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합당한 삶(Ⅰ)
(빌 1:27-30)
Ⅰ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때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은 사실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 긴급한 처지였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이 빌립보서에는 그가 그래도 편안한 가운데 보냈던 다른 편지들보다 더 절실하고 간곡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절실하고 간곡한 마음으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이 권고한 내용이 오늘 읽은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27절 말씀 상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복음, 즉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부활의 능력을 믿고 재림의 소망을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믿음의 내용, 즉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부활의 능력을 믿고 재림의 소망을 믿는 믿음의 내용은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사람은 삶 자체가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즉 복음을 믿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말입니다.
Ⅱ
그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원어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인데, 그 뜻은 복된 소식 또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소식, 그리고 가장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에 대한 소식, 즉 영생에 대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영원히 죽게 될 사람에게 구원과 영생의 소식보다 더 복되고 더 좋은 소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할 사람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길, 즉 영생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요 14:6) 따라서 복음은 길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좀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즉 예수님입니다.
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 말씀은 헬라어로 폴리튜에스데(πολιτεύεσθε)입니다. 이 폴리튜에스데라는 단어는 ‘행하라’ 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따라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대로, 그리고 예수님처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폴리튜에스데라는 단어를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게 되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의 뜻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폴리튜에스데란 단어의 어원은 폴리테(πολίτε)입니다. 이 폴리테라는 단어는 폴리테스(πολίτηs) 즉 정치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이 단어는 헬라어로 시민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폴리튜에스데라는 말에는 시민으로서 행할 바를 행하라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나라의 시민이 되면 그 나라 시민으로서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져야 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천국시민이 되었다는 말이니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천국시민의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답게 천국시민의 의무와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 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에 내포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즉 예수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 의롭다함, 영생, 천국시민권,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그런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특권을 얻은 것에서 그리스도인이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구원의 은총에 따른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도 다해야만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천국시민답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그 말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의 뜻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복음 즉 예수님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더라도 늘 천국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답게, 그리스도의 언어와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나 불의와 타협하며 대충 살아서는 안 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identity)과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호수 안에 있는 오리는 물에 떠 있으나 물에 젖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속에 살고 있으나 세속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Ⅲ
사실 바울이 이런 정치적인 용어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권고한 이유에는 빌립보라는 지역적 특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아닌 빌립보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로마 시민권으로 인해 그 곳에서도 여러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큰 권세를 행사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로마 시민권 자답게 그들이 지켜야할 로마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와 멀리 떨어진 빌립보에 살고 있었으나 로마의 풍습과 전통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옷도 로마 옷만 입었고, 이름도 로마식으로만 지었습니다. 말도 남이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라틴어만 썼고, 심지어는 배가 고파도 로마인의 자존심을 걸고 그들이 정해 놓은 결코 구걸해서는 안 된다는 묵계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런 로마 사람들을 빌립보 사람들은 늘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로마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빌립보 사람들의 생각을 바울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도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그것 하나로 여러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그것과 함께 그들은 로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도 다하고 있지 않느냐’ 하면서 ‘ 빌립보교회 교인들아! 너희는 예수님의 구원해주시는 은혜를 받아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가진 천국시민이 된 성도들이다. 그러나 그 특권과 그 특권을 지닌 천국시민이라는 자부심만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너희도 로마 사람들이 로마 사람답게 살듯이 천국 시민답게 살아야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Ⅳ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어떤 생활입니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만 오늘은 시간관계상 두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복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27절 하반절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이 말씀에 나오는 ‘서서’라는 단어는 군대용어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그냥 ‘서서’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스텐드 펌(stand firm), 즉 굳게 선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굳게 선다라는 말은 부동자세를 말합니다.
군대를 갖다오지 않은 분도 부동자세가 어떤 자세인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동자세란 주변의 환경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도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총알이 눈앞에 다가와도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이 부동자세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바로 그런 자세의 삶을 말합니다. 즉 어떤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어떤 고난의 풍파 속에서도, 그 환경과 그 고난에 무릎 꿇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의 자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의 자세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삶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그 말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521년 브룸스(Wormser)에서 열린 제국회의의 종교재판소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주장하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한마디만 한다면 살려주겠노라는 그런 타협안을 제시 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그 때 그는 그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고치라고 하시기 전에는 절대 번복할 수 없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그 때 루터가 보여주었던 결연한 자세가 사실 오늘의 성도들에게 너무도 아쉽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시험에도 말씀을 의심하고, 조그마한 환난에도 신앙의 길에서 이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은 변해도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복음으로 주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분명 세상 것을 의지하는 것은 상한 갈대를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서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복음에 굳게 서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둘째, 복음, 즉 예수님을 전하는 사역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27절 하반절 말씀 중 앞에서 읽은 말씀 다음 부분부터 읽습니다.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말씀에 나오는 대로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권면하면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참여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그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란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협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런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바울의 의도를 가지고 교회 안의 일반 성도들과 선교사나 목회자와 같은 성장을 가진 성도들을 구분한다면 교회 안의 일반 성도들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에는 그들도 모두 다 복음을 전하는 자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볼 때에는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구분하기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협력자로 구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의미에서의 복음을 전하는 자란 국내외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나 목회자와 같은 성직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협력자란 국내외 곳곳을 다니며 복음 전하는 자들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협력하는 교회 안의 일반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직접 교회 안의 일반 성도들이 국내외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역이나 목회사역에 참여하지 못한다 해도, 선교지에서나 목회지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나 목회자를 위해 선교비를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그들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 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정말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복음 전도자들만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 많았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옥에 갇힐 때도 많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크게 확장되 ㄴ이유는 그 사역의 배후에 그런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에도 루디아와 같은 여인이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은 협력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 번에 걸친 큰 전도 여행을 통해 여러 교회들을 세웠고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복음의 협력자들을 통해 이방인 선교를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바울은 자기의 사역을 돌아보며 그동안도 자신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감사하면서도 그들이 자신만이 아닌 복음을 전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역에도 협력자가 되기를 바라며, ‘너희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협력자가 되어라.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때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선교사나 목회자가 사역을 잘 감당하려면 그 사역에는 반드시 좋은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결코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협력자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선교나 목회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내용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협력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성도의 구체적 삶의 내용입니다.
근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워지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는 1773년에 인도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휴가도 없이 42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역에 전심전력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신·구약 성경을 25개의 인도 방언으로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을 해 냈습니다. 그리고 문서 선교와 학교설립, 그리고 교사훈련과 교회설립, 그리고 많은 목회자 양성 등 위대한 선교의 업적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 그의 사역을 지켜본 많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인도의 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으기로 결심하면서 여러 선교단체들을 조직하였고, 그 선교단체들을 통해 많은 선교사들이 인도에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윌리암 캐리의 그런 선교사역의 성공의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그의 그런 성공적 사역의 원인으로 그의 뛰어난 능력과 철저한 헌신 자세, 그리고 그의 투철한 의지 등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원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누이동생입니다. 그의 누이동생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그마치 52년 동안 전신불구로 누워만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전혀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빠가 선교사로 인도에 가게 된 그 날부터 오빠의 선교사역을 위해 누워있는 상태에서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윌리암 캐리는 그녀가 자신의 선교사역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자신의 선교지 상황을 자세하게 편지로 알리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편지의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어 윌리암 캐리가 위대한 선교 사역의 승리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까? 그러기에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 다 협력자가 되어주어야 하고, 구역장님들이나 교사 선생님들이 다 협력자가 되어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목회도 되고, 그래야 우리교회가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교회는 동티모르 단기선교를 여러 성도들의 협조와 몸과 시간과 물질을 바친 36명의 성도들의 수고를 통해 감당하고 왔고, 그 단기선교 기간 중에 이름없이 헌금해준 몇몇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 두개 교회당을 건축하여 봉헌식도 거행했습니다만 그런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복음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매월 드리는 선교헌금이나 매일 드리는 선교사님들을 위한 기도도 그런 사역의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복음의 협력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의 합당한 생활입니다.
Ⅴ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오늘 저도 여러분에게 똑같이 권면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 말씀은 천국시민의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천국시민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서든지 복음,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협력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린 말씀 그대로 복음에 굳게 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협력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구체적 네 가지 내용 중 나머지 두 가지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