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 온유

< 본문 갈라디아서 5:22-24 >

 

민수기 12:3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온유한 사람으로, 그리고 그 온유함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모세의 성질을 잘 압니다. 모세는 온유함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가 40세 때 벌인 일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고된 생활하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둘러보던 모세는 한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맙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서 모세는 40년 동안 머물렀던 애굽의 왕궁에 더 이상 거주할 수가 없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여러분, 왜 모세는 야굽 사람을 죽여야만 했을까요? 그는 당시 왕자의 신분이었습니다. 만일 그 애굽 사람이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매질하고 부당하게 대했다면 왕자의 신분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노예일지라도 부당하게 일을 시키거나 가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일을 그릇되게 처리했습니다. 그것은 그 상황을 보면서 마음속에 일어난 울분을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혈기 왕성한 사람이었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분을 절제하지 못하고 혈기 왕성했던 모세가 말씀드린 민수기 12:3절에서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그것도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그 온유함이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민수기 12:3절에서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모세의 어떤 모습 때문에 온유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때 보여준 온유함이 어떤 것이었길래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말씀을 하신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모세가 왜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내인 십보라가 죽은 후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방의 내용이 좀 독특합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모세를 비난한다면 80이 훨씬 넘은 늘그막에 결혼을 하려고 하느냐?’ ‘굳이 결혼을 하려 한다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내로 맞아들여야 할텐데 왜 이방인인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었느냐? 그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냐?’ 그렇게 말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그런 것으로 비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비방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을 계기로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모세가 변명할 말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자신이 결혼해야 했는지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 말고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한 내용인 지도력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주시면서, 아론이 너의 대변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말 잘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려 하셨다면 모세보다도 아론이 훨씬 더 적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 잘 하는 아론보다도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자신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왜 너만 이스라엘의 지도자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비방한다면 그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시켜주신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한 것 뿐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아니 내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들인 일로 마음이 불편하셨다면 그걸 따지셔야지 왜 지도력을 문제 삼으시는 것입니까? 이건 본질과 다른 이야기이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는 내용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비방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모세가 해명하려고 한다면, 아니 항변하려고 한다면 할 말들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비방하고 나무라는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런 모세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여러분, 온갖 비난과 비방의 포화를 쏟아내는 누이와 형 앞에서 할말이 많지만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은 이 모세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재판을 받으실 때, 산헤드린 공회에서나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으실 때에나 거의 침묵하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며 성전을 모독했다.’는 내용으로 고발당하실 때 왜 변명할 말씀이 없으셨겠습니까? 빌라도 총독에게 로마에 세금 내지 말라고 선동했고, 로마 황제가 임명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한다.’고 고발당하셨을 때에도 왜 하실 말씀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변명하지 않으시면 당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마태복음 27:14) 고발하는 내용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인데, 예수님께서는 고발하는 내용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자 빌라도 총독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 그런 예수님께서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29)

  여러분, 그렇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이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온유함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36절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께서 또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유함으로 대해 주셨고, 그랬기에 자신이 크게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온유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도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자는 온유한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덧입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온유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덧입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곤란을 당하다’ ‘학대하다’ ‘괴롭히다는 동사 아나(עָנָ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 말의 원래 의미는 노예처럼 낮은 자리에 내려가 앉다, 굴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고난을 통하여 낮아짐과 경건의 자리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품적으로 남들보다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은 그런 인간 성품으로서의 온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삶을 지향하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낸 사람이 가지는 겸손이 온유함입니다.

 

모세를 향하여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세는 참 많은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왕궁에서 보낸 처음 40년이야 고난이 없는 영광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애굽 사람을 죽인 이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살아야 했던 40년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고난이라는 것이 욥이 겪은 것과 같은 고난은 아닙니다. 모세는 철저하게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우리나라같이 초목이 풍성한 지형이라면 양을 치는 것이 조금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매일같이 양떼를 데리고 양떼들에게 먹일 풀과 마실 물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이 양을 치는 도단까지 찾아가야 했는데, 야곱의 집이 있던 헤브론에서 형들이 양을 치던 도단까지의 거리는 100km가 넘습니다. 100km라고 하면 사람이 걸어서 가도 며칠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먼 길을 양떼를 몰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오랜 시간에 걸쳐 가야 했겠습니까? 그렇게 먼길이지만 양떼에게 먹일 풀을 찾기 위해서는 그 먼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도 그렇다면 미디안 광야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양떼를 이끌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오로지 외롭게 양떼와 지내야 합니다. 그 기간이 무려 40년 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미 깊은 고난의 자리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모세이기에 40세 때 혈기 왕성하여 앞뒤 재보지 않고 나섰던 그런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금 광야생활해야 할 때는 양떼를 이끌고 광야생활해야 할 때보다 더 큰 시련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있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모세에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때로는 모세를 죽일 것처럼 모세에게 덤벼들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모세의 성품이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백성들이 불평할 때 거기에 대꾸한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그는 깊이 경험했습니다. 오로지 해결책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 자신이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해결됩니다.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할 때 자신이 물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주셔야 해결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원망할 때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맡기는 것뿐입니다.

  민수기 12장에서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의 결혼문제와 지도력 문제로 불평하고 비방할 때에도 자신이 변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그는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을 향한 비방이었지만, 그것까지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게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뭔가를 내가 하결하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셔야만 이겨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풀어주셔야만 문제가 해결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어낸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고난의 해결책임을 알기에, 내가 헛된 힘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함은 내 안에서 내 능력이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만들어주신 성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온유가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우리 믿음의 사람은 온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주님의 온유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유를 옷 입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종종 옷 입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옷 입는다는 말은 기존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이전에 가졌던 옛사람의 모습, 육에 지배를 받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던 삶의 모습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옷 입는다는 말씀이 그런 의미이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는다는 말씀도 그런 의미입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은 예수님의 성품인데, 예수님의 성품을 옷입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 가졌던 모습들을 버려야 합니다.

  ‘온유를 옷 입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의 모습에서 온유함이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함이 드러나 보여져야 합니다. 디도서 3:2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온유함을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 앞서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라고 전제합니다. 비방하고 다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비방하는 미리암과 아론에게 싸우려고 덤벼들지 않았습니다.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방하고 다투는 모습이 아니라 온유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서 1:21절에서는 말씀을 받을 때에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온유한 마음일 때에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한 분이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의 온유함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의 온유함을 닮기 위해서는 주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 내 마음을 맡기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더라도, 나와 다투자고 덤벼들더라도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참고 이겨내십시다. 성령께서 그 때 내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나를 성령께 위탁하십시다. 그러면 내 마음에 온유함이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