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기도(Ⅱ)
(빌 1:9-11)
Ⅰ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바울이 그의 여러 서신에서 자신의 기도의 내용을 공개적으로 기록했던 이유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면 그 첫째 이유는 서신을 통해 서신의 수신자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밝힘으로 바울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바울이 자신이 드리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수신자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줌으로 자신의 철학과 신앙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게 하며, 그 내용을 통해 그들을 교훈하기 위해서 그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이유는 수신자들도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과 제목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도 기도의 내용을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밝혔는데, 이 기도를 정리하면 본문의 이 기도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한 세 가지 내용의 간구와 마무리기도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바울이 간구한 세 가지 기도 내용은 첫째,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사랑이 풍성해지되 그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짐으로, 심판의 날까지 진실하여 허물없이 살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삶에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세 가지 내용의 간구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간구에 이어 자신이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며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이중 바울이 간구한 세 가지 기도의 내용 가운데 첫 번째 기도의 내용인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사랑이 풍성해지되, 그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 오늘은 바울이 간구한 세 가지 기도의 내용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도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그런 기도에 이어 바울이 기도를 마치면서 간구한 마무리기도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Ⅱ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한 두 번째 기도의 내용은 분별력을 갖게 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이 분별력이란 단어는 헬라어 단어로 도키마제인(δοκιμάζειν)인데, 이 단어의 뜻은 시험한다 즉 test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그것이 순금인지 아니면 금으로 덧칠만한 쇳덩이인지, 그리고 그 돈이 진짜 돈인지 아니면 가짜 돈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바른 선지자인지 아니면 사이비 선지자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시험한다 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이 도키마제인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그런 분별력을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분별력을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느냐하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이 기도에 나오는 선한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디아페론타(διαφέροντα)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다르다 또는 뛰어나다 인데, 그러기에 이 단어는 가장 중요한 것이나 뛰어난 것 혹은 최선의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리고 지극히라는 단어는 최고 또는 진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선한 것이란 선 중에서도 최고의 선이나 진짜 선, 조금 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진리라 말하는 것들 가운데 최고의 진리 또는 진짜 진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이유로 그들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에까지 이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0절 말씀 하반절입니다. “너희로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이 말씀에 나오는 진실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에일리크리네스(είλικρινήϛ)입니다. 이 단어는 혼합되지 않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햇빛이라는 뜻의 에일(είλ)이라는 단어와 판단하다는 뜻의 크리노(κρίνω)라는 두 단어가 합성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렇게 이 에일리크리네스라는 단어는 햇빛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 그대로 이 단어는 도자기를 시험할 때, 햇빛에 비춰보아 금간 도자기를 구별할 때 사용했습니다. 또 허물없다는 말은 헬라어 단어로 아프로트코포스(άπρότκοποϛ)인데, 이 단어는 남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날이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심판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심판하시는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바른 분별력이 필요하니 그 분별력을 그들에게 허락해 달라는 간구의 기도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이 기도만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시대만큼 무엇이 진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운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 까닭에 삶이 진실하지 못하고 허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진리라고 하고 진리라고 하는데,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선인지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선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진리 따라 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이 선이고 진리이고 하나님의 뜻인지를 바로 분별하고 살아야만, 금간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멀쩡해 보인다고 금간 도자기가 멀쩡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는 까닭에 오늘에 남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이단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진짜 선과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열심을 다해 바친 헌금과 열심을 다해 외친 전도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대로 그리스도의 날,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맞이하게 될 심판의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당시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형편이 분별력을 필요로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들 주변에는 이단이 횡횡했고 거짓종교가 주변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교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분별력을 그들이 갖지 못하면 그들은 신앙생활은 물론이려니와 인생살이도 바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그들로 하여금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바울의 마음을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고, 그렇게 기도했던 바울의 의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분별력이 없는 까닭에 그런 이단에 빠지게 되면, 그리고 거짓 종교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자기의 뜻이 앞선 가운데 그것만 옳다고 주장하게 되면,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날 즉 주님께서 재림하여 심판하시는 날 금간 인생으로 그들이 판단 받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그런 잘못된 생각으로 인생을 살고, 그런 그릇된 신앙으로 주변의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게 되면, 그 주변의 사람을 넘어지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는 그날까지 매일 매일 계속해서 이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무엇이 선한 일이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해주신 선과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하고 살면 우리의 삶은 금가지 아니한 진실한 삶이 되어 주님 앞에 칭찬받는 삶이 될 것이며, 주변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바른 신앙인의 삶이 될 것입니다.
Ⅲ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세 번째 기도의 내용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의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는 머리나 지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관념적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바른생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행함으로서의 실천적 의를 말합니다. 즉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나는 의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의다 그 말입니다. 신앙인의 의는 그런 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야고보서 1장 22절에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바울이 기도한 내용 그대로 진정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그래서 말씀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진정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 질문은 이 의의 열매를 우리가 스스로 맺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의의 열매를 스스로 맺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NO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의 열매는 우리 스스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에 나와 있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이 말씀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은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이 가르쳐 주는 그대로 그 노력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노력이라면 그 노력은 헛된 노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의 열매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의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 의의 기준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 의의 기준이라는 내용을 살펴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 의의 기준이라는 말씀의 뜻을 해적선 안에서의 의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해적선 안에서의 옳음, 잘함, 즉 의는 다른 배를 어떻게든지 사로잡아 그 배에 있는 여러 물건들을 도둑질하는 것이 해적선 안에서 옳음이고 잘한 일이며 의입니다. 만약 해적가운데 한 사람이 도둑질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생각은 해적선 안에서는 잘못된 생각이고 불의입니다. 그래서 해적선 안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 해적선 안에서의 의는 잘못된 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의는 언제나 절대 진리이신, 그리고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의 기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진정한 의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으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실천적 삶을 통해 맺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라는 내용을 살펴보십시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과 연합된 삶을 사는 사람은 그 능력 안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능력 가운데 가장 큰 능력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뛰어넘어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며,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자들이 갖게 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뛰어넘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된다는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 의의 기준이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 그대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예수님 기준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열매, 즉 진정한 그리고 절대적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의 열매도 가득하게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고 보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간구했던 바울의 기도는 우선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되게 해달라는 내용과 예수님을 닮게 해 달라는 내용,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내용과 그리고 그로인해 예수님의 뜻을 온 몸으로 이루어 드리는 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언제나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를 가득하게 맺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주님 재림하실 때 의의 열매가 가득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복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Ⅳ
이런 세 가지 내용의 간구를 한 바울은 이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그 마무리 기도의 내용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간구한 자신의 모든 기도가 합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11절 하반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됨으로 진실한 삶을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신앙인이 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해지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자신이 드린 모든 기도가 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 기도를 마무리 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인생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데 있다는 것을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데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또 이사야서 43장 21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데 있습니다. 인생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기도하는 바른 목적은 나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도 최종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만 하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도 최후의 간구 역시 언제나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바울과 같이 마무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간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간구한 것들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 찬송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기도의 바른 마무리입니다.
Ⅴ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두 시간 동안 여러분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드린 바울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그 기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을 두고 그 어떤 기도보다 더 우선해서 드려야할 기도의 모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바울의 기도와 같은 기도를 평생토록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소유할 수 있고,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