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 1~6 | 안위하시나이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 없이 삽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만족하여 더 바랄 게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 되시면 …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시 23:4) 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른 번역으로 보면
- 죽음의 그늘 골짜기(새번역)
-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쉬운성경)
- the darkest valley(가장 어두운 골짜기-NIV) 입니다.
이는 과장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유대 광야에 있는 깊은 어둠의 계곡을 뜻합니다.
광야에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 때는 물이 없지만 우기 때는 불어난 물에 홍수가 나기도 합니다.
실제로, 1957년에 요르단 페트라 입구 계곡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홍수로
프랑스 관광객 50명이 익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계곡은 실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그런 협곡이 많습니다.
[ 케네스 E. 베일리, <선한 목자>, 새물결플러스, p.64-65. 참조. ]
다윗이 그랬듯이 양치는 목자들은 그런 골짜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곳을 꼭 지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골짜기의 양쪽 측면은 바위가 울퉁불퉁하고 날카로워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께서 …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양 떼는 늘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만 다닐 수 없습니다.
푸른 풀밭 바로 옆에 또 다른 푸른 풀밭이, 쉴 만한 물 가 바로 옆에
또 다른 쉴 만한 물가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푸른 풀밭도, 잔잔한 물가도 찾아 다녀야 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푸른 풀밭’과 ‘미래의 푸른 풀밭’사이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좋은 일, 기쁜 일, 감사한 일만 계속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 교회 다닌다고,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물 흘릴 일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우리 인생길에서
- 가고 싶지 않지만 …
- 지나가기 힘들고 까다롭지만 …
- 무섭고 위험한 길이지만 … 통과해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것은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여섯 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 4, 5절에는 부정적인 단어와 표현이 있습니다.
- 3절의 “소생”은 거의 죽을 뻔했다는 의미입니다.
- 4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 5절의 “내 원수”는 마음을 힘들게 하는 단어입니다.
그럼, 부정적인 단어가 들어 있는 3, 4, 5절은 빼고 1, 2, 6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1,2,6)
어떤가요? 하나 같이 밝고 위로와 힘을 주며, 여유와 소망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3, 4, 5절을 빼면 삶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
사춘기 소년소녀의 감성으로 쓴 ‘동시’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삶과는 별로 연관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전쟁 같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때로는 돈과 싸워야 하고, 자기능력의 한계와 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 동료들과도 경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와도 싸워야 하고, 남편과 아내와도 싸워야 하는 서글픈 때도 있지요.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삶은 전쟁 같습니다. 싸움이고, 경쟁입니다.
[ 장원철, <목자를 아는 양>, 좋은씨앗, p.80-82. 참조. ]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다툴 일, 싸울 일, 죽을 뻔한 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원수(웬수) … 등을 두신 이유는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롬 8:35) 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롬 8:36)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했습니다.
믿음으로 따라해 보겠습니다. “넉넉히 이긴다”, “이기고도 남는다”
또한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난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요 16:33)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 이길 것 같다, 잘 하면 이길지도 모른다, 언젠간 이기게 될 것이다 … 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겨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히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리니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 (찬445장)
♪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 따라 가리라 ♬ (찬436장)
지금 인생의 깊은 골짜기 같은 곳을 지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인생의 협곡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찬송가 430장 가사에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같이” 가면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인생의 골짜기를 가기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 119:71) 했습니다.
유익한 고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도 유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값진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많은 십자가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끝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신앙생활은 기분 나쁘다고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나 기분 나빠서 안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취미입니까!
어떤 사람은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있다고 천국에 안갈 겁니까.
신앙은 기분 나빠서, 보기 싫어서, 하기 싫다고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짐승의 밥이 되고, 목이 잘리면서도, 땅굴을 파고 들어가 신앙을 지켰습니다.
끝까지 지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런가하면 다윗은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라고 했습니다.
- 고양이는 날쌔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습니다.
- 사슴은 민첩하게 도망칠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 그런데 양은 방어체계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빠른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양에게 있어서 유일한 안전망은 목자뿐입니다.
[ 케네스 E. 베일리, <선한 목자>, 새물결플러스, p.68. 참조. ]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지킵니다.
‣ 본문에서 말하는 지팡이는 길이 1.5m 정도로 몸을 기대거나 언덕을 오를 때 사용할 만큼 튼튼합니다.
끝이 갈고리처럼 굽어 있어서 양이 절벽이나 낭떠러지에서
잘 오르지 못할 때 다리나 어깨를 걸어 끌어올립니다.
[ 케네스 E. 베일리, <선한 목자>, 새물결플러스, pp.72-73. 참조. ]
‣ 막대기는 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막대기는 ‘몽둥이’와 비슷합니다.
길이는 60~80cm 정도이고 끝에는 철퇴와 비슷한 금속붙이가 끼워져 있어서
외부 위협으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기 위해 쓴다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35)
다윗이 야생짐승들을 쳐 죽여 양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막대기(몽둥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물맷돌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삼상 17:40)
막대기를 들고 온 다윗을 보고 골리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삼상 17:43)
골리앗은 다윗의 막대기를 보고 황당했을 것입니다.
[ 케네스 E. 베일리, <선한 목자>, 새물결플러스, pp.70-71. 참조. ]
다윗처럼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갖고 다니며 양 떼를 이끌고 보호했습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잘 다루는 능력은 물론 언제 어디서나 싸울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의 목자가 되시기로 자처하셨습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4:15)
하나님은 양떼인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 친히 싸우십니다.
[ 김남준, <시편23편 강해>, 생명의 말씀사, pp.183-184. 참조.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의 팔 아래에 있을 때만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죽음의 골짜기를 본 것이 아니라 목자이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았습니다.
[ 장원철, <목자를 아는 양>, 좋은씨앗, p.124. 참조. ]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막대기와 지팡이를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거기에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히 12:2) 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했습니다.
따라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이 믿음으로 … 이 고백대로 살아야 합니다.
살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우리에게 닥칩니다.
그럴 때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 체험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 골짜기를 보고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 주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목자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