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8:27-38
가방이나 옷이나 구두에는 명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품은 비쌉니다. 한번 사려면 주머니 사정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은 없지만 명품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온 것이 짝퉁입니다. 진짜는 아니지만 명품 흉내라도 내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다 보니 가짜가 더 진짜 같이 만들어집니다. 영의 세계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사탄이 있고, 그리스도가 계시니 적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계시니 악령이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어 속기 쉽습니다. 구약을 보면 ‘내가 여호와 너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사 45:3, 겔 20:20)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로 알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 개구리, 파리, 메뚜기, 태양 등이 자기들의 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가짜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 제자입니까’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진짜 제자인지 짝퉁 제자인지 궁극적인 판단은 주님이 하시지만 우리도 수시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둘로 나눌 때 본문이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제자들을 떠나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2001년 9월 11일은 화요일이었습니다. 요일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이 노회 둘째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로 총대였던 김성규 장로님과 월요일 저녁 첫날 회의를 마치고 노회장 근처에 있는 모텔에 자고 노회장으로 왔습니다. 모텔에 있을 때 TV를 보지 않았기에 아침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랐습니다. 아침 예배 시간에 어떤 장로님이 기도하시는데 지금 미국에 전쟁이 났으니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김 장로님과 저는 노회장을 슬그머니 빠져 나와 LA로 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traffic이 엄청나게 심한 10번 Freeway에 다니는 차량이 별로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했나보다 하고 Koreatown에서 송창대 집사님이 경영하는 진상 음식점에 가서 TV를 보았습니다. World Trade Center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장면이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두 빌딩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식당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아’하는 탄성을 냈습니다. 그 사태로 인해 사망자가 3000명 가까이, 부상자가 6000명이 넘게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역사를 9/11 이전과 9/11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한 획을 긋는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그 상처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9월 11일이 올 때마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여전히 안타까워합니다. 지난 8월 31일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수했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없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9䞇테러 20주년 기념 연설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국가에 대해 근본적인 존중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unity (하나됨)을 촉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됨은 중요합니다. 우리 몸은 수많은 세포와 신경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건물도 수많은 자재와 부품들로 지어졌습니다. part 하나하나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것들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각자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개성이 하나로 잘 융합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하여 중보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본문에도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자신들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하려는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또한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언급하시면서 하나가 되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주님의 제자답게 살면서 하나가 되는 아름답고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지체를 위한 섬김(38-41절)
요한은 귀신을 쫓아낸 사람에게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금하였다고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르다’가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으니 그 사람이 이제까지 계속해서 제자들 무리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 외에는 자기들만 귀신을 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니 당황했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얼마 전 귀신들린 아이를 제대로 고치지 못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저희가 능히 쫓아내지 못하더이다”하는 창피스런 말을 들어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기득권을 주장합니다. 자기들은 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는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요한의 발언은 앞 단락에서 ‘누가 크냐’라며 서열을 따지며 논쟁했던 것과 연결됩니다. 그 논쟁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공동체 안에서 권력 다툼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면, 여기서 요한이 제기한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자신들의 공동체의 영역 안으로만 제한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요한의 배타적인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자신들만의 일로 만들어 버리려는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는 수용적 말씀이 마태복음에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0)는 배타적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 말씀의 상황과 대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기적을 바알세불의 활동으로 돌리려는 대적들에게 주어진 것인데 비해, 마가복음의 말씀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지만 열두 제자 집단에는 속하지 않은 자들을 두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는’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요한이 생각한 공동체의 기준은 자기와 함께 있느냐 하는 공간적인 개념입니다.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관용과 연합과 교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방법이나 노선에 맞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자기와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사역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열두제자 그룹에 속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어느 편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하는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편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대접을 받기 위하여 높은 자리를 노리며 자신의 인기나 명예를 얻기 위해 분주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크냐 할 때는 자기를 드러냅니다. 이웃을 경계나 경쟁의 대상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으며 이웃을 섬길 때는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겸손과 인내로 대하게 됩니다. 기쁨으로 대하게 되고 자기의 행동을 절제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경쟁과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에서 자유함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야망에 붙들려서 으뜸이 되고자 했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이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결국 ‘예수님을 믿는 자’를 뜻합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중동 문화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섬김이었기에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죄를 멀리하는 섬김(42-49절)
37절은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문제를 42절은 소자를 실족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두 말씀은 세상적으로 무가치해 보이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소중하다는 원리를, 전자의 경우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후자의 경우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는 자를 금지한 제자들의 행동과 관련해서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한다면 그는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연자 맷돌’을 직역하면 ‘나귀가 끄는 맷돌’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가정에서 쓰는 손 맷돌보다는 훨씬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들’이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죄짓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으로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돌밭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들입니다(4:17). 여기서도 배교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성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후자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사람들은 능력이 많아 그 능력으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실족시키지 않는 것이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합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특히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만나게 되는 ‘작고 미미한 자’처럼 보이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빼 버리라고 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이 죄를 범한다는 것은 그 신체 기관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손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섬기라고 지어졌는데, 오히려 남의 것을 빼앗거나 해치는데 사용된 경우를 말합니다. 발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고 복음을 전하라고 지어졌는데, 오히려 세상의 욕망과 쾌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위해 사용된 경우를 말합니다.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눈빛을 나누라고 지어졌는데, 오히려 세상의 부귀영화만 바라보고 악독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보는데 사용된 경우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문자적인 적용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손이나 발을 찍어 내도, 눈을 뽑아내도 범죄는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육신은 상할지라도 영생을 얻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던져진다’는 요한계시록에서 짐승들, 거짓 선지자들, 마귀들, 나아가 사망까지도 불 못에 던져질 때도 사용됩니다. 천사가 용(사탄)을 잡아 무저갱에 던져 넣는다 할 때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계 20:3).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헨나’는 원래 ‘골짜기’를 뜻하는 ‘ge'와 ‘힌놈’이 합성된 히브리어로 ‘힌놈의 골짜기’혹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가나안의 신 몰렉과 바알을 숭배하던 곳으로, 자녀들을 불에 살라 바치거나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종교 개혁을 할 때 이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뤄진 우상 숭배를 금지했습니다. ‘게헨나’는 예수님 당시에 모든 악한 자들이 불의 심판을 받는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공관복음서에도 ‘게헨나’라는 단어가 11번 나오는데 모두 예수님이 언급하셨습니다. 게헨나에 온 악인들의 몸을 구더기가 파먹는데, 그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습니다. 유사한 묘사가 이사야 66:24에도 나옵니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예수님이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들을 죄짓게 하는 일이 하나님께 패역한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손과 발을 잃고 불구자가 되어서라도 ‘영생’을 얻는 것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데, 눈을 주제로 말씀하실 때는 ‘영생’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반대말이 ‘영생’혹은 ‘하나님의 나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불구로 들어간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불구의 상태로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곳은 아픈 곳이 다시 있는 곳,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계 21:4). 이 땅에서 불구인 사람이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온전한 몸을 갖게 됩니다. 가르침의 핵심은 신체의 일부를 베어 버리는 것과 같은 강한 결단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죄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 단락과 연결시킨다면 근절해야 할 죄의 목록에 믿는 자들에 대한 편협한 생각과 시기심도 포함될 것입니다.
화목을 위함 섬김(50절)
48절이 종말에 있을 불 심판을 가리킨다면, 49절은 정결케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한다는 것은 구약에서 제물을 드릴 때 소금으로 정결케 하는 과정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레 2:13; 겔 43:24). 제자들이 소금으로 치듯이 희생 제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육체 일부를, 혹은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심정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50절은 소금이라는 모티브로 전체의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말씀하신 후 서로 화목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이 화목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입니다. 소금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루는 제사에 사용되는데, 제자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기에 성도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생명을 주심으로 믿는 자들의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섬김의 삶을 살며 화목하길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4:6에서 성도의 언어생활이 은혜로 가득 차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지금까지 살펴본 8:27부터 9:50까지 정리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각자에게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에 대한 나의 이해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바로 아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 출발입니다. 그래야 그분을 바로 믿을 수 있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다양한 메시아상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육신적인 메시아, 영광의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고난 받는 메시아상은 그들의 기대와 다른 것이었고,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8:32; 9:32).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참 제자는 십자가의 길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듭된 가르침에도 그 길을 따르기보다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며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섬김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삶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원해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 공동체 안에서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그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교회가 그분의 것이라면 그 지체인 성도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활동을 막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만으로 물 한 잔 대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관용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관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독선과 아집은 피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를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서 섬기려고 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실족시킵니까? 자칫하면 우리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타인을 실족케 할 수 있는 행위가 있지는 않습니까?
영생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아 누리기 위해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특히 형제나 자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화목을 위해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는 손, 발, 눈 등 육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손이 형제자매를 아프게 하면 찍어 버리고, 내 발이 형제자매를 나쁜 곳으로 인도하면 찍어 버릴 것이며, 내 눈에 형제자매의 잘못만 보인다면 눈을 뽑아 버리는 게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물론 죄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게 될 영생은 상상치 못할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교회가 나뉘고 반목하는 모습을 보시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배려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의 제자로 알려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끕니다.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은 결코 자연스럽게 드는 마음이 아니지만,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려 주시면서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반목과 질시와 배척은 대적을 만들 뿐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롬 12:18).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분이 친히 심판하시고 개입하심도 믿을 때 지체들에게 관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화목을 이루고 막힌 담을 허무셨던 것처럼 우리도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요,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삽니다. 주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할 정도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이 피부에 와 닿습니까? 팬데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테러의 위협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폭염과 가뭄도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들이 분명히 나타나는 상황에서도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주님께 고정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강권적인 사랑에 이끌려 관용과 화목을 실천하면서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신앙고백을 했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제자도를 실천하면서 주님의 참 제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질문(27-30절)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지방의 여러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 지역은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쯤 떨어진 헤르몬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합니다. 이곳에는 가나안 시대부터 바알 신전이 있었습니다. 산림이 우거지고 물이 많아 토지가 비옥하고 풍요로운 곳으로 농사와 목축이 적합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을 정복한 후에 그 지역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신 ‘판’을 섬겼기에 파네아스라고 불렸습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빌립은 그 성읍을 확장하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빌립이 로마 황제를 기념하고자 황제의 칭호 ‘가이사’와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든 것입니다. 거대한 판의 석상과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과 제우스를 위한 신전 등 세상 영화로 가득 찬 그곳에 왔을 때 제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예수님이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무리의 반응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답변합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며 세례자 요한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니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능력을 행했고 다시 온다고 예언된(말 4:5)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권세 있는 말씀과 능력을 인해 모세가 말한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인가 보다 나은 대답을 기대하시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주’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정관사 ‘the’가 있습니다. You are the Christ. 당신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어 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이십니다. 마태복음 16:16에 기록된 베드로의 대답은 더 구체적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베드로는 그 대답으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복이 있다는 칭찬과 더불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놀라운 말씀도 듣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자기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자기의 일’은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경고하다’는 절박함과 권위를 가지고 강하게 경고하다 외에 ‘꾸짖다’는 뜻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가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으실 때와(1:25; 3:12) 바다를 꾸짖으실 때에(4:39) 사용되었고, 32절에서는 ‘항변하매’33절에서는 ‘꾸짖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경고하신 이유는 아직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밝힐 시점에 아니었기 때문이거나, 그 호칭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야기될 수 있는 그릇된 기대와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31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메시아인지 분명히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비로소 가르치시니라”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알려주십니다. ‘비로소’로 번역된 ‘에릭사토’는 ‘시작하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하리라.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하시며 당신을 ‘그리스도’가 아닌 ‘인자’라고 칭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란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니엘 7:13-14을 근거로 당신이 천상적 존재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대적들의 승리로 그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두 꾸짖음(32-33절)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받으실 고난에 대해 ‘드러내 놓고’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똑똑히 알아듣도록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가르쳐 주실 때가 됐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메시아의 이미지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승리를 가져오는 왕으로서의 메시아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의 정의를 회복시킬 육신적인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도저히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당하실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성미 급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붙들고’는 ‘따로 말하기 위해 옆으로 데리고 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개역개정판에는 ‘항변하다’로 점잖게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의 의미는 ‘꾸짖다’입니다. 제자인 베드로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꾸짖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서 그 의미를 약화시킨 것입니다. 마 16:22을 보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강력하게 제지합니다. 얼핏 들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 때문에 한 자리 하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려는 야망을 드러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의 사역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도 단호하십니다.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베드로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단지 베드로만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베드로가 왜 사탄으로 불립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는 길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사람의 생각이 앞설 때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깨어있지 아니하면 사탄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랄한 꾸짖음은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제자도와는 결코 조화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반면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하게 될 고난과 수치보다 그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과 구원을 얻게 될 영혼들을 언제나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34-38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예수님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를 당신 곁으로 불러 주님을 따르는 도를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말씀하시려는 내용이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를 따라오기를 소원한다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은 우리의 의지적인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1세기에 로마 제국 사람들은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였고 그를 주(Lord)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라고 고백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6절을 보면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고집과 욕망을 꺾고 그 뜻대로 순종하고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우리의 옛 사람도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함, 즉 철저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처형당하는 장소까지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다릅니다.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란트 비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의 칭찬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부터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의 권리를 유보하고 주님 중심으로,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표현도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지금 당장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예수님을 좇으라’는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3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삶이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것”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삶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목숨이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목숨이라고 본다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순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목숨’은 단지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10:29-30에도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자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식, 전토를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내세에 영생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온 천하를 ‘얻다’, 자기 목숨을 ‘잃다’, ‘유익하다’는 상업적 표현입니다. 즉 ‘얻는다’는 것은 이득을 보는 것이고, ‘잃는다’는 것은 손실을 보는 것이며, ‘유익하다’는 것도 이득을 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심지어 내 목숨까지 잃는다 해도 사실은 남는 장사라는 뜻입니다.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여기서 ‘음란’은 성적인 타락은 물론 영적 음행인 우상숭배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 역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정치범과 같은 중범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신명기 21:23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나무에 달린 자,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선포하는 복음은 당시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22-23). 그러나 바울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오히려 만방에 알려야 할 기쁨의 소식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스승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면 제자의 길도 당연히 십자가의 길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길과 십자가의 길이 공존할 수 없음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사람의 일’, 즉 세상적인 관심사나 세상적인 가치관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위해 살 때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고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누어주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정보의 대상이 아니라 고백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으나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다른 제자들은 물론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로 알기 이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 싸우고, 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구했습니다. 참된 제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생각과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제자는 스승과 동일한 길을 가야 합니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참생명은 구원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 나라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많은 세상에 얽매여 살다 보면 주님과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런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칭찬하시고 자랑하실 것입니다. 제자는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갈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주님의 질문은 결국 “주님이 우리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눈이 가리어질 때 주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갔던 제자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혹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조롱하고 모욕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없습니까? 무리처럼 표적만 구하지는 않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거짓 제자는 아닙니까?
바울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4)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가진 흔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당한 고난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은 바울이 하나님의 택한 종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생깁니다. 주님을 인해 무엇인가 손해 보거나 포기한 적이 있습니까? 고민하고 씨름한 적이 있습니까? 제자가 되는 길은 좁은 길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과 골고다까지 따라왔던 여인들처럼 주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주님의 길을 따라갑니다. 비록 자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구레네 시몬처럼 맡겨진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갑니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No cross, no life. 십자가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제자도를 실천하며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기는 열정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좇는 참 제자들이 되어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담대하게 말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