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뿐인 십자가!
< 본문 – 고린도전서 1:17 >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프랜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가 그린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이란 그림이 있습니다.(사진1) 이 그림은 고야가 19세기 초, 인간의 무지와 광신 그리고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린 연작그림 중 하나입니다.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린 이유가 있습니다. 중세인 1346년부터 1353년 사이에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 3분의 1인 2,500만 명이 죽었고, 중세의 봉건제도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돈 많은 부자들은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 안에 진귀한 미술품들을 장식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흑사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 생겨난 풍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고행단’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흑사병이라는 벌을 내리셨다고 생각하고, 신앙인들이 자신의 몸에 채찍을 가하는 참회의 행렬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들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몸도 씻지 않았습니다. 아무 데서나 잠을 자는 등 아주 비위생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채찍질 때문에 생겨난 상처로 인해서 염증이 생겨나고, 그 염증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몸은 흑사병의 숙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그 때 생겨난 십자가 고행단의 풍습이 지금까지도 사순절이 되면 유럽 여러 도시들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오른쪽에는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왼쪽에는 우뚝 솟은 성모 마리아의 동상을 어깨에 메워 옮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동상 앞에는 검은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사람들도 보입니다. 가운데 뾰족한 모자를 쓰거나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반나체의 사람들의 등에는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하여 피가 흐르는 광란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등에서부터 흐르는 붉은 피는 허리를 타고 흰옷에까지 흘려내리면서 종교적 광신이 빚어낸 인간의 비이성과 잔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바르지 못한 종교적 신앙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흑사병을 신이 내린 징벌이라고 믿고, 교회에 모여 집단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십자가 고행단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참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흑사병을 멈추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사병은 그런 비위생적인 상황이나 집단 모임을 통해서 더욱 확산되었을 뿐입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앞세우고 스스로 고행의 길을 자처한다 하더라고, 그게 전염병을 그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 속에서 두 번째로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신앙인들 중에도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했던 그 시대의 비이성적 신앙행태를 보였던 그 모습을 답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코로나에 안 걸린다.’거나, ‘교회당은 코로나에서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코로나19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만능 요술지팡이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경책을 자동차에 실고 다니면 사고가 나지 않을 것같은 안심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야만 참된 능력이 되는데, 마치 성경책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습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분명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말씀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쉽게 말하면 십자가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기에 그것을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많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페르시아 시대부터 고대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가장 끔찍한 사형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전 2세기에는 노예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 반란을 진압하면서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노예 수천 명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예수님 외에 다른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십자가,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라고 말할 때에 그 십자가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검투사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잡혀 처형당한 수천 개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인 골고다에 세워진 십자가가 세 개였지만,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도 우리가 믿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십자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진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십자가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십자가만 존재할 뿐입니다. 골고다에 세워졌던 십자가, 그 중에서도 우리 주님이 달리신 바로 그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을 주는 십자가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십자가가 그 의미와 정신은 사라지고 장식품으로 변질되고 있음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무런 뜻도 없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십자가로 귀걸이를 만들어 달고, 십자가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가 그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인식 속에 십자가가 능력이라고 각인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312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 Aurelius Constantinus, 272-337년)는 동방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로마 테베레 강 밀바오(Milvio) 다리에서 막센티우스(Maxentius, 278추정–312년)와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숫적으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는 신의 계시를 받고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리고 나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 십자가가 ‘키로 십자가’(사진2)로 불리는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후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었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교황은 자신들의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공경하도록 강화하면서 십자가의 정신보다는 십자가라는 형태가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십자가는 곳곳에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기사단의 옷이나 방패에도 십자가 표시를 했고, 성당의 꼭대기마다 십자가를 올려놓았습니다. 십자가의 모양도 다양해졌고, 십자가에 붙여진 이름도 다양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십자가의 의미도 모른 채 목걸이나 귀걸이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타투(Tattoo)로도 십자가가 애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셨던 십자가, 그것만 우리에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능력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교수가 쓴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십자가 모양이 있다.
창문에도 있고
거리마다 길이 교차되는
십자로에도 있다.
척추를 세우고 양팔을 벌려도
당장 십자가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세상에는 많은 십자가가 있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오직 하나만의 십자가
계절의 비바람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도시의 먼지, 소음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러나 하나의 십자가가 있다
피 묻은 형틀이, 태양이 다시 솟아오르듯
빛으로 살아나 어둠을 불사르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십자가가 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자리
생명의 싹이 움트는 이 세상 십자가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십자가가 있지만,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십자가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 십자가가 너무 많기 때문에 십자가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왜곡된 십자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진 않는지 우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구원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십자가가 아닙니다. 멋진 십자가 금목걸이를 차고 다닌다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능력으로 역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교회의 분쟁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9절까지의 말씀은 편지의 인사말입니다. 통상적인 인사말에 신앙적인 인사말까지 합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10절부터 본격적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의 첫 번째 주제가 바로 교회 내에 존재한 분쟁입니다. 12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정 중에 고린도를 방문하면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기에 바울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초창기 교인들에게 바울은 너무나도 큰 은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볼로는 바울 다음에 고린도교회에 부임한 사역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씀한 것처럼, 고린도교회를 복음 위에서 자라가도록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 아볼로입니다. 그 아볼로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아볼로를 너무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바파’는 베드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파’는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와 같은 사역자들보다 그리스도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네 개의 분파로 나뉘어 있는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 되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파벌 때문에 고린도교회가 시끄럽고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안타까움을 먼저 보입니다.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라고 책망하듯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씀한 이유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의 집 외에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적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일부분뿐임을 감사한다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 고린도교회가 세례를 매개로 자기들 파의 세력을 넓히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세례를 베푸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심이로되.” 세례를 베푸는 것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에서 세례는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사역했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내에 있는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세례가 아닌 십자가를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기초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포함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지붕 아래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이 고린도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분쟁을 해결하는 최고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화려한 금목걸이를 하여 나를 뽐내는 도구가 결코 아닙니다. 멋진 십자가를 만들어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는 도구도 아닙니다. 자신의 몸에 십자가 타투를 그려넣고 자기 만족을 누리기 위한 도구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직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만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에게는 교회의 분쟁입니다. 교회의 분쟁은 단순히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들끼로 모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신념 아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것입니다. 바울을 중심으로 사람을 끌어모아 자기들의 세를 자랑하려는 것이 바울파이고, 아볼로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모아 자기들의 세가 더 크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이 아볼로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파까지 생겨난 것입니다. 자기들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파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앞세워 자기들의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는 자기들의 세력을 넓히려는 도구였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십자가 뱃지를 달고, 십자가 반지를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몸에 타투뿐만 아니라 십자가 문신을 한다 하더라도,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표현한다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외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에 능력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으로 역사하는 십자가가 아니라면 그 십자가는 헛된 십자가입니다.
국민일보에 연재된 ‘역경의 열매’ 중에 본죽의 최복이 대표의 이런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1997년 겨울, 그녀는 대학병원의 신경정신과 병동 4층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운영하던 화장품 수입유통회사가 IMF 때 부도가 나고, 여러 협력업체까지 함께 도산하면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빚쟁이들과 피해자들의 아우성에 아침이면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결국 정신을 못 차리게 되고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신경정신과 병동에서는 몸에 걸친 옷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책을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볼펜이나 노트를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료하게 지내던 어느 날 밤, 잠잘 시간이라고 간호사가 병실의 불을 끄고 나간 후, 손바닥만한 작은 창문으로 멀리 개척교회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십자가가 밤이 깊으니 거기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텐데 왜 이제야 십자가를 볼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그녀는 밤이면 창밖의 그 십자가를 보며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빨리 나가서 아버지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병원에서 나오게 되었고, 남편이 시작한 호떡 장사를 도우면서 재기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본죽 1호점을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약 1,800개의 매장을 가진 한식 프랜차이즈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개척교회의 초라한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로 보이는 순간 그분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서울 시내에 수없이 많은 십자가가 교회당 꼭대기에 달려 있었지만, 그분의 마음에 은혜를 주는 십자가는 작은 개척교회의 초라한 십자가였습니다. 초라하지만 그 십자가는 그분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런 십자가의 경험이 있습니까?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십자가, 나를 일으켜 세워준 십자가, 나의 아픈 마음을 보듬어 주는 십자가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는 나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줍니다. 세상의 명예와 영광과 성공만을 추구하던 나에게 참된 인생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주는 능력이 그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나에게 성공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걷는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가게 만들어줍니다. 십자가는 나에게 세상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따라 살면 세상의 욕망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교만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듭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십자가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다른 십자가에 우리의 눈길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가려는 십자가들이 세상에 너무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아니라 출세의 십자가로, 희생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만족의 십자가로,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라 욕망의 십자가로, 섬김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자랑의 십자가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십자가를 회복해야 합니다. 편리함과 자기 만족에 빼앗긴 십자가를 고난의 십자가로, 출세와 성공이라는 세상의 욕망에 빼앗긴 십자가를 주님을 위한 희생의 십자가로, 자랑과 교만에 빼앗긴 십자가를 섬김의 십자가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방법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 그것 하나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