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어머니
< 본문 – 사무엘상 1:12-18 >
‘기도의 어머니’라고 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인 성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의 어머니 모니카(Monica, 331-387)입니다. 그녀는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로마의 관원이며 부유한 지주였던 이교도와 결혼한 후 그녀는 남편이 주님 품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강요하는 대신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을 따라 절제되고 단정한 품행을 보임으로서 남편이 회심하기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끝에 16년 만에 이교도였던 남편이 주님 품으로 돌아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니카의 기도가 더욱 유명한 것은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 때문입니다. 아들 어거스틴은 학문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불과 16세에 술집 여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는가 하면, 학문을 탐구한다는 이유로 마니교라는 이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물론 아들이 학문적으로 뛰어난 일을 이루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동거녀와 아들을 데리고 어머니 몰래 이탈리아로 떠나자, 모니카는 아들이 있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서 아들을 찾아냈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였는데, 모니카는 거기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신앙적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늘 눈물로 기도하던 모니카의 모습을 보면서 암브로시우가 이런 말로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이 암브로시우스와 교제하기를 원했고, 결국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신앙을 배우기 위한 교제가 아니라 단순히 학문을 위한 만남이었지만,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와 교제하고 학문을 배우고 설교를 들으면서 기독교를 알아가고 결국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후 주님께로 돌아온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모니카는 오스티아(Ostia) 항구 근처에서 병을 얻어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온 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자식을 위해서 30년 동안 눈물로 기도했던 기도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렸던 모니카의 아들 어거스틴은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서양철학사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아마도 모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그리고 무어라 기도하십니까?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기도하는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알지 못하던 우리 옛날 선조들도 자식들을 위해 기도했고, 자식들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내하셨습니다. 매일 이른 아침 정한수를 떠놓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던 어머니들도 많았습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굿을 하기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자식이 잘 될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이 자식을 위한 부모님들의 정성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신앙과 연결하진 않습니다. 부모님들의 그런 수고와 희생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적이진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님들과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의 어머니 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의 아내입니다.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지만, 한나는 남편 엘가나로부터 사랑을 받았음에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불쌍하다고만 여기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때로 저주받은 여인으로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남편 엘가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위로해 주지만, 한나는 자식이 있는 브닌나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했습니다. 괴롭힘을 당해도 한나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해서 뭐라 대꾸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한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편 엘가나가 1년에 한 번씩 성소가 있는 실로에 올가서 제사를 드릴 때, 한나는 남편을 따라 성소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마음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것에 대한 원통과 간절함이 가득했지만, 한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말씀합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여러분, 꼭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해야만 그 기도가 간절한 것은 아닙니다. 한나는 그의 깊은 간구를 하나님께 드릴 때 묵상하듯 기도했습니다. 음성이 들리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을 보고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에 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 마음의 괴로움과 원통함이 너무 커서 차마 소리를 내어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그런 자신의 기도를 15절에서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심정을 통한 것’이라는 말은 나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쏟아부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통성으로 해야만 간절한 기도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붓지 않으면 아무리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그 기도는 그냥 악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나는 온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붓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한나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기원하는 축복을 해 주었고, 그 엘리 제사장의 위로를 한나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더 이상 근심이나 원통함이 없는 밝은 모습으로 지내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의 축복처럼 하나는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한나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한나는 기도할 것이 없을까요? 기도한 대로 아들을 얻었으니 이제는 기도할 필요가 없나요? 한나는 자신이 기도할 때 약속한 대로 자신이 낳은 아들 사무엘을 젖을 먹인 후, 젖먹이는 기간이 끝나자 아이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실로 성소에서 엘리 제사장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가 매년 실로 성소에 올라가 제사를 드릴 때마다 옷을 지어다가 사무엘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 정성을 본 엘리 제사장은 한나를 다시 축복하고, 엘리 제사장의 축복대로 한나는 그 후에도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는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가 첫째 아이인 사무엘을 낳고 젖을 먹일 동안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한나는 매년 사무엘의 옷을 지어 갖다 주었나 하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은 엘리였고, 엘리의 두 아들이 엘리와 함께 제사장 역할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사무엘상 2:12) 그리고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사무엘상 2:29) 하나님의 제사장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아버지 제사장은 하나님보다 그렇게 못된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겨 아이들을 바르게 교훈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영적 암울한 시대’가 바로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그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한나는 아이를 젖먹이면서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 온 마음을 쏟아부으며 기도했던 한나는 아이 사무엘을 젖먹이면서 ‘나는 너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쳤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커야 한다. 이 영적 암울한 시대에 너는 빛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가르치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매년 아이의 옷을 지어다 주면서, 내 아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섬기고 있는지 보았을 것입니다. 옷을 아이의 손에 넘겨주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섬기고 있지? 엄마는 네가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단다.’ 그렇게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엄마의 기도와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기에 사무엘은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이 자신의 인생을 백성들 앞에서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사무엘상 12:3)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결같이 ‘당신은 그런 적이 없노라.’고,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나 우리 백성들 앞에서 불의를 행한 적이 없노라.’고 대답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의 지도자로 살면서 사무엘은 그렇게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그렇게 정직하고 깨끗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한나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영적인 암흑기에 이스라엘의 빛이 되기 위해서 기도했던 어머니 한나의 기도 말입니다.
여러분, 아까 드렸던 질물을 다시 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무어라 기도하십니까?
고대 그리스에 스파르타(Sparta)라는 도시 국가가 있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에 위치했던 작은 국가 도시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강력한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파르타가 그렇게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가정에서 아이를 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국가의 소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교양을 갖춘 부모라 하더라도 부모가 아이를 직접 양육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레스케’(Lesche)라고 하는 곳에 데리고 가서 검사관에게 보여야 합니다. 검사관은 아이를 검사하고 강인하게 자랄 가망성이 없는 허약한 아이나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는 타이게토스(Taygetos)라는 산의 계곡에 갖다 버렸습니다.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없는 존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심지어 강인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건장한 남자에게 보내 아이를 갖게 하는 것을 남자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고, 남의 아내가 마음에 들면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강인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가정에서 보모가 아이를 양육했습니다. 그 때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강보 싸지 않았습니다. 강보에 쌓으면 팔다리와 외모가 자유롭게 자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편식은 허락되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하찮은 짜증이나 울음조차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세가 되면 아고게(Agoge)라는 공교육을 위해서 징집되어 공동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아고게의 목적은 오직 하나 강인한 군사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스파르타에서 생존의 목표는 오직 하나, 전쟁에서 용감한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에 적합하지 않는 아이는 가차 없이 제거당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양육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대 스파르타에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을 강한 군사를 만드는 것에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면, 오늘 우리는 출세와 성공이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해야 한다고, 어떻게든 세상에서 성공하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그게 우리의 가장 큰 바람이 아닙니까? 만일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이라면 우리는 지금 2,500년 전에 스파르타에서 행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아이를 하나님의 경외하는 아이로 양육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도 얻는 것 말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다시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 속에는 세상을 살아갈 모든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 바르게 가르치면 그 아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것만 가지고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가 부족해서 당신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지혜를 주시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를 생각해 보십시다. 한나가 기도로 얻은 아이 사무엘을 젖먹이면서,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지은 옷을 가져다 주면서 아들 사무엘에게 무엇이라 말했겠습니까? ‘너는 세상에서 출세해야 한다. 나라가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엉망이고 하니까 너는 커서 꼭 왕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가르쳤겠습니까? 만일 한나가 그렇게 가르쳤다면 사무엘은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는 것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이 되려 하거나 권력자가 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이끌었고, 정직한 지도자로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살았던 이유는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에게 ‘너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 인생에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른이 되고, 아이의 엄마아빠가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종종 ‘저는 기도할 뿐, 신앙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그것은 부모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까? 자녀들에게 ‘신앙생활 잘해야 한다’고, ‘그것이 인생에 최고 가치 있는 일이고 복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마지막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반쪽 신자’(Half-Way Christian)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쯤 헌신된 신앙인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아는 것 같지만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이 없는 신앙인입니다. 교회에 출석은 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신앙인입니다. 자신을 교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구원에 대한 소망도 없고, 그저 현재 살아가는 삶에만 몰두하는 신앙인입니다. 처음 반쪽 신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17세기 미국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영국에서 신앙에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이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조국 영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온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개척한 새로운 땅에서 후손들에게 믿음의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정회원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가게를 운영할 권한도 주고, 투표할 권한도 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세대가 지나고 난 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 정착하여 정복전쟁을 끝내고 난 후에 보니, 자식들 세대에 신앙이 사라졌습니다. 교회 회중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야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는데, 자식들에게 신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662년 신앙이 없는 자식들에게 교회의 정회원 자격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신앙고백 없이 부모나 조부모의 믿음에 근거해서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의 정회원으로 인정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중도언약’(The Half-Way Covenant)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믿음이 아닌 부모나 조부모의 믿음으로 교회의 정회원 자격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반쪽 신자’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말씀드린 것처럼 청교도들은 순전히 신앙을 위해서 미국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을 빼앗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직 신앙으로 똘똘 뭉친 그들인데, 왜 그들의 자녀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 그저 부모나 조부모의 신앙에 빗대어야 겨우 교회 멤버십을 얻는 반쪽짜리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까? 미국에 건너와 개척 초기에 자기들 먹고 살기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아이들에게 제대로 신앙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아도 어른들의 신앙을 잘 따라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기도한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신앙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계속 권면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런 말 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녀들을 지옥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신앙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힘주어 이끌어도 잘 따라오지 않는 것이 신앙교육입니다. 그러다 하더라도 끝까지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지옥의 길에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습니까? 신앙으로 이끄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자녀 사랑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