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48)
무엇에든지
(빌립보서 4:8-9)



빌립보서 강해 48번째 시간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끝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끝으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토 로이폰(Τὸ λοιπόν)인데, 그 뜻은 우리말 성경에 ‘끝으로’로 번역된 것처럼 ‘마지막으로’(for the rest)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이제 이야기의 결론을 맺겠다고 할 때 주로 쓰여진 단어입니다만 그런 의미로 쓰여진 것과 함께 그것과 다른 한 의미로도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그 다르게 쓰여진 또 하나의 의미는 지금까지 한 이야기보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가 중요하니 더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는, 그 남은 이야기에 대한 강조의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토 로이폰이라는 단어는 보편적으로 글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은 글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실 빌립보서 안에는 끝으로로 번역된 이 토 로이폰이라는 단어가 3장 1절에 한 번 더 나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렇게 ‘끝으로’라는 단어가 3장 1절 첫머리에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3장 1절과 본문에 이 단어가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이유를 바울이 빌립보서를 처음에는 3장까지만 쓰려했기에 그렇게 3장 1절을 끝으로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더 쓰게 되어 본문에 또 다시 쓰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또 다른 학자들은 3장 1절에 쓰여졌던 이 단어를 바울이 본문에 또 다시 쓰게 된 이유를 앞에서 말씀드린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중 두 번째 의미인 남은 이야기에 대한 강조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썼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맞을 것 같습니까? 저는 본문의 토 로이폰이라는 단어에는 글의 마무리와 글의 강조하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바울이 빌립보서를 마무리하면서 본문에서 이 단어를 쓰게 된 것은 이제 빌립보서의 마지막 결론을 맺겠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를 썼을 것이라는 것이고, 또 그것과 함께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이니 더 주의해서 들으라는 말씀에 대한 강조의 의미에서  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끝으로’라는 단어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바울이 토 로이폰, 즉 끝으로로 시작되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말씀으로 주었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 요즘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듣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윤리가 무엇입니까? 윤리란 사람이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즉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는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것이 윤리이고, 인간관계를 바르게 맺게 하는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는 것이 윤리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고, 다른 사람과 이런 저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분명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윤리를 지키지 않고 산다면 그 사람이 속해있는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웃과 이런 저런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이웃관계의 기초가 되는 윤리를 지키지 않고 산다면 그 이웃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진정 법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이 윤리입니다. 정확히 말해 윤리가 지켜지지 않는 까닭에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를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키라고 강조한 윤리의 내용은 여섯 가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여섯 가지 윤리의 내용은 일반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과 적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차이를 바울은 여섯 가지의 윤리강령 앞에 매번 ‘무엇에든지’라는 말을 붙임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윤리강령 앞에 그렇게 ‘무엇에든지’라는 말을 먼저 했을까요? 우리는 ‘무엇에든지’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윤리와의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에든지’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엇에든지’라는 헬라어 단어는 호사(ὅσα)입니다. 그런데, 이 호사라는 단어는 네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의미는 첫째가 ‘언제나’이고, 둘째는 ‘어디서나’이며, 셋째가 ‘누구에게나’이고, 넷째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의미를 윤리적 입장에서 한단어로 정리해서 말씀드린다면「절대윤리」라는 단어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에든지’라는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상대적 윤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사람에 따라 바뀌며,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뀌는 윤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리고 무슨 일에 있어서나 변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기준과 적용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세상사람들의 윤리와의 큰 차이입니다.
이 내용을 이웃 사랑을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일반적으로 세상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까닭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윤리적으로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무엇에든지’라고 말합니다. 즉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하든지, 그리고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상과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윤리가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절대윤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에든지’라는 단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절대적 윤리임을 인식시키며, 그 바탕에서 윤리적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사실 이런 바울의 권면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대상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윤리의 기준과 적용의 내용이 바뀌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많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 이 말씀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해석들 가운데 하나가 ‘너희가 이리 가운데로 가지만 이리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양으로 살다가 양으로 죽어야 한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 있다고 이리처럼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교회에서는 양처럼 살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양이 아닌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즉 집에서는 고양이로, 직장에서는 여우로, 힘없는 사람 앞에서는 사자로 변해 살고 있다 그 말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은 정말 잘못된 삶의 모습입니다. 대상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내가 변절되거나 둔갑해서는 안 됩니다. 대상과 환경과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윤리는 절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여섯 가지 윤리강령을 말하면서 각각의 윤리강령 앞에 먼저 ‘무엇에든지’를 계속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럼 바울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대상과 환경과 상황과 관계없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윤리강령이 무엇입니까?

첫째, 무엇에든지 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알레데(ἀληθῆ)인데, 말이나 행동만이 아닌 마음이나 생각에도 거짓이 없는 진실된 삶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거짓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실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삶을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제쳐두고라도 신앙을 가진 우리도 온전히 살고 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돌아보면서 오늘도 이런 저런 거짓 속에서 살았구나라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날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주 행하는 거짓들 가운데 하나가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 거짓말은 바르지 않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그러기에 그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조심합니다. 분명 그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거짓말은 경계하면서도 흔히 하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거짓말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하고 쉽게 합니다. 예를 들면 주사 맞기 싫어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의사선생님 얼굴만 보고 오자는 거짓말을 하며 병원에 데리고 가 엉덩이에 주사바늘을 꽉 찌르게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 거짓말은 해도 괜찮은 거짓말 입니까? 아이를 위해 한 것이니 괜찮다고요? 그런데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고’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합니다. 그런 거짓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해도 괜찮은 거짓말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결국 자신에게도 해가 되기 때문이고, 그 거짓말을 들은 사람에게도 해가 되기 때문이며, 이후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실을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차라리 침묵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극적이나마 참되게 사는 것을 지켜줍니다. 그런데 말만 그렇습니까? 조금만 자신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거짓의 모습이 자신에게 있는지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에도, 일하는 자세에도, 심지어는 예배드리는 모습에도 거짓들이 있습니다. 이것 고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에든지, 즉 언제나 그리고 범사에 참되게 사는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무엇에든지 경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셈나(σεμνά)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입니다. 즉 코람데오(Corom Deo)의 삶의 자세, 신전의식(神前意識)의 삶의 자세를 경건이라고 한다 그 말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의식, 즉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신앙인이 이런 경건의 자세를 잃게 되면 신앙인은 비신앙인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만날 때에도, 누구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어떤 생각을 할 때에도,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늘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경건의 자세와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설령 아무도 없는 나 혼자만의 공간에 있다 하여도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선 것과 같은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런 경건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나와 함께 즐기자’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내가 어떻게 죄를 짓겠느냐’하면서 그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렇게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옳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디카이아(δίκαια)인데, 법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바른 것, 즉 정의(正義)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나라의 법률에 어긋나지 않는 정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도덕률에도 어긋나지 않는 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과정이 어떠하든지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간혹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하며 서울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서울에 가면 그 사람은 망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은 옳지 않은 불의한 수입, 옳지 않은 불의한 쾌락, 옳지 않은 불의한 출세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에 많은 세상의 사람들이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어떻게든 얻기 위해, 그리고 성공의 자리에 어떻게든 오르기 위해서 많은 도덕적 법률적 정의를 외면합니다. 그래서 옳지 못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그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복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성공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과정 속에서 옳지 않은 것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선택을 하며 사는 것이 신앙인의 자부심이고 긍지입니다. 분명 무엇에든지 옳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런 옳은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무엇에든지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결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그나(ἁγνά)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결과의 깨끗함뿐만이 아닌 동기와 행동과 수단에서의 깨끗함의 의미도 담겨있고, 마음과 생각의 깨끗함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고, 동기와 행동과 수단이 깨끗하며, 그래서 결과까지도 깨끗한 것이 정결이다 그 말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어떤 세계에 살아도,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도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정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결함은 우선 버리는데서 갖출 수 있습니다. 탐욕의 마음과 행동을 버리지 못하면 삶의 내용이 정결하지 못하고, 증오의 생각과 행동을 버리지 못하면 삶의 의식이 정결하지 못하며, 질투의 마음과 행동을 버리지 못하면 삶의 모습이 정결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정결함은 우리를 정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버림과 함께 또 정결함은 자신의 삶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통해 유지됩니다. 세탁한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하듯이 탐욕과 증오와 질투의 마음과 행동을 버리고 난 후에는 더욱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분명 모든 일에 정결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버림과 철저한 관리로 정결한 삶의 모습을 늘 지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만하며라는 헬라어 단어는 프로스필레(προσϕιλῆ)입니다. 이 단어를 영어성경에서는 러버블(lovable) 즉 ‘사랑스러운’, 또는 어트랙티브(attractive) 즉 ‘사랑의 마음을 끄는’ 그렇게 번역 했습니다. 즉 프로스필레라는 단어의 뜻이 사랑하라가 아닌 사랑을 받으라이다 그 말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하라 하지 않고 사랑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으로 말했습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 말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기에서 잠깐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사실 사랑하는 것도 어렵지만 사랑받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받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보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보다 더 비참한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으로 말한 것입니다. 즉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살라 그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받을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찾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사람은 절대 사랑받을 사람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상대방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상대방, 여기에서 상대방은 직장도 되고 가정도 되고 교회도 되고 사람도 됩니다만 그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받을 만하며라는 이 말씀에는 먼저 사랑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먼저 사랑을 실천하여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라 그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상대방을 먼저 사랑함으로 그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런 사랑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받을 만하며라는 헬라어 단어는 유페마(εὔϕημα)인데, 그 뜻은 정중하고 우아하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의 말을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지 즉 어떤 자리에서든지, 어떤 사람들에게서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든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높은 자리에서나 낮은 자리에서나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힘을 가진 사람이나 지위가 없는 사람이나 누구에게서든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큰 일에 대해서나 작은 일에 대해서나 다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는 칭찬받았지만 저 자리에서는 칭찬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자리를 구분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자리가 높아진 다음 교만한 사람으로 사람이 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름대로 일을 했음에도 칭찬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모든 일을 다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불평의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일을 했다거나, 아니면 겉으로만 일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임에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칭찬하는 것에 인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려면 겸손하게 주어진 자리를 감사함으로 지켜야 하고, 맡겨진 일을 기쁨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에 넉넉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그런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만한 내용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섯 가지 내용을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무슨 덕이 있든지’ 즉 지금 도덕적으로 뛰어난 삶의 모습을 당신들이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리고 또 ‘무슨 기림이 있든지’ 즉 지금 도덕적으로 인정을 받아 칭찬받는 삶을 당신들이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자신이 언급한 여섯 가지 윤리강령을 늘 생각하면서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들 생각하라.’ 그러면서 그는 그렇게 사는 것은 이론이 아닌 실재이니 그 실재의 증거인 자신을 모델로 삼으라고도 권고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런 다음 그는 그런 윤리강령을 지키며 사는 자들이 신앙의 감격과 능력을 늘 체험할 수 있다는 축복의 말을 했습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이 권면한 여섯 가지 그리스도인의 윤리강령이 이제 저와 여러분의 삶의 내용과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하나님의 임재와 평강을 체험하는 신앙의 감격을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복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