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 본문 베드로전서 1:22-25 >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는지요?

  어느 연못에 아름다운 황금색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황금빛이 빛나는 그를 부러워하며 곁에 가려고 했지만, 그의 자세가 너무 도도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황금 비늘 물고기는 혹 자신의 비늘이 다칠까봐 다른 물고기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다녔고, 마을의 축제 때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혼자였습니다. 황금 비늘 물고기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만한 친구가 없어 슬펐습니다. 그즈음 다른 연못에서 이사 온 물고기가 그의 아름다움에 반해 말을 걸어왔습니다. 외로워하던 황금 비늘 물고기는 그를 반갑게 맞았고, 둘은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 온 물고기가 황금 비늘 물고기에게 부탁했습니다. “친구야, 너의 아름다운 황금 비늘을 하나만 내게 주렴. 아름다운 그것을 나도 간직하고 싶어.” 그러자 황금 비늘 물고기는 선뜻 자신의 황금 비늘 하나를 떼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준 황금비늘 하나를 들고 좋아하는 친구를 보자, 자신도 기뻤습니다. 그것을 본 연못의 다른 물고기들은 너도 나도 황금 비늘 물고기에게 몰려와 자신에게도 황금 비늘 하나만 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황금 비늘 물고기는 기꺼이 그들에게도 자신의 황금 비늘을 하나씩 떼어주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황금 비늘을 다 떼어준 황금 비늘 물고기는 그저 평범한 물고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친구가 많아 외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연못을 지나던 사람은 연못 전체가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연못 속 물고기들이 하나씩 가지게 된 황금 비늘을 입에 물고, 연못을 즐겁게 헤엄치는 그 모습이 달빛에 비쳐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대학교 스승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를 그의 제자인 미치 앨봄(Mitch Album)이 매주 화요일에 찾아가 인생에 대해서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해진 책이기도 합니다. 그 책에서 스승 모리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병을 앓으며 배운 가장 큰 것을 말해 줄까?” “사랑을 나눠 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그리고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덧붙여 권면해 줍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게. 우리는 모두 나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라고 생각하지. 또 사랑을 받아들이면 너무 약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 시인 레빈이 쓴 한 구절을 말해줍니다.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말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눠주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잘 압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 세뇌되어, 사랑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성공이 더 중요한 목표가 되어버렸고, 사랑보다는 돈이 훨씬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은 받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 ?’라고 의문을 던지는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1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마땅하도다라는 말씀은 빚을 진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갚아야 할 당연한 책임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당연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냥 사랑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로마서 5:6)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할 때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일 때를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로마서 5:8)고도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그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어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로마서 5:10)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되었을 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셔도,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을 때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상태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그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도 할 말이 하나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의무사항이 있는데, 그게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내 눈 앞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말은 모두 거짓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땅히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더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뜨겁게’(ἐκτενς)라는 말은 열렬히, 열심히, 마음 깊이, 간절히그런 말입니다. 이 단어가 사도행전 12:5절에서도 사용되는데, 헤롯이 야고보 사도를 죽이자 유대인들이 헤롯에게 너무 잘했다고 열렬한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서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당하고 베드로 사도까지 잡혀 감옥에 갇히자 교회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그때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사도행전 12:5) 여기 간절히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뜨겁게라는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여러분, 야고보 사도가 죽임당하고 교회의 대표인 베드로 사도까지 처형당하기 위해 붙잡혀 감옥에 갇힌 상황이니, 초대교회가 얼마나 비상사태이겠습니까? 그 때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절히 기도하던 그 절박함으로, 사랑도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내가 살아갈 의미가 없어지는 것같은 절박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절박함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짧은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절박하지 않는 사랑은 언제나 변할 수 있습니다. 간절한 사랑이 아니면 상황에 따라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화는 그렇습니다. 내게 유익되지 않는 사랑은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것처럼 세뇌되어 살아갑니다. 내 감정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사랑입니다. 내 상황에 따라서 사랑한다는 고백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뜨거운 사랑이 아니면 그 사랑은 명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런 절박한 사랑이었습니다. 뜨거운 사랑이었고, 결코 변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고,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그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을 때, 그 절규에 마음이 너무 아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절규하시는 예수님의 그 울부짖음에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며 끝까지 침묵하신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뜨겁게, 간절히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을 거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렇게 뜨겁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고, 그렇게 뜨겁게 사랑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깊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임을 우리가 알고,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그 사랑에 온전히 젖어들 때, 그 사랑이 내 마음에서 여전히 나를 감동시킬 때 우리는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닮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흉내라도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논리나 지식으로, 우리가 가진 그 어떤 세상의 경험이나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형제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히 머물러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차 한잔을』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탁월한 분석력과 판단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어떤 사람이든 한 번 보기만 하면 그의 성격이나 약점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도 그 이야기의 맹점을 지적해 줄 수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상대방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사람들을 좋아하십니까?”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상대방은 또다시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합니까?” 역시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은 다시 이어졌습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는 역시 대답하지 못했고, 그 질문은 그에게 몹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책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을 몹시 좋아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관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하고 논리적인 지적을 받는 것보다 이해되고 사랑을 받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예리한 논리적인 지적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옳고 그름을 뛰어넘습니다. 무엇이 진실하고 거짓인지도 뛰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을 옳고 그름이라는 진실 안에 가둬놓으려고 합니다. 나의 이해와 논리 안에 가둬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옳고 그름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이해를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내 경험으로 감동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깊은 감동이 되려면 22절의 말씀처럼 우리 영혼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세상의 이익과 세상적 계산으로 더렵혀져 있는 상황에서는 사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 세상의 방법, 세상의 가치가 우리 영혼을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세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순종함으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에 이르며,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데 있습니다. 본문 24-2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도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것이 비해 우리의 육체는 유한합니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도 조만간 쇠약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쇠약해질 육체, 곧 사그라질 육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사랑을 미루곤 합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우선 나 자신부터 챙겨야 한다는 소리에 유혹을 당해, 지금 베풀어야 할 사랑을 미루기도 합니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잊고 삽니다.

  여러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것을 결코 뒤로 미룰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 불붙는 것같이 뜨거운데, 어찌 냉철하게 생각하고 뒤로 미룰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형제,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표현처럼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가 나중에 사랑하겠다고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가슴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는 이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처럼 존경받는 인격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미소 짓게 하려면 먼저 미소를 지으세요. 관심을 끌고 싶으면 그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세요. 칭찬을 듣고 싶으면 먼저 칭찬을 하세요...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을 대접하는 대로 당신을 대접할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비결 같은 건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요.”

 

여러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내가 베푼 그 사랑이 내게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이 뜨겁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그리고 그 사랑이 지금 내 깨끗한 영혼 안에 머물고 있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될 때에만 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되돌려 받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네가 먼저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내 가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황금 비늘 물고기가 자신이 가진 황금 비늘을 나누는 것처럼, 나눌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미술가인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의 작품 중 의인은, 향나무처럼 치는 도끼에 향을 묻힌다.’는 제목의 판화가 있습니다.(사진) 이 판화는 시편 51:1절의 첫 구절인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는 제목을 붙인 연작 중에 하나입니다.(그림보다도 그 아래 쓰여진 글귀로 더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 판화 아래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의인은, 향나무처럼 치는 도끼에 향을 묻힌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도끼날에 독을 주는 것이 아니라 향을 묻혀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동일한 사랑을 나누게 만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우리의 가슴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깊이 경험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사랑을 나누십시다. 비록 작은 사랑일지라도 뜨겁게 말입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또 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내 작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젠가 내게 돌아올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베풀어야 하기에 베푸는 것 뿐입니다. 사랑은 도끼날에 찍혔을지라도 그 날에 향을 묻혀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중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지금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은 내게 있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추듯,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의 빛을 세상에 비춰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