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

< 본문 에스더 10:1-3 >

 

  한때 우리 사회에 최대 관심어가 웰빙(well-being)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고, ‘웰빙 산업이나 웰빙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웰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참 많았지만, 실제적으로 웰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 채 그저 웨빙을 이야기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well-being’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사람은 미국의 목회상담학자인 하워드 클라인벨(Howard J . Clinbell)입니다. 그가 『WELL BEING』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면서부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well-being’이라는 말은 있었습니다. 시편 35:2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여기서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라는 말 중에 평안함이라는 말을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라는 영어 성경에서 ‘well-be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웰빙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나온 말이고, 성경의 정신을 그대로 담은 말입니다. 그리고 웰빙이라고 번역한 평안함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언어로 샬롬’(שלום)입니다.

  하워드 클라인벨이 쓴 『WELL BEING』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서 『전인건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더욱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영적인 전인건강이라는 말입니다. 클라인벨은 그의 책에서 우리 인간이 전인적으로 건강(well-being)하기 위해서는 7가지 차원에서 모든 것이 건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일곱 가지란 영적인 삶에서의 건강, 마음과 인격의 건강, 몸의 건강, 인간관계에서의 건강, 일에서의 건강, 놀이에서의 건강, 생태계등 자연환경에서의 건강입니다. 이 일곱 가지가 모두 건강해야 전인적으로 건강(well-being)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기농 음식을 먹고 몸이 건강하고 편안한 것만이 well-being인 줄 알고, 그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는 well-being은 이룰 수가 없었고, 그 말은 한 시기의 유행어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well-being이라는 말을 대신하며 떠오른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well-dying’이라는 말입니다. well-dying이라는 말을 간단하게 번역한다면 잘 죽는 것입니다. 조금 더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을 보람되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잘 정리하여 마무리를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well-dying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well-dying’이라는 말 대신에 ‘well-ending’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나 어감은 조금 다릅니다. well-ending이라는 말은 끝맺음을 잘하자정도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끝이 죽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끝맺음을 잘하는 것을 ‘well-end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만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무리를 잘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세운 계획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끝맺음을 잘 하는 것은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마지막이 좋은 사람이 인생을 잘 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모르드개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의 본토와 바다의 섬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였더라.” 에스더서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하수에로 왕의 위엄을 똑같이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더 1:1절은 이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아하수에로 왕은 역사에서 크세르크세스(Xerxes)로 불리는 왕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가장 강성했던 때는 다리우스 1(Darius I, 주전 522-486년 통치)이고, 그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 크세르크세스입니다. 그러니까 페르시아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가 이루어졌을 때 왕이 된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그 넓은 영토를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귀영화 또한 엄청났습니다. 그가 왕이 된 지 3년 째 되던 해에 열린 궁중잔치는 무려 180일 동안이나 열렸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일년에 절반의 시간을 잔치하며 보낼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하수에로의 통치에 대해서 에스더 10장에서는 다시 1장에서 언급한 그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에스더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의 부귀영화가 에스더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 다시 회복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처음에도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마무리할 때에도 그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부귀영화가 그렇게 쭉 이어졌다면 마무리할 때 그런 말을 반복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페르시아 제국에 큰 혼란이 있었지만, 그 혼란을 잘 마무리하면서 아하수에로 왕의 부귀영화도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페르시아 제국에서 일어난 큰 혼란의 중심에는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 에스더서의 내용입니다. 아름다운 미모와 성품으로 왕비가 된 에스더에게는 모르드개라는 사촌 오라버니가 있었습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될 때 모르드개는 궁궐의 문지기로 있었고,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자신의 인척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하수에로 다음으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하만이라는 사람이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르드개를 죽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페르시아 제국에 있던 모든 유다인을 멸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렇게 해서 12번째 달인 아달월 13일에는 누구든지 유다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유다인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왕의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1만 달란트라는 어머어마한 돈을 주겠다고 환심을 사서는 왕이 조서를 내리게 한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큰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아달월 13일에 페르시아 제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왕비 에스더를 권면하여 아하수에로 왕에게 민족을 구해 달라는 청원을 하게 하고, 왕비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왕 앞에 가서 자기 민족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결국 하만의 간계가 들통나게 되고, 하만은 모르드개를 공개처형하기 위해서 자신이 만든 높이 20m가 넘는 장대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만이 처형당한 이후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왕비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의 사촌 오라버니인 모르드개로 하여금 그 집과 재산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왕이 한 번 내린 조서를 변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음모를 꾸며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이미 조서를 내린 아달월 13일이 되면 누구든지 유대인을 죽이고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조서의 효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비록 하만은 죽었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유대인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모두 죽임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세운 대책이 왕이 다시 조서를 내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그대로 복수할 수 있게 한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날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던 사람들을 유대인들도 공격하여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게 새로운 왕의 조소가 공포됩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페르시아 제국의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왕이 총애하는 왕비 에스더도 유대인이고, 에스더의 사촌 오라버니인 모르드개가 거의 실세에 가깝도록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던 대적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유대인에게 그대로 당하고 맙니다. 자신들이 유대인들을 죽이겠다고 계획을 세운 바로 그날에 말입니다. 이렇게 멸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그날을 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모르드개가 실제적으로 아하수에로 왕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입장에서도 페르시아 제국에서 거대한 음모로 한 민족이 사라질 위기에 있었는데,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조언으로 유대인의 멸망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복수는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던 페르시아는 다시금 평안을 찾게 되었고, 모르드개 역시 왕의 신임으로 왕 다음의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왜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를 자신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혔을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이 총애하는 왕비의 오라버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무명의 문지기 시절에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려 왕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한 동안 모르드개는 왕의 생명을 살려준 그 일에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모르드개는 아무런 불평없이 자신의 자리인 문지기의 자리에서 궁궐의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는 그 어떤 권력의 자리도 탐하지 않고 살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이야기이지만, 권력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그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져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이상하게 변하고, 자기의 권력욕구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고, 권력욕구에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부 하는 등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결과는 언제나 비참해지고 불행해집니다.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매듭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목사들 중에서도 종교권력에 사로잡혀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뒤끝이 좋지 않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욕구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의 욕구가 아닌 사랑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새계명으로 주신 말씀인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부자로 살고, 더 출세하고, 더 성공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 노예가 된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많은 사람을 도와주어야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일견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는 신앙인이 되려 하기 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신앙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힘 있는 자리에 올라가서 이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고,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의 편에서 그들의 아픔을 보듬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힘 있는 자리에 오르려 할 뿐 정의를 이루고 약한 자를 돕는 자가 되려는 마음은 뒷전이 될 때가 많습니다. 목적을 잃어버리고 우리 인간의 욕망이 탐하는 권력을 얻으려는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면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베품에 빚진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권력의 의지가 아니라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마지막 질문은 얼마만큼 높은 자리에 올랐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사랑하며 살았느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때도 얼마만큼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었느냐로 평가할 것입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얼마만큼 사랑하며 사셨습니까? 2021년을 갈무리하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한 해 동안 사랑하며 살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맞이하게 될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무명의 모르드개를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린 두 번째 이유는 물질에 지배당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려고 하면서 왕에게 1만 달란트를 뇌물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마어마한 통치자금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1년 세수가 15천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에서 1년 동안 거둬들이 세금의 2/3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서 나서 왕에게 주겠다고 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을 죽이면서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그것으로 왕에게 뇌물을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죽여도 된다고 조서를 내리면서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아도 된다고 조건을 붙인 것입니다.

  하만이 죽고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내린 새로운 조서에도 유대인들이 원수를 갚을 때 원수들의 재산을 빼앗아도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원수들을 죽일 때 그들의 재산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에스더 9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대적들에게 원수 갚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말이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남의 재산에 탐을 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동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모르드개였습니다. 아마도 하만의 재산을 에스더에게 주어 모르드개로 하여금 관리하게 할 때부터 아하수에로는 모르드개를 유심히 관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산을 관리함에 있어 모르드개는 결코 사심을 채우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나라의 재산을 관리하는 핵심 역할을 하는 제2인자의 자리에 모르드개를 앉힌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인간됨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는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 돈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한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취한다든지, 자기 분수 이상의 것을 욕망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결과는 늘 초라합니다. 돈을 사랑하며 돈을 좇아 살던 사람의 뒤끝은 언제라 초라할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마지막에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돈과 상관없이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돈은 정말 중요합니다. 펠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돈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돈이 우리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4:34-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밭을 가지고 있고, 좋은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꺼이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판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 인간의 발 아래에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머리 위에 놓고 우상처럼 숭배하며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가슴에 담고 돈을 사랑하며 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우리의 발 아래(앞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돈에 지배받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드르개는 그렇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왕에게만 신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존중을 받았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갑자기 출세한 사람을 보면 괜히 시기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나와 비슷한 수준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면 질투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명의 문지기였던 모르드개가 왕 다음의 2인자에 자리에 올랐을 때 동족들이 그를 존중하고 사랑했습니다. 모르드개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까요?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돈답게 쓰는 사람이 존중받습니다. 같은 돈을 쓰면서도 어떤 사람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을 돈답게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쓰면서 자기를 드러내려 하고, 자기를 자랑하려 하면 결코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돈에 깨끗하고, 돈을 쓰되 가치있게 사용하는 사람은 칭찬과 존중을 받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인생을 마무리할 때에도 사람들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올 한해 어떻게 사셨습니까? 코로나19로 인해서 정말 많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 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돈의 문제입니다. 특별히 자영업자들, 소상공인들은 돈 때문에 아주 힘들어 했습니다. 지금도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해를 살아오면서 돈 때문에 밤잠 설치는 일이 없었다면 그건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때론 돈 때문에 힘들어도 참고 버텨낼 수 있었다면 그건 신앙의 힘입니다. 이런 힘든 상황을 돈에 끌려 마음 상하며 살지 않고, 믿음으로 감내하며 살았다면 그건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2022년도에는 우리 모두가 돈 걱정하지 않고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찌 돈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돈이 풍부해서 돈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돈의 욕망에서 해방되어야 돈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지요?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립보서 4:11) 사도 바울은 궁핍한 상황에 있었지만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태도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 다음에 이어 하신 말씀처럼 고백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2-13) 우리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는 이런 고백으로 살아 가십시다.그 능력은 돈에 지배받지 않는 능력, 돈에 끌려 살지 않는 능력입니다. 배고픔과 굴핌에도 기꺼이 처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능력으로 올 한 해도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도 아름답게 마무리함으로, 하나님께서부터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는 존중과 사랑을 받는 멋진 신앙인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