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예정

엡 1:11-14

 

   잠실 롯데월드타워는 무려 30년 장기 프로젝트로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2010년에 허가를 받고 건축이 시작된 뒤 2017년에 사용승인이 났으니까, 약 7년 정도 건축공사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에 부지를 매입한 뒤, 무려 2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계획하고 설계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변화되는 정치상황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워낙 거대하고 높은 빌딩이어서 최고와 최초의 기술들이 총망라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집을 하나 지으려고 해도 철저하고도 치밀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복잡하고 거대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어떠셨겠습니까? 아무렇게나 아무런 계획 없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설계가 있었습니다.

   창 1:2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기 위해 계획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 139:1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계획과 실행과정은 우리가 볼 때 정말 기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건축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롯데월드타워 설계도를 본다면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신비로울 뿐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대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 속에서 우리가 예정을 받았고, 그 예정대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예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성경원어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미리’라는 뜻의 ‘프로’(προ)와 ‘결정한다.’는 뜻의 ‘오리조’(ορίζω)를 합해 놓은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미리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후에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구원할 사람을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교부가 성경에 나오는 이 예정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하나의 체계적인 교리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예정론’(predesti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예정에 대한 논쟁

 

   이 예정론이 하나의 교리로 체계를 잡아가면서 여러가지 논쟁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이런 논쟁은 신앙생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꼬리 잡기 하듯 논쟁을 위한 논쟁을 벌여온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중예정에 관한 논쟁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중예정이란 예정이 이중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선택’ (election)이라는 예정이고, 다른 하나는 ‘유기’(reprobation)라는 두 가지 예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는 예정하셨고, 누구는 버리시기로 ‘유기’하시는 예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반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누구는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채 창조하셨고, 또 누구는 버리시기로 예정하신 채 창조하셨다는 말이냐?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이중예정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성경의 근거로 삼고 있는 말씀이 롬 9장에 나오는 토기장이의 비유 말씀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거나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도 그렇게 선택할 절대주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중예정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절대주권으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씀을 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진흙을 사용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절대주권을 일부의 사람들을 지옥으로 예정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중예정을 말하려는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들의 논리적 주장을 위한 증빙자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택의 예정을 말씀하고 있는데, 선택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유기도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중예정을 발전시켜서,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정론을 주장하다보면 자칫 인간의 자유의지가 필요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결국 구원을 받게 될 텐데 전도는 해서 뭐하나, 어차피 유기하시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아무리 전도해도 헛수고일 텐데 전도는 하면 뭐하나?” 

   이런 주장도 성경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빌 2: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어 가실 때 사람들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을 이루실 때,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참여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자가 한 규수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부왕과 중전에게 간청을 해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왕실에서 그 규수를 세자비로 간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규수와 그 가문이 꺼려합니다. 규수가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고, 이 가문도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합니다. 세자가 공을 들여 규수의 마음을 얻습니다. 또 정성을 들여서 가문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했습니다. 결국 이 규수와 가문이 우여곡절 끝에 왕실의 선택에 감사하며 응하기로 결정을 했고, 세자비가 되었습니다.

  이 규수가 세자비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규수와 가문이 결정을 잘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왕실의 선택만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먼저 왕실의 선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 선택이 이루어지기까지 성령의 감동과 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고, 그리고 우리의 자유 의지적 결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하나님의 예정이고, 결국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었습니다.

 

예정의 은혜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 예정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우선 선택의 은혜입니다.

  요 15: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먼저 주님을 택해서 믿었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셔서 주님의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자기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믿겠다고 주 앞으로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주를 따르겠다고 주 앞으로 나온 사람도 없습니다. 비록 자기가 믿고 따르겠다고 나온 경우가 있었지만 주의 말씀을 들어보고는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즉각적으로 기뻐하며 감사한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원하지 않지만 주님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따랐습니다. 모세 같은 경우는 몇 차례 거절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깨닫고 난 뒤 이 택함 받은 은혜가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값지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부동산투자는 하도 변동성이 커서 도박 같은 투기가 될 경우가 많습니다. 부동산 가격이 고공행진을 할 때는 노른자위 땅에 분양이 되는 아파트 청약률 수백 대 일이 넘습니다. 너도나도 가격이 오를 것을 알기 때문에, 당첨되는 순간 몇 억이 그냥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 건설사가 아파트를 지어 분양을 하는데 사람들이 관심이 없습니다. 미분양이 쌓였습니다. 회사가 자기 사원들에게 특가로 싸게 거의 강매처럼 분양을 했습니다. 직원들은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집값이 분양가의 배 이상 올랐습니다. 직원들은 그제야 회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귀한 줄 알았다면 사람들이 교회 앞에 줄을 섰을 것입니다. 번호표 받아가며 밤샘 줄을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관심이 없습니다. 전도해도 마땅치 않아하고 심한 경우는 박해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고 믿음이 깊어진 뒤에는 달라집니다.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택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택함 받은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엡 1:4를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정의 시점이 창조이전이라는 뜻입니다.

   최근 기업에서 비정규직 채용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정규직원이 아니라 계약직, 인턴직, 파견직, 일용직 등의 형태로 직원을 채용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업무능력을 검증한 뒤에 정규직으로 채용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결코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임시로 선택해서 교회 잘 다니나 검증해 보고 난 뒤 정식으로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임시로 선택한 뒤 봉사 잘하나 그리스도인답게 잘 살고 있나를 검증해 보고, 후에 정식으로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믿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잉태하기도 전에, 아니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이렇게 택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예정의 은혜의 높고 큼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견인의 은혜입니다.

   롬 8:38-3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셔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랑 안에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그 선택이 무산되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성도의 견인’(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결국 구원을 이루도록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탄이 끊임없이 미혹하고 믿음을 흔들어 넘어뜨리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셔서 결국 믿음을 지켜내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 10:27-29를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침내 구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신앙이 흔들리고 심지어 넘어지는 사람들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우리가 믿음의 본으로 삼으려 하는 사람들조차도 넘어진 일이 흔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는 치명적인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덮기 위해 남편인 우리아를 교묘한 방법으로 죽게 했습니다. 이 정도 죄를 저질렀다면 그가 아무리 다윗이라도 끝이 아닐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 회개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넘어진 다윗이 주님께서 내미신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결정적인 죄를 범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신 주님을 따라갔다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그 놀라운 신앙고백을 해서 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뒤에 그를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셨습니다. 처음 그를 부르셨던 그 자리에서 다시 결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넘어졌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내미신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때로는 반복해서 넘어집니다. 때로는 넘어진 채 오랫동안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에는 다 틀린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 생각은 다르십니다. 처음부터 우리 힘만으로 구원을 이루실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십니다. 손 내밀어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지금 넘어지셨습니까? 다시 여러분을 행해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지금 넘어져있는 누군가 때문에 기도하고 계십니까? 아무리 권면해도 일어서려 하지 않고, 또 그런 세월이 너무 오래여서 답답하십니까? 넘어진 그분을 보지 마시고 주님을 보십시오. 성도를 견인케 하시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예정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셔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정 가운데 택함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셔서 우리를 끝까지 견인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구원의 길을 완주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