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 본문 고린도전서 15:1-8 >

 

   리 스트로벨(Lee Strobel) 목사님이 쓴 예수는 역사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리 스트로벨 목사님은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미국 미주리대학교를 거쳐 예일대학교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일간신문인 시카고트리뷴에 최연소로 입사해 14년 동안 법률 담당 기자로 일했습니다. 그는 아주 냉소적인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는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에서 목사로 변화되는 과정을 그의 책 예수는 역사다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딸이 음식을 먹던 중 기도에 막혀 질식사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한 크리스천 간호사의 도움으로 딸이 응급상황에서 살아나게 되고, 그 고마운 크리스천 간호사의 전도로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던 아내가 이러다가 사실도 아닌 허구인 예수를 믿는 자가 될까 봐 아내에게 교회를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계속해서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가정에 갈등이 생깁니다. 평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제라고 믿던 그는 예수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여, 자신의 아내뿐만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미국 전역을 누비면서 13명의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찾아가 취재를 합니다. 목적은 하나,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먼저 성경번역자로 존경받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명예교수인 메쯔거(Bruce M. Metzger) 박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1세기에 기록된 성경의 원본은 많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고, 베끼고 베껴서 사본의 사본으로만 내려왔는데 과연 그런 성경의 내용이 믿을 수 있는 사실인가?’를 물었습니다. 사본학의 최고 전문가의 말은 고대 희랍인들의 성경과도 같은 호머의 일리아드650개의 사본이 있고,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의 전쟁의 사본은 9개에 불과해도 학계에서는 모두 원본으로 믿는다. 그러니 무려 5,000개 이상의 사본을 가진 책이 복음서라면 그런 성경은 당연히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니냐!’는 대답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고고학 분야의 전문가인 휘튼대학의 존 맥레이(John McRay) 박사를 만나 고고학의 입장에서 예수의 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고고학의 최고 전문가인 맥레이 박사는 고고학자로서 복음서의 기록은 매우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복음서의 내용에 따라 발굴을 해보면 실제로 그 내용 그대로 역사적 발굴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는 심리학 분야의 전문가인 게리 콜린스(Gary R. Collins)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은 예수가 미쳤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물었습니다. 콜린스 박사는 크게 웃으며 간단하게 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심리학적인 증거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또 욕을 할 때만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유대교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루이스 래피데스(Louis S. Lapides)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예수와 아무 관계도 없었던 자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래피데스 목사님은 구약성경의 예언서를 읽다가 이사야 53장의 메시야의 예언을 통해 그분이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신약성경을 읽다가 확신을 갖게 되고 예수를 전하는 목사가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미국 국립 신장폐혈액연구소 전문의인 알렉산더 메드럴(Alexander Metherell)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학적으로 예수의 죽음은 기절한 것이 아닌가?’를 물었습니다. 알렉산더 박사는 의학적으로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이미 채찍에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저혈량 쇼크상태에 빠졌고, 더구나 사형전문가인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심장과 폐에 창을 찔러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었다고 말해 줍니다.

  그 다음 그는 오늘날 가장 탁월한 무신론 철학자와 논쟁하여 승리한 게리 하버마스(Gary Habermas)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는 부활 후에 정말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가?’를 물었습니다. 하버마스 박사는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죽은 사람이라면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게바와 12제자들, 그리고 500여 명의 형제들과 야고보에게, 그리고 맨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부활의 증인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렇게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 13명을 인터뷰하고 난 후 지독한 무신론자였던 리 스트로벨은 예수는 역사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불신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허구가 아닌 실제 일어난 역사임을 전하는 목회자요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해하고 논리를 통해서 증명해야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증언해놓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앞선 책의 저자인 리 스트로벨 목사님은 자신이 가진 논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이해되고서야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분만큼의 논리나 명석한 머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우리가 굳이 증명해내지 않아도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명확한 설명이나 증거가 필요없이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릅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 같이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은 평생 연구하고 노력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아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구원이 됨을 믿게 하셨고, 과학적으로 논증되지 않아도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으로 증명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리 스크로벨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 속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의 입장에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그 예수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예수의 제자들이나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 결코 동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고 증언한 스데반을 유대교의 대적자로 생각하고 죽이는데 누구보다도 앞장 섰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지구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아예 뿌리채 뽑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하여 멀리 다메섹으로 갑니다. 거기에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피신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거즘 다 왔을 때 그는 큰 충격의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그를 비추었습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습니다. 너무 강렬한 빛에 땅에 엎드러진 그에게 신비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말은 그의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은 자신 앞에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놀라운 경험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사도 바울인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난 후에는 오히려 그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증거하며 다녔습니다. 예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야라고 증거할 때 그에게도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에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도 핍박했던 그가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목숨을 걸고 증거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뵈었던 사람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게바(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열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고, 심지어 500여 명의 형제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고,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거명된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두가 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한없이 나약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주님의 제자로 주님과 함께 다니며 온갖 신비한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수도 없이 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서 붙잡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실 때,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나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가 메시아라고 증언했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매질을 당하고 위협을 당했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베드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때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실 때 요한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골고다 언덕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비겁하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인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는 모두가 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만, 아마도 오늘 본문에 그 이름이 언급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어렸을 때의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자란 자신의 형 예수가 메시아일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자신의 형이 어쩌면 정신 나가 미친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가장 믿기 어려운 사람이 그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그 야고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나서는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처음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릴 때 그 의장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야고보입니다. 그만큼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된 이유는 오직 하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저 평범한 형인줄 알았는데, 그 형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였음을 부활을 통해 분명히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나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면 포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약한 사람들일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모두 믿음에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어떤 협박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담대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그게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나약했던 사람이 믿음의 강한 자로 변화됩니다. 세상 권력 앞에 두려워 떨던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되어서 세상 앞에 당당하게 그 믿음을 증언하며 삽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죽이는 일에 결코 양심에 가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포악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들 앞에서 그는 묵묵히 그 돌을 맞았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감옥에 가두어도 항변하거나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매를 맞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계 포악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자기 만족을 위해 살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이 두려워 위축되고 세상의 권력 앞에서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담대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나약했던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외치며 살았습니다. 그 어떤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결코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증인들로 살았습니다.

 

   부활은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증명되어야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고, 부활은 내가 경험해야 할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논증을 통해 부활을 증명해야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나의 삶을 통해 간증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또 한 번의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입니까? 부활절은 결코 기념일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축제일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부활절이 따로 없었습니다. 매 주일을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 여겨, 축제처럼 지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을 1년에 한 번 지키지만, 사실은 매 주일이 부활절이고, 매일 우리의 삶이 부활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은 그저 1년에 한 번,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절을 통해 우리가 확실한 부활의 신앙으로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신앙으로 고백되고, 고백하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을 증언하는 삶은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부활절이어야 우리는 세상 앞에서 두렵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아무리 위협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던 중 이렇게 선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왜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매일 부활을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하며, 부활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을 갖지 못한 채,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영적 은혜 안에 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다시 사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 시대에 부활의 증은 바로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서 죄된 나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누구 앞에서도 주눅들거나 두렵지 않는 담대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