까지 등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하나님 – 나 / 나와 – 너’와의 관계가 잘 되는 것이‘코이노니아’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좋지 아니하니”하신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창 2:18)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독신으로 사는 분이나 혹은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분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은 친교가 필요하고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고, 때로 배신당하더라도,
결국엔 사람을 그리워하고, 누군가와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 일터 신앙 운동의 지도자>‘브루스 라슨(Bruce Larson)’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친교에 대한 욕구는 술집의 인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술 먹는 것만 좋아해서 / 정말 술이 좋다는 이유로
술집에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술이 그렇게 좋으면 혼자 마셔도 되지요.
사람들은 ‘술’보다 ‘술자리’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술집에 가는 것입니다.
술집/술자리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귐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서는 서로 기도해 주는 관계, 속마음 터놓고 얘기하며
울 땐 같이 울고, 웃을 땐 같이 웃을 수 있는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친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친교는 주일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회로 모여라, 선교회 참여하여 활동해라, 찬양대 해라,
교사로 섬겨라’…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자리, 섬기는 자리에 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그룹으로 모일 때 더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모여 기도하고, 성경공부 하고 봉사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롬 16:3~5, 몬 1,2)

 

코로나가 진정되면 친교와 교제, 섬김과 봉사를 함께 하며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예배‘만’드리는 단계를 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교회 소모임을 갖기 어렵습니다.
모이면 긴 시간 함께 있어야 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뭔가를
함께 마시고 먹게 되어 방역에 취약해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속회나 선교회를 이대로 계속 미룰 수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줌’이나 ‘구글 듀오’ 등을 이용해 온라인 심방을 진행한 것처럼
속회 모임도, 선교회 모임도 온라인으로 진행해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온라인 도구를 이용해 속회를 진행하는 분들이 있어서 소개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영상을 잠깐 보겠습니다.(에덴 1속 줌 속회 영상, 2~3분 가량)
처음이 어렵지 해보면 여러분도 해보면 금방 익숙해집니다.
온라인 모임이 익숙하지 않거나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교구 목사님께 도움을 청하면 친절하게 도와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코로나 핑계만 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내년에도 마음 놓고 자유롭게 모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신 확보도 안된 것 같고, 접종도 큰소리 친 사람들 말처럼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튼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제하고, 섬길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우리도 찾아야 합니다.
코로나가 계속되고, 백신 접종도 계속 늦어진다면
우리는 교제하고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새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 교회가 어떤 곳이며 어때야 하는 지 알려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에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그 “서로”라는 말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무엇인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5)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돌봐주고, 존경하는 것이 교회의 참된‘코이노니아’입니다.
(롬 12:10; 13:8; 살전 3:12; 4:9; 벧전 1:22; 요일 3:11, 23; 4:7; 11, 12; 요이 5)

 

로마서 14장 13절 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갈라디아서 5장 26절 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이렇게 “서로”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고, 시기하거나, 거짓말 하지 말고,
헐뜯거나, 비난하거나, 악하게 말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 14:13; 갈 5:15, 26; 골 3:9; 약 4:11; 5:9)

 

그리고 에베소서 4장 2절, 3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2, 32)
야고보서 5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히브리서 10장 24절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서로”귀히 여겨야 합니다. 세워줘야 합니다.
용서하고, 용납하며, 친절하고, 온유하며, 권면하고 복종하며 위로해야 합니다.
(롬 14:19; 15:17; 엡 4:2, 32; 골 3:15; 갈 5:15)
“서로” 대접하며, “서로” 기도해주고,“서로” 짐을 져야 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어야 합니다. (약 5:16; 갈 6:2; 롬 12:5)
[ 존 스토트, 『목회자와 평신도』, 아바서원, p.145~146. 참조. ]

 

‘코이노니아’는 서로 존중하고, 용납하고, 용서하며, 아끼고, 베풀고, 사랑할 때 완성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외롭게 삽니다.
개인주의다 뭐다 하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참된 관계를 갈망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 믿는 우리가 붙들어 줘야 합니다.
따뜻하게 대해야 합니다. 교회에 오게 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자비와 은총을 우리를 통해 느끼게 /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코이노니아’를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한 달 동안 ‘에클레시아(교회), 디아코니아(봉사/섬김),
마르투리아(증인), 코이노니아(교제)’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말씀 전했습니다.
‘교회를 가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면서 이 찬양을 함께 부르고 싶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처럼 되어야 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는 방랑자가 되지 말고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는 사명자가 되라.”
여러분이나 저나 … 우리 모두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는 사명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