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46)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Ⅱ)
(빌립보서 4:4-7)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동안 그가 여러 번에 걸쳐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권고했던 내용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 정리와 결론의 내용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세 가지 삶의 내용입니다. 그 세 가지 삶의 내용은 첫째가 기쁨이고, 둘째가 관용이며, 셋째가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 삶의 내용 가운데 첫 번째 삶의 내용인 기쁨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삶의 내용인 관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러분! 관용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바울이 권면한 이 관용을 여러분께 네 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관용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에피에이케스(ἐπιεικής) 인데, 사실 에피에이케스란 이 단어는 가지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기에 한 뜻을 가진 단어로만 번역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이 에피에이케스를 점잖은(seemly), 공정한 또는 공평한(fairness), 고분고분한(yielding), 온화한(gentleness), 그리고 관용 또는 인내와 용서(forbearance)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피에이케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장 잘 알게 해주는, 영어로는 번역이 안 되는 단어가 우리 말과 한문에 있습니다. 그 단어는 우리가 덕스럽다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우리 말 덕, 그리고 큰 덕(德)으로 표기되는 한문의 덕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덕이 무엇입니까? 이 덕이라는 단어는 옳은 것보다도, 그리고 정의보다도, 그리고 법보다도 더 큰 것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즉 옳은 것을 내세우는 것보다도, 그리고 정의로 처단하는 것보다도, 그리고 법대로 판단하는 것보다도, 그런 것들을 뛰어넘어 보여주고 행하는 의식과 자세와 행동과 판단이 덕이다 그 말입니다.

분명 세상사에는 옳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사가 옳은 일만 기준삼아 움직인다면, 그리고 세상이 정의라는 원칙으로만 운용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건강하고 밝은 세상이 될 것 같습니까? 그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세상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자녀양육을 예로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느 부모든지 자녀를 옳은 사람으로, 그리고 정의의 사람으로 키우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부모가 자녀에게 철저하게 옳은 일만 하도록 강요하며 정의롭게 살도록 요구하고, 부모가 요구한 옳은 일을 자녀가 온전하게 행하지 않는다거나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하지 말라고 한 불의한 일을 했을 때에 철저하게 자녀에게 그 책임을 묻고 무서운 벌로 자녀를 다스리며 자녀를 키운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그 자녀가 부모가 바라는 대로 건강하고 밝게 자랄 것 같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오히려 더 삐딱한 자녀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옳은 것보다 그리고 정의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옳은 일을 하는 것 대신 옳지 않은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리고 정의롭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것 대신 불의한 모습을 보였다할지라도, 그런 자녀를 너그럽게 봐주고 이해해 주는 옳은 것보다도 더 크고 정의보다 더 큰 부모가 가지고 있는 큰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녀를 너그럽게 봐주는 큰 것, 그리고 이해해 주는 큰 것이 바로 부모가 가지고 있는 덕입니다.
또 세상에는 세상을 바르게 움직이게 하고 질서 있게 움직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교회에는 교회법이 있으며, 학교나 회사에도 다 나름대로의 법이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만 가지고 세상이 움직인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마다 정보다는 법을 앞세우고 사는, 그리고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풀리지 않는 족쇄를 채워놓는, 그런 삭막한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들의 연합체인 교단에는 각 지방회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된 목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최고의결기구인 총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총회에 참석해 보면 법대로 하자며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법대로 모든 것을 한다고 해서 총회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실현하는 성총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총회가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법대로 할 수도 있고 법가지고 논쟁을 벌일 수도 있지만, 최종에는 그 법을 뛰어넘는 용서와 은혜와 사랑이 총회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총회가 진정한 성총회가 될 수 있고, 교회들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법보다도 더 큰 넓은 마음과 따뜻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덕입니다.

말씀드린 그대로 옳은 것보다도 정의보다도 그리고 법보다도 더 큰 것이 바로 오늘 읽은 성경에 관용으로 번역된 에피에이케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에피에이케스, 관용이나 덕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경이 옳은 것이나 정의나 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 옳은 것이나 정의나 법은 정말 중요하고, 그러기에 성경에서도 사람이나 교회나 나라는 언제나 옳은 것이나 정의나 법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성경은 또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에피에이케스, 즉 관용이고 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관용과 덕을 보이고 베풀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즉 그릇된 일을 행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도 그리고 법을 어기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도, 그 사람을 정죄부터 하려하지 말고 그리고 비판과 타도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넓고 큰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 본문 말씀의 가르침이나 그 말입니다. 



이런 의미가 관용으로 번역된 에피에이케스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이 관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내용에 대해 살펴보십시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관용은 자기 자신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관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내용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설명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7가지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양보입니다. 내가 요금을 내고 버스에 탔습니다. 그리고 빈자리가 있어서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것은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탄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중학생 하나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지친 모습으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 때 내가 앉아 있던 그 자리로 그 학생에게 양보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또 가족모임에서 내가 의견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족이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의견의 충돌이 생겼습니다. 내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계속해서 내가 주장을 내세우면 가족들 간에 갈등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했던 주장을 양보합니다. 그것이 관용입니다.
둘째, 기다림입니다. 어떤 부인이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상담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런 부인의 불평을 묵묵히 듣고 난 상담가는 때가 되면 고쳐질 것으로 보이니 좀 더 기다려보라는 권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권고에 부인은 이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고 하며 바로 이혼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상담소를 떠났습니다. 그런 부인의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상담가는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남편이 될 것 같은데 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는데, 얼마 후 부인은 결심한 그대로 남편과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인과 헤어진 남편이 어떤 계기를 통해 그 동안 잘못 살았던 자신의 삶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자세로 삶을 살게 되었고, 그로인해 그 남편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다려주지 못했기에 그 부인은 존경받고 사랑받는 남편의 아내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관용은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돌아서겠지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셋째, 용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이 잘못했음에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은 여순사건 때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며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형무소에서 사형수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그 살인자를 나라에 탄원하여 특별사면을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목사까지 되게 했습니다. 그런 용서가 관용입니다.
넷째, 이해입니다. 아무리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엄청난 죄를 범했다 하여도, 그 실수나 죄의 이면에는 다 나름대로의 이런저런 사연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연들을 바탕으로 그 실수나 죄에 대해 이해하며 그런 실수와 죄를 덮어주는 것이 관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해라는 것은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로 이해를 언더스탠드(understand)라고 하는데, 이 언더스탠드라는 단어는 두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 하나는 언더(under), 즉 아래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스탠드(stand), 즉 서다라는 단어입니다. 즉 이해는 아래에 서야, 낮은 자리에 서야,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다섯째, 친절입니다. 친절이라는 단어와 반대되는 개념의 단어는 각박이라는 단어이고, 인색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각박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나 인색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절대 이웃에게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친절하지 못한 사람은 분명 이웃에게 관용의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여섯째, 인내입니다. 당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고 있다고 그 과거에 대해 말하고 당신의 허물을 보았다고 그 허물을 비판하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독약입니다. 알고 있지만 그리고 보았지만 말도 참고 쏟아내고 싶은 비판도 참는 것이 이웃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지혜입니다. 분명 인내가 관용입니다.
일곱째,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관용이라 할 때의 사랑에는 그런 사랑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마음을 다하는 깊이가 있고,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이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지속성이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관용입니다.

이렇게 관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내용은 양보이고 기다림이고 용서이고 이해이고 친절이고 인내이고 사랑입니다. 이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 질문 하나를 심각하게 해야 합니다. 그 질문은 내가 과연 바울이 권고한 그대로 그스도인다운 삶의 내용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좀더 오늘 드린 말씀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한 번 더 드린다면 이 질문은 과연 내가 관용이라는 삶의 내용을 가지고 이웃과 화목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정직하게 답해야 합니다. 예라는 대답을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아니요 라는 대답을 하실 수밖에 없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라는 대답을 하신 분은 그런 삶의 내용을 가지고 앞으로도 관용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니요라는 대답을 하실 수밖에 없는 분은 지금부터라도 관용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나 교우나 직장동료나 그 어떤 이웃과도 관용의 자세를 가지고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왜 그리스도인이 관용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관용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먼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관용하며 살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관용 아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그 정도의 차이도 거기서 거기이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다 허물이 있고 부족함이 있으며 죄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만약 하나님의 관용이 없었다면 저나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과연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냉정하게 살펴볼 때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보다는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사람들이고, 행복을 누려야 할 이유보다도 불행 속에서 신음해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용, 즉 하나님의 양보와 기다림과 용서와 이해와 친절과 인내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의 관용 아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이웃에게 관용을 보이고 관용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에는 임금으로부터 빚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었다가 그로인해 임금의 노여움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예수님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 설교의 결론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분명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관용 까닭에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그 하나님의 관용을 기억하며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에게는 관용의 삶을 통해 세상을 밝게 할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은 자기를 우선하는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 즉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먼저 배려하며 먼저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관용이 가득 차있는 세상은 밝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빛이라 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세상을 밝게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언제나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인색하게 살다가 각박하게 살다가 냉정하게 살다가 그리고 매몰차게 살다가 그 심판의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은혜인 행한 대로 주시는 상을 받게 될 날입니다. 그 때 관용하며 살았던 까닭에 이 세상에서 희생도 하고 손해도 보았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위로와 칭찬의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졌기에 그리스도인은 그 심판을 의식하며 관용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세 가지 이유가 그리스도인이 관용하며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인데, 그렇다면 그렇게 관용하며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관용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 답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 세 가지 삶의 내용 중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첫 번째 내용인 자기 자신의 건강한 삶과 신앙을 위해 자기 자신 안에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삶의 내용인 주 안에서의 기쁨과 관계가 있습니다. 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렇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사는 삶의 내용으로 우리가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할 때 우리는 관용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분명 주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과 이웃에 대해 관용하며 사는 것은 항상 병행합니다. 즉 주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고 살면 이웃에 대해 관용하며 살 수 있지만, 주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고 살지 못한다면 이웃에 대해 관용하며 살 수 없다 그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기분이 좋았을 때와 기분이 나빴을 때 여러분의 이웃을 대했던 태도가 똑 같았습니까? 틀림없이 달랐을 것입니다. 기분이 좋았을 때에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잘 봐줍니다. 그 잘못,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넘어가 줍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빴을 때에는 사소한 잘못도 일일이 따지면서 그 사람을 책망합니다. 과거일까지도 들춰내면서 그 잘못보다 훨씬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아주 박살을 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주 안에서의 기쁨이 늘 충만하도록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분명 그렇게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는 그리스도인이 관용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여, 이웃에게 언제나 관용을 베풀며 사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Ⅵ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관용의 삶을 살라는 권면을 했습니다. 그가 그런 권면을 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관용 까닭에 오늘에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고, 관용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세상을 밝게 할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관용으로 그 책임을 잘 감당해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받게 될 상이 그리스도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웃과 관계에서 힘들고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반드시 관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관용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할 때 온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항상 주 안에서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축복하기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며 사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