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찾아서
< 본문 – 요한복음 14:4-6 >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하버드 대학교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인 1636년 메사추세츠 주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청교도 목사를 육성하는 신학교로 세워졌습니다. 그 때 학교의 이름은 ‘뉴칼리지’였지만, 3년 후인 1639년 ‘하버드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뉴칼리지가 하버드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존 하버드(John Harvard, 1607-1638) 목사 때문입니다.
존 하버드 목사는 영국에서 태어나 목사가 되었고, 1637년 미국으로 건너와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 찰스타운의 공민이 되어 찰스타운 ‘제1교회’ 부목사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국으로 건너온 지 채 1년도 안 된 그 다음 해인 1638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죽으면서 영국에서 상속받았던 재산 1,600파운드를 남겼고, 그 가운데 절반과 자신이 가진 책 모두를 뉴칼리지 신학교에 기증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매사추세츠 입법회의는 1639년 최초의 거액 기금 헌납자인 존 하버드 목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그의 이름을 따 학교명을 하버드 칼리지로 바꾸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의 하버드 대학교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동문들은 1884년 하버드 목사의 동상을 건립하여 하버드 대학교 교정에 세우게 되었습니다.(사진1)
이 하버드 대학교의 문장(emblem-사진2)에는 월계수 가지로 둘러싸인 방패 위에 세 권의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책들에 ‘VERITAS’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VERITAS’는 라틴어로 ‘진리’라는 말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엠블럼에 ‘진리’(VERITAS)라는 단어를 써놓았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버드 대학교가 단순히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기에 엠블럼에 ‘진리’(VERITAS)라는 단어를 새겨 넣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버드 대학교는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로 출발하였고, 존 하버드 목사의 헌신으로 그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말하는 진리라는 말은 단순히 학문적 진리를 의미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진리인 기독교의 진리, 성경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목사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대학으로 세워진 하버드 대학이 성장하면서 수학과 과학 과목이 생기자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새로운 신학대학을 세웠습니다. 그게 1701년에 세워진 예일 대학교입니다. 예일 대학교 역시 목회자 양성을 위해 10여 명의 목사들이 세운 대학입니다. 그 예일대학교의 엠블럼(사진3)에도 ‘진리’(VERITAS)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예일대학교의 엠블럼에 새겨진 말은 ‘빛과 진리’(LUX ET VERITAS)입니다. 예일대학교 엠블럼의 맨 위에 쓰여진 것이 빛과 진리라는 말의 라틴어이고, 한 가운데에 히브리어로 역시 빛과 진리라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세상을 비추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고, 진리를 기독교의 진리(복음의 진리)입니다. 후에 그 예일대학교도 성장하면서 수학과 과학 과목을 넣자 이에 반발한 목사들이 새로운 대학을 세웠는데, 그게 1746년에 세워진 프린스턴 대학교입니다. 오늘날 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대학을 의미하는 아이비리그(Ivy League)에 속하는 처음 세 개의 대학이 모두 신학대학으로 문을 연 학교였다는 말입니다.
이 대학들이 학교 엠블럼에 진리를 뜻하는 VERITAS라 단어를 새겨넣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신학대학교에서 추구하는 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대학에서 추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입니다. 그 진리는 바로 말씀의 진리, 기독교의 진리, 복음의 진리입니다.
물론 신학대학이나 기독교에서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합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영원한 진리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진리를 찾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천재 과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90-212)가 목욕탕에서 금의 순도를 알아내는 방법을 깨달은 순간 벌거벗은 몸으로 목욕탕에서 뛰어나오면서 ‘유레카’(εὕρηκα)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유레카’라는 말은 ‘찾아냈다. 발견했다. 알아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찾아냈다는 기쁨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르키메데스가 외쳤던 ‘유레카’(εὕρηκα)를 외치고 싶어하며 진리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도 진리를 찾고 싶어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대제사장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서 붙잡히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셔서 심문을 받으신 후에 새벽녘에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던 중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한복음 18:37) 그러자 빌라도가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도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다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철학자들이 진리란 무엇인가를 논증하는 것을 읽으면서 ‘그 때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대답해 주셨다면 진리를 찾으려는 수많은 노력들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진리를 찾기 위해서 탐구하며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진리가 무엇이냐?’고 빌라도가 묻기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진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 질문을 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말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바로 전날 밤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시고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진리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 대답하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진리이신 당신이 지금 빌라도 앞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눈 앞에 두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진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는 그 무엇도, 그 어딘가에 있는 것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바르게 안내해 주는 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의 진리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으로 향하는 길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 진리를 찾아야만 인간의 유한성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는 그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문을 통해서도, 과학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진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곧 진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계심에도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진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내가 곧 진리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 계시입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시면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가시기 바로 직전에 우리에게 당신이 진리이심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이 진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왜 당신 자신을 진리라고 선포하신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뷰카(VUCA)’의 시대라고 합니다. 뷰카(VUCA)라는 말은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이라는 네 단어의 영어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4차 산업시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키워드가 바로 이 VUCA라는 단어입니다.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우리 시대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인생은 언제나 변동성이 아주 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오늘날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만 내일이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고 우리의 역사는 빠르게 변해왔고, 그 변화는 우리를 불확실성의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변수가 많아 내일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늘 새로운 선택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단지 오늘날 그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고,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해서 그 진행속도가 더욱 빨라졌다는 것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언제나 변화가 많은 불활실성 속에서, 복잡하고 모호한 삶의 여건을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시대에 우리 인간에게 분명한 길이 되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화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8)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하고 거세게 요동치는 세상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굳건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진리는 상황에 따라서 변합니다. 때에 따라서 유용하기도 하고 쓸모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결코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우리에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진리를 찾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뀐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서 학문을 탐구하고, 심지어 이교도에 빠지기도 했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더 이상 다른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참 진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이라고 일컫는 이어령 교수도 평생 지성의 순례를 해오다, 그의 딸 이민아 목사의 투병과 죽음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그의 고백은 ‘지성을 넘어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지성)으로 최고의 학문과 진리를 탐구해 왔지만, 그 지성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이 바로 영성(신앙)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순례 여정을 마무리했던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고단한 진리탐구의 순례를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책 『고백록』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참된 안식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찾아야 진실로 우리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여러분, 우리 인간이 자유를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죄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기 이전인 에덴동산에서는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순간 우리 인간은 죄의 종노릇하게 되면서 자유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아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악으로 죽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 품에 안기기 전까지 우리 인간에게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생명이 있기에
< 본문 – 요한복음 14:4-6 >
허연경 권사님이 쓰신 『아! 생명이 있기에』라는 책에 짧지만 아주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 생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이며 아름다운 것인가?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기에 지금의 헐벗고 빛 바랜 모습이 결코 초라하지 않다. 나 비록 지금 연약하고 병든 몸이지만 내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겨울철 앙상한 가지가 초라하게 보이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생명이 있어 봄이 되면 거기에서 새싹이 돋아 울창한 마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겨우내 하얀 눈이 덮인 보리밭을 보면서 한탄하지 않는 이유는 눈이 걷히고 봄이 되면 거기에서 파릇파릇한 움이 돋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작고 초라한 볍씨 한 알이 초라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생명이 있어, 그 볍씨가 움을 틔워 가을이 되면 황금물결의 추수를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새의 둥지에 남겨진 작은 새알이 결코 초라하지 않는 이유는 그 작은 새알 안에 생명이 있어 부화되면 멋진 어미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래산의 사막이, 그리고 적막한 광야가 초라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오아시스가 있고 물이 솟는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아시스와 샘물이 만물에 생명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늘 어깨를 움츠리고 살아가야 할 인생일지라도, 돈 많은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사는 그런 인생은 아닐지라도, 내 명함에 새겨넣을 경력이 없고 명함을 만들만한 인생이 아닐지라도, 건강을 자랑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존재일지라도, 우리가 결코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닌 것은 우리 안에 똑같은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신앙생활하지 못해 장로나 권사의 직분을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유창하게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가 남들 앞에 기죽을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10) 여기서 말하는 질그릇은 연약한 우리 인간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조금만 강한 힘이 밀려오면 깨어집니다. 누군가가 작은 힘으로 밀어도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기도 하고, 작은 고난 앞에서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연약하여 쓸모없는 존재라고 치부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보배’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똑같은 질그릇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똑같이 도공에 의해서 빚어진 질그릇이고 똑같은 온도에 구워진 도자기라 하더라도, 거기에 우리가 먹을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거기에 강아지 밥을 담으면 개밥그릇이 됩니다. 똑같은 질그릇이요 도자기라 하더라도 거기에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지만, 거기에 보배를 담으면 그것은 보배합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질그릇과도 같은 우리이지만, 우리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존재 가치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담고 있기에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에 우리가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있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자기 스스로 그 존귀함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존귀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몇백만 원짜리 명품백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시장바구니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명품백의 가치는 그냥 시장바구니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안고 살기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 자신을 비천하고 볼품없는 존재처럼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크신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 삼아주시고, 하늘나라 백성답게 세상의 그 어떤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주셨기에, 우리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나는 실패자야. 나는 비천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 영원한 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진리가 있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 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되신 이유는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 가운데 가장 큰 한계는 유한한 생명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울창한 나무라 하더라도 몇 백년, 길어야 2-3천 년까지 밖에 살지 못합니다. 한 자리에 머물러 사는 식물은 그렇게 몇백 년, 또는 몇천 년을 산다 하지만 움직이는 동물들은 길어야 백 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이 땅에 몇십 년, 길어야 100여 년을 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우리 인간에게, 우리가 그렇게도 갈망하는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동생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젖어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물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이 예수님의 질문 앞에 우리는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그 생명이 지금 우리 안에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걸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니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잃는다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낙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면서 좌절하고 낙심합니까?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을 잃었다는 슬픔 때문입니다. 건강을 잃는 사람은 건강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낙심합니다. 안정된 직장을 잃은 사람은 직장을 잃었다는 것에 낙망합니다. 물질에 큰 손해를 본 사람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만 같았던 물질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도했는데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는 낙심하며 때론 불평하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코로나19로 인해 팬데믹 상황에 빠진 우리는 일상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마음에 답답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금까지 가지고 누렸던 뭔가를 잃었을 때 그렇게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때로는 뭔가 내게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에도 그런 느낌을 가져 불평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가장 귀한 것이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갈지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가장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우리는 낙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있는 생명은 육체의 생명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영원한 생명까지 있습니다. 혹 육체의 생명을 잃는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다. 욥은 참 경건하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세상이 이런 사람 없다.’고 칭찬하셨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욥에게 한 순간에 시련이 몰아닥쳤습니다. 하루 아침에 엄청나게 많던 재산 다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슬퍼할 틈도 없이 큰 아들 집에서 잔치를 하던 열 명의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온몸에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슬픔과 비극을 겪을 때 자신을 위로해주고 함께 위기를 극복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마저도 욥의 아픔을 이해해 주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막말을 서슴없이 쏟아냈습니다.
욥은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잃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 10명을 한 순간에 잃었습니다. 건강도 잃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듣던 말이 있습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어버린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강만 잃은 것이 아닙니다. 명예도 잃었고, 가족도 잃었고, 나중에는 아내의 신뢰까지도 다 잃었습니다. 그야말로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욥에게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생명이었고, 그 생명을 붙들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욥기 1:22) 또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는 아내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면서 욥은 그 어떤 말로도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욥기 2:10)
여러분, 욥을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을뿐더러,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말로 죄에 빠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그가 자신에게 남겨진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불평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욥은 그 고난의 시기를 지난 후에 재산을 갑절이나 보상 받았고, 잃었던 자식들도 그 숫자만큼 다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도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생명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을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힘도 우리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왜요? 그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죽음을 이긴 생명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권능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리까지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감춰져 있는 생명만큼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생명,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아니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최고의 보배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 생명을 선물로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오아스시 곁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맑은 샘물과 야자수가 있는 그곳에서 사막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샘물을 퍼주면서 그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그네들이 물을 얻어먹고는 노인에게 감사하다며 얼마의 동전을 건네주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은 처음에 그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동전을 주는 나그네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금고에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돈을 모으는 재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노인은 나그네들에게 물과 야자수 그늘을 제공하면서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을 보니 샘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던 중, 잎이 무성한 야자수가 샘물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인은 결국 과감하게 야자수를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야자수가 사라지자 샘물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야자수 그늘이 없는 탓에 샘물은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막을 지나는 어느 나그네도 노인의 오두막집을 찾지 않았고,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 아니 누리고도 남는 것을 가지고 나그네를 섬기며 살 때 노인은 늘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샘물과 오아시스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그것을 나눌 때에는 부족함 없이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내 것인양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노인의 마음에는 기쁨을 잃게 되었고, 결국 니리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한 순간에 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 욕심이 삭트기 시작하면서 노인은 점점 욕심의 노예가 되어갔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생명, 그 은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그와 같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생명을 나눠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한복음 10:10)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순간,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생명을 풍성히 누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슴에 품은 자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기쁨과 감사와 평강 가운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이 아닌 다른 것에 욕심을 부리면서 생명의 풍성함을 잊고 살진 않습니까?
여러분, 때로 우리의 삶에서 작은 것들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던 것들이 내 곁에서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빼앗기듯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생명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좌절할 수 없습니다. 낙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새 힘을 얻어 강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무언가가 조금 사라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조금 잃었다고 풀 죽어 살지 마십시다. 우리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우리를 영원히 죽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감에 있어 모든 가능성을 보게 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게 해 줍니다.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답게 담대하게 사십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사십시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안식하며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에만 참된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조류학자가 깊은 산속에서 앵무새 둥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앵무새 새끼를 새장에 넣어 자신의 마당 한쪽의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러면 매일 아침 앵무새가 자기 새끼를 찾아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처럼, 며칠 후부터 어미 앵무새가 새끼가 있는 둥지를 찾아와서는 부지런히 새끼에게 먹이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어미 앵무새의 모정에 감동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며칠 후 아기 앵무새가 새장 안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조류학자인 그는 아기 앵무새가 죽은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어미 새가 새끼에게 날라다 먹인 것이 독이 든 과일이었던 것입니다. 어미 새는 자신의 새끼가 새장에 갇혀 있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서 독이 든 과일을 날마다 먹임으로 새끼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새는 자연 속에 있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먹을 것을 충분하게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새장 안에 갇혀 있는 한 그 새는 결코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셨고, 그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살 때 우리는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안식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참된 자유를 누리고 싶으십니까?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세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면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어,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의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의 종노릇하며 불안과 걱정 속에 살아야 하는 우리를 평안과 안식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참 진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우리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불법과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진리는 많다고.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진리는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진리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진리입니다.
어떤 랍비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란다.” 그러자 한 제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진리가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그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합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저는 랍비의 이야기를 조금 바꾸겠습니다. 진리가 길에 널린 돌멩이처럼 흔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 길에 널린 돌멩이처럼 진리는 우리 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진리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 앞에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굽혀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길이십니다. 영원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야 할 바른 길, 마땅히 가야할 참된 진리의 길이 되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이십니다. 거짓과 불의, 불법과 속임이 난무한 세상에 참된 진리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진리를 만나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참된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진리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깨달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불법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진리로 자유함을 누리고, 진리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이십니다. 영원한 진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