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미 1:2-7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란 학자가 정신분열증을 설명하면서 처음 소개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몸을 꼼짝도 할 수 없는 정신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듯한 몸짓을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이중으로 구속된 상태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말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일을 끝내고 회식을 하러 팀원이 함께 중식당에 갔습니다. 팀장이 큰 소리로 말합니다. “오늘 수고 많이 했으니까, 먹고 싶은 요리 마음껏 시켜요! 나는 짜장면!” 팀원들은 먹고 싶은 요리를 시켜야 할지 아니면 자기들도 짜장면을 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이중으로 구속된 상태가 되어, 누구도 선뜻 무엇을 먹겠다고 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중구속 상태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신앙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영적 지도자들이 교인들에게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면 꼭 그렇게 하지는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 때 교인들은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생활 잘하라고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볼 때 부모들이 꼭 그렇게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때 자녀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 역시 이중구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바람과 달리 신앙생활에서 멀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이런 이중구속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말로 전하는 메시지와 삶으로 보여지는 메시지가 달라서,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의 문제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이 하는 말과 하는 행동이 달라서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고, 특히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우선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허물은 바로 사마리아의 허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곧 북왕국이 저지른 죄가 너무도 심각해서 나라가 망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죄의 심판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강대국의 침공으로 멸망당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남왕국도 북왕국과 다를 바 없이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남왕국은 북왕국을 비난해 왔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하지 않고, 사마리아에 우상제단을 쌓아놓고 제사한다고 욕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왕국 안에도 북왕국 못지않은 죄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북왕국 사람들은 내 놓고 죄를 저질러왔습니다. 그런데 남왕국 사람들은 북왕국 사람들을 비난해 왔습니다. 자기들은 북왕국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들이 비난해온 죄를 저지르고 있었고, 사실 북왕국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남왕국 사람들을 볼 때 하는 말과 하는 행동이 다릅니다. 다음세대가 기성세대를 볼 때 하라고 가르치는 말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남왕국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을 보고 이중구속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꼰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기성세대를 비하할 때 쓰는 말입니다. 최근 한 취업포털사이트가 직장인 1,945명을 대상으로 앙케이트를 조사했습니다. 문항 중에 ‘젊은 꼰대가 있는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75.4%가 자기 직장 안에 젊은 꼰대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여기서 젊은 꼰대란 90년대생 즉 MZ세대면서 꼰대노릇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취업해서 직장에 다니며 기성세대 꼰대들을 비난해 왔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직장 안에 만연해 있는 꼰대문화에 물들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욕하며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비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하는 말과 하는 행동이 너무 달라서 이중구속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미가 시대의 유다 백성들과 같지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자기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상은 다름없이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유다의 죄


   그러면 유다의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5절에서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왕국 유다가 저지른 죄의 핵심이 바로 유다에도 산당이 있다는 점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산당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산 위에 세워진 신전’을 뜻합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서 신성시 여겨지던 오래된 푸른 고목나무 아래 세워진 신전을 말합니다. 원래 가나안 족속들은 이 산당에서 바알이나 아세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이런 이방 산당들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하면서 가나안 땅 안에는 이런 이방 산당들이 곳곳에 남아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런 산당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법궤를 모셔둔 지역에 산당을 세웠습니다. 법궤가 몇몇 곳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산당이 하나 둘씩 늘어갔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바로 기브온 산당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이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솔로몬 성전이 지어진 후에도 여전히 산당이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나라가 남북왕국으로 분열된 뒤에 북왕국에 이런 산당들이 전국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산당을 제거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런 산당들은 이방신을 섬기기 위한 제단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제단인데 왜 제거하라고 하셨을까요? 

   신 12:1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서 예배할 장소를 정해 주실 텐데 그곳으로 가서 예배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왕상 9: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하나님께서 솔로몬 성전을 예배 자리로 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이 지어진 뒤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할 곳은 정해졌습니다. 이후에는 예배는 이곳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지어진 뒤 그동안 예배하던 산당들은 제거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남왕국 유다 왕들이 산당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산당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거나 더 세우기도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 왕들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뒤에도 산당을 제거하지 않으려 했을까요? 한 마디로 백성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가까이에 있는 산당에서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멀리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진 뒤 그곳까지 가서 예배드리는 일이 힘들고 번거로웠습니다. 그래서 산당 제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편이주의가 문제입니다. 그 때나 오늘이나 신앙생활을 하되 편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본성상 편하고 싶어 합니다. 서 있는 사람은 앉고 싶고, 앉아 있는 사람은 눕고 싶고, 누어있는 사람은 자고 싶은 법입니다. 편하던 사람이 불편하게 살라 하면 저항하게 됩니다.

   저는 영적으로 코로나사태를 무척이나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사태로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예배와 온라인 사역이 벌써 2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구지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하고, 회의도 하고, 심지어 기도모임도 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이런 상황에 적응하면서 코로나 이전보다 편하게 신앙생활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코로나사태가 끝이 날 것입니다. 다시 현장이 열리게 되고 현장 예배와 사역이 시작될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로 나와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과연 모든 성도들이 전처럼 따라 줄 것인지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온라인 사역이 현대판 산당이 되지 않을까 무척이나 염려가 됩니다.

   사실 신앙편이주의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신앙혼합주의입니다. 산당은 기본적으로 우상 숭배하던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건물 양식과 제사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우상숭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벧엘에 있던 산당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혼합주의가 문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조상제사도 지냅니다. 예수 믿으면서 점도 보고 운세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대판 산당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합니다. 돈을 의지합니다. 세상 권력을 의지합니다. 그런 것들이 무너져 내릴까 두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또한 현대판 산당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 텐데 여전히 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산당을 제거해야 합니다. 


유다의 살 길


   그러면 유다가 이런 죄를 떨쳐버리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가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전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 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 지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미가가 이렇게 들으라는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이 이렇게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지금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기들은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산당예배를 드리면서도 올바른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착각입니다.


  눅 18:9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앞으로 나와 눈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하시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바리새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해 왔던 신앙생활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자기는 저 세리와 달리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착각이었습니다. 

   오늘도 이 바리새인과 같이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사람은 아닐까요?


   미가 선지자는 이런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들을 지어다”, “자세히 들을 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미가가 유다백성들을 볼 때 답답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착각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 자기들은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으라고 그것도 자세히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에 듣는다는 동사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hear’입니다. 그냥 귀가 있어 듣는 것입니다. 그 뉘앙스는 ‘들린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듣고도 그냥 흘려보냅니다. 

  다른 하나는 ‘listen’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듣는 것입니다. 그 뉘앙스는 ‘귀를 기울여 듣는다.’, 다시 말해서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잘 듣고 마음에 새깁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hear, 건성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냥 들리는 대로 듣고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listen 경청해야 합니다. 들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듣고, 들은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미가선지자를 통해서 유다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한 경고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지 말고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산당을 제거해야 합니다. 신앙편이주의, 신앙혼합주의를 털어내야 합니다. 나아가 하는 말과 삶의 간격을 좁혀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