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부탁(Ⅲ)
                                                  (빌립보서 4:1-3)

                                                              Ⅰ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있는 형편에서 그가 너무도 사랑했던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세 가지 부탁을 합니다. 그 첫째는 빌립보교회 교인들 모두에게 “주 안에 서라”는 부탁이고, 둘째는 빌립보교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부탁이며, 셋째는 바울과 멍에를 같이 한 사람에게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는 부탁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지난 두 시간동안 첫 번째 부탁과 두 번째 부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세 번째 부탁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림에 있어 저는 먼저 오늘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말씀, 즉 바울이 자신과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복음에 자신과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 누구인가 그리고 글레멘드가 누구이고 그 외에 바울의 사역에 함께 동역한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바울이  자신과 멍에를 같이한 사람에게 여인들과 글레멘드와 자신의 동역자들을 도우라는 부탁을 했는데 그가 부탁한 도우라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오늘에 바울과 멍에를 같이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에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 사람들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도와야하는 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Ⅱ

먼저 본문에는 몇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울이 자신과 멍에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한 사람이 3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이 말씀에 나오는 ‘멍에를 같이한 자’란 헬라어로는 ‘쉬지고스(σὑζνγος)’이고, 영어로는 ‘요크-펠로우(Yoke-fellow)’입니다. 멍에가 무엇인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논이나 밭을 갈 때 소 두 마리에게 함께 멍에를 씌웁니다. 그리고 농부가 양쪽 소를 번갈아 가면서 앞으로 그리고 옆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면 두 소가 서로 발을 맞추어 나갑니다. 따라서 ‘내게 멍에를 같이한 자’란 말의 뜻은 바울과 서로 보조를 맞추며 복음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네게’는 헬라어로 ‘세(σέ)’인데 목적격 단수입니다. 사실 빌립보교회 안에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힘쓰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에게’라는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한 사람을 지칭하는 단수를 사용했습니다. 분명 바울이 “네게”라고 지칭한 그 한 사람은 빌립보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잘 해결할 위치에 있는 능력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쉽게도 바울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을 가지고 하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멍에를 같이한 자의 헬라어 단어가 쉬지고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쉬지고스를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멍에를 같이한 자라는 단어의 뜻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냥 사람 이름으로 이해하며, 빌립보교회 교인들 가운데 쉬지고스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빌립보교회의 목회자였던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위로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에바브로디도를 대신하여 빌립보교회에서 목회했던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셋째는 빌립보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 그래서 교인들의 존경받고 신뢰를 받던 루디아가 그 사람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로하기 위해 로마에 왔다가 다시 빌립보교회로 돌아간 에바브로디도가 그 사람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네 가지 주장들 외에도 다른 주장들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만, 누가 그 사람인지는 오늘에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누가 되었든 그 사람에게 바울은 여인들과 글레멘드와 그 외의 동역자를  도우라고 부탁했습니다.

둘째, 복음에 바울과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 3절 중반절에 나옵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빌립보교회는 루디아라는 여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여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남성보다 여성들이 수적으로도 많았고, 그 여성들은 교회 일에 더 적극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교회의 좋은 모습들, 즉 모이는 일도 잘하고 남을 돕는 일도 잘하며 섬세하게 교회를 섬기는 일도 잘하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향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자기 과시와 시기와 질투로 인해,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빌립보교회 안에는 여러 갈등과 분란이 있었습니다.
그런 갈등과 분란의 정점에 서 있던 두 여인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유오디아와 순두게였습니다. 분명 그녀들은 열심히 교회를 섬겼고, 그녀들의 그런 열심으로 교회가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이게 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갈등과 분란의 주도적 인물인 그녀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라는 본문에 나오는 ‘저 여인들’을 빌립보교회의 갈등과 분란의 중심에 서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그리고 그녀들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양쪽의 부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그 여인들을 도우라고 자신과 멍에를 같이한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셋째, 글레멘드라는 사람이 앞에서 읽은 3절 중반절 다음 말씀에 나옵니다. “또한 글레멘드와…”
이 말씀에 나오는 글레멘드가 누구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학자들은 세 가지로 추측합니다. 첫째는 초대교회 시절 로마교회의 감독을 지낸 사람가운데 글레멘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둘째는 바울의 여러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바울의 제자는 아니지만 바울의 선교여행에 함께 동행하며 바울을 도왔던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추측 모두 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글레멘드라는 이름이 오늘 로마에 있는 옛 무덤의 비문에 상당히 많이 적혀 있을 정도로 로마인들의 흔한 이름이었다고 하니 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글레멘드를 도우라고 부탁한 것을 보아, 우리는 글레멘드라는 사람이 분명 복음을 위해 어렵고 힘든 수고를 감당했던 사람이었을 것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 

넷째, 그 외에 나의 동역자가 앞에서 읽은 그 다음 말씀에 나옵니다.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방금 글레멘드가 이름은 나와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이름도 나오지 않는 “그 외에 나의 동역자”에 대해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더 알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의 선교여행을 도왔던 실라와 누가, 그리고 바울이 믿음의 아들로 불러준 디모데와 같은 사람들이 바울이 말한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 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도 바울은 도우라고 부탁했습니다.

                                                            Ⅲ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 바울은 자기와 멍에를 같이한 그 사람에게, 복음에 자기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과 글레멘드와 그 외에 자신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그럼 “도우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도우라”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알기 위해 먼저 도우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뜻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우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쉴람바노(συλλαμϐάνω)’입니다. 이 쉴람바노라는 단어의 뜻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붙잡다’이고, 둘째는 ‘수태하다’, ‘잉태하다’이며, 셋째는 ‘돕다’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뜻이 ‘도우라’는 단어 안에 다 중요한 의미로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단어에 담겨있는 세 가지 뜻을 가지고 ‘도우라’는 단어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도우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첫 번째 내용은  ‘놓치지 말라’입니다. 방금 ‘도우라’로 번역된 ‘쉴람바노’의 첫 번째 뜻이 ‘붙잡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붙잡는 것은 놓치지 않아야 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놓친 사람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목회를 하다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교우들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가 예수님을 온전히 닮지 못한  까닭에, 그런 교우들을 대하게 되면 속이 많이 상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미워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교우가 교회에 안 나왔으면 좋겠다거나 다른 교회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우를 잘 붙잡아 주어 신실한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파벌을 조성하여 교회 안에 갈등과 분란을 일으킬 때, 분명 바울이 자신과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말했던 교회의 지도자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권면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더 심각해졌고 상황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냥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 고민이 커집니다. 그런데 그런 형편에 처해있는 빌립보교회의 지도자에게 바울은 다시 부탁합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여인들이 서로 싸우다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그리고 신앙의 길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잘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붙잡아 주는 것이 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돕기 위해 붙잡아야 할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기회도 붙잡아야 합니다. 두 여인을 바로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니 두 여인뿐만이 아니라 글레멘드와 그 외의 동역자들을 돕는 기회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미루고 외면하다가 그 기회를 놓쳐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마음은 있어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기회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해 줄 수 있는 기회, 위로해 줄 수 있는 기회, 물질로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기회를 붙잡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도우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두 번째 내용은 ‘품으라’입니다. 앞에서 도우라로 번역된 ‘쉴람바노’의 두 번째 뜻이 ‘수태하다’, ‘잉태하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수태하고 잉태한다는 말은 품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수태나 잉태는 무엇이 전제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돕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으로 그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그 사람을 품지 않고 물질이나 몸만 가지고 행하는 도움은 자칫 자기만족이나 자기 의를 나타내는 과시적 행위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도움을 준 사람이 그 도움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자기가 행한 그 도움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게 되면, 불평의 원인이 되기도 쉽습니다. 분명 사랑으로 사람을 품어야 진정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도우라는 단어 내용은 ‘자기를 희생하라’ 입니다. 도우라로 번역된 ‘쉴람바노’의 세 번째 뜻이 ‘돕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돕는다는 것은 자기희생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자기의 시간을 희생해야 하고, 자기의 몸을 희생해야 하며, 자기의 물질도 희생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가족이나 자기의 미래까지도 희생해야 하고, 자기의 소중한 자존심까지도 내려놓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희생하지 않고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자기희생 없이 입으로만 도와주는 자세나, 다른 사람이 자기 대신 희생하며 도와주기를 바라는 자세는 바른 도움의 자세가 아닙니다. 분명 자기를 희생해야 도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도우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 사람을 붙잡고 도와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고, 그 사람을 사랑으로 품으라는 것이며, 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도우라는 부탁을 자기와 멍에를 같이한 빌립보교회의 지도자에게 했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Ⅳ

이제 이런 바울의 부탁을 우리는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고, 과거만이 아닌 오늘에도 순종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오늘에 바울과 멍에를 같이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통한 적용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와 전도사뿐입니까? 아닙니다. 목사와 전도사만이 아닌 바로 신앙인인 우리 모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신앙인이 된 사람에게는, 신앙인이 된 그 순간부터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의무와 감당해야 할 일들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작은 예수의 삶을 제대로 살았던 바울과 멍에를 같이하여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일꾼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따라하십시다. “내가 바울과 멍에를 같이한 사람입니다.”

둘째, 오늘에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통한 적용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킬 때 오늘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은 크게 둘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빌립보교회 안의 분쟁의 정점에 서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와야 합니다. 그들을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보기 싫다고 피하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꼭 붙잡아야 하고, 사랑으로 품으면서 이런 저런 희생도 감내해야 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이 교회 안에서 건강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 바울은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나의 동역자라 말한 사람들을 오늘에 적용한다면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성실하게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라 할 수 있고, 또 선교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는 선교사라 할 수 있으며, 또 목회자나 선교사는 아니지만 교회와 복음사역을 위해 여러 부분에서 사역하고 있는 사역자라 할 수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런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은 복음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외로움과 빈곤과 질병의 고통 앞에서 힘들어할 때도 있고, 또 남이 모르는 이런 저런 아픔을 겪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하고, 위로가 되어 주어야 하며, 기쁨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따라하십시다. “나에게는 교회에 아픔을 주는 자와 복음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자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셋째, 복음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이냐를 통한 적용입니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기도를 통한 도움입니다. 중보기도의 능력은 정말 위대합니다. 근대선교의 개척자로 불리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1761-1834)에게는 25세에 온 몸에 마비증상이 생겨 50년 동안 방안에서만 살아야 했던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형편에서도 매일 같이 몇시간 동안 오빠의 선교사역을 위해 기도했고, 오른손의 마비가 풀린 뒤에는 기회가 되는 대로 오빠에게 기도가 담긴 장문의 편지를 보내며 오빠를 격려했습니다. 케리의 전기를 쓴 작가는 이런 누이동생의 중보기도가 케리의 사역에 엄청난 능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하고 전문적으로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의 일을 대신 해 줄 수는 없고, 또 선교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처럼 여러분이 지금 당장 선교지에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나 선교사를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는 있습니다.
둘째, 칭찬과 격려를 통한 도움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지적하기보다 긍정적인 것을 크게 보면서 칭찬해 주면 누구라도 발전하게 되어있습니다. 또 격려는 낙심했던 사람과 포기했던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줍니다. 그러기에 격려만큼 사람을 신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 저도 지적받고 책망 받을 모습이 많은 목사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가장 정성을 기울이는 날인 주일 날, 많이 조심했고 노력했음에도 부족한 여러 모습이 제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실 저만 그렇겠습니까? 다른 목사들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목사들이 주일예배 후 집에 들어가는 것을 엄청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혼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담대히 들어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그 이유는 지혜로운 제 아내가 주일날 보였던 저의 부족했던 모습에 대한 지적이나 책망을 하시기보다는, 그래도 좋아보였던 모습을 가지고 먼저 저를 칭찬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칭찬과 격려 뒤에는 반드시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도 하시고 엄중한 책망을 하시긴 합니다만, 이미 칭찬과 격려로 마음이 넓어진 저는 그 지적과 책망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셋째, 보충을 통한 도움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족함을 보충해 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복음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의 두 가지 것을 보충해줌으로 그들도 도와야 합니다. 그 두 가지 것은 몸과 물질입니다.
우리교회가 금년에도 단기선교를 갑니다만 단기선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선교지에서 수고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단기선교 단원들은 그 동안 선교사가 혼자의 몸으로 감당하지 못했던 일들을 자신들의 몸을 가지고 보충해 줍니다. 그렇게 목회자나 선교사가 몸으로 감당하지 못했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보충해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그런 몸의 보충과 함께 우리는 또 물질의 보충을 통해  목회사역이나 선교사역을 도와야 합니다. 저는 선교사들이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로부터 물질의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들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편지들을 받고도 도움을 줄 수가 없을 때는 마음이 많이 괴롭습니다. 지난 번 조성우 선교사 부부의 선교사 파송예식 후 몇 몇 분들이 제게 조선교사 부부에게 전해주라고 봉투도 주시고 선물도 주셨는데, 그것을 전해주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선교지는 항상 물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와 칭찬과 격려, 그리고 보충을 통해 우리는 일선에서 복음을 위해 일하고 있는 분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따라하십시다. “기도와 칭찬과 격려와 보충을 통해  복음을 위해 일하는 분들을 돕겠습니다.”

                                                              Ⅴ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의 세 번째 부탁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탁을 하나님이 오늘에 자신에게 부탁하는 말씀으로 수용하여, 그 부탁을 잘 시행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3절 말씀 하반절에 나오는 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 가는 저 천국에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도왔던 복음을 위해 일했던 분들과 기쁨으로 만나고, 또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도 그 천국에서 꼭 받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