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 화평
< 본문 – 갈라디아서 5:22-24 >
다윗 왕의 신하 중에 요압이라는 장수가 있습니다. 요압은 다윗 왕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로 다윗에게는 조카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 요압은 다윗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윗의 충신이며, 동시에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요압이 언제부터 다윗과 함께 했는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을 때 요압은 다윗의 군대를 이끄는 장수가 되어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 요압이 한 일 중에 참 잘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을 화해시킨 것입니다.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 그의 배다른 누이인 다말을 겁탈하고 난 후, 다말의 친 오빠인 압살롬이 이복형 암몬을 살해하고 맙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압살롬은 외할아버지인 그술 왕 달매에게도 피신하여 3년을 머물게 됩니다. 다윗은 처음 동생에 의해 살해당한 큰 아들 암논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암논의 죽음을 차츰 잊고 압살롬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성경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몬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사무엘하 13:39) 그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왕은 암논이 죽었을 때 받았던 아픔이 차츰 가시면서 압살롬에게 품었던 노기도 풀렸다.” 3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큰 아들 암논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가시게 되었고, 큰 아들을 죽인 압살롬에게 품었던 화가 풀리면서 암살롬이 보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윗 왕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요압 장군이었습니다. 이어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사무엘하 14:1) 말씀드렸던 것처럼 요압은 다윗의 조카입니다. 아마도 다윗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요압이 다윗 왕의 속마음을 읽어낸 것입니다. 처음 암논이 죽었을 때에는 압살롬을 향하여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런 마음이 풀렸고, 이제 압살롬을 너무너무 보고싶어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한 가지 꾀를 냅니다. 드고아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을 데려다가 과부처럼 위장하게 해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저는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을 키워왔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들에서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동생을 죽인 내 큰 아들을 살인자라 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만일 그 아들마저 죽는다면 우리 집안에는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 사람들이 그 남은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왕의 배려에 감사하며 그 여인은 다윗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자비로운 왕께서 어찌하여 내쫓긴 아들을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십니까?” 다윗 왕은 그 여인이 요압이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고서 요압을 불러 아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술에 있던 아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음에도 자신을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보고 싶은 아들이지만, 형을 죽인 죄를 뉘우치고 자숙하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 왕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음에도 2년 동안이나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압살롬은 요압 장군을 불러 ‘이렇게 푸대접을 할거면 그술에서 잘 살고 있는 나를 왜 불러들인 것이냐?’고 항의를 합니다. ‘만일 내가 죽을만한 죄가 있고, 아버지가 그 죄를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요압은 다윗 왕을 찾아가서 압살롬을 왕 앞에 부르도록 간청을 하게 되고, 다윗 왕은 아들 압살롬을 5년 만에 재회하게 됩니다. 5년 만에 만난 다윗 왕과 압살롬의 만남을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사무엘하 14:33)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을 만나 입맞추었다는 말은 그를 완전히 용서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만일 요압 장군이 기지를 발휘해서 다윗 왕과 아들 압살롬을 만나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다윗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 이후의 상황은 안타깝게도 비극적으로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 결국 아버지를 배신하고 반역을 일으키고 맙니다. 아들의 반역에 다윗은 왕궁과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도망쳐야 했고, 다윗을 따르던 요압의 군대와 압살롬을 따르던 군대 사이에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결과는 요압 장군의 승리였습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압살롬은 요압 장군의 창에 심장이 찔려 전사하고 맙니다. 비록 아비를 배신하고 반역을 일으킨 아들이지만,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다윗은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아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사무엘항 28:33)
왜 요압이 압살롬을 굳이 창으로 찔러 죽였는지 그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순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힘들게 다리를 놓아주었음에도 압살롬이 그런 자신의 노력에 보답하지 않고 아버지를 배신한 것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흔히 요압을 가리켜서 ‘다윗보다 다윗의 마음을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에 대해서 다윗이 복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요압이 대신 복수를 해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넘겨주면서 ‘요압을 반드시 죽이라’고 유언을 합니다. 물론 그를 죽이라고 한 이유가 압살롬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쓸데 없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에 비추어 본다면 아들 압살롬을 죽인 것에 대한 다윗의 원한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요압 장군은 다윗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신하였습니다. 때로는 요압이 부담이 될 정도로 그가 큰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요압 장군의 기지로 5년 만에 아들과 만나게 되었고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윗은 평생 그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요압 장군이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해 줌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치 않게 누군가와 사이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과 압살롬처럼 어떤 힘든 사건을 계기로 해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오해로 인해서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작은 갈등이 엄청난 벽이 되어 평생 원수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그런 상황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이 침해된다는 생각 때문에 누군가와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에 감정이 상했다는 이유 때문에 두터운 벽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로 인해 힘든 일을 내가 겪어야 한다는 오해 때문에 골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와 그런 갈등과 깊은 골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갈등이 갈등으로 남아서는 안 되고, 벽이 벽으로 남아서도 안 됩니다. 누군가와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겼다면 반드시 그것을 메워 좋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갈등의 당사자, 깊은 감정의 골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극복해 내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둘 사이를 화해시켜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에게 요압 장군은 아들과 화해하는데 있어서 일등공신을 한 은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 사이의 갈등과 멀어진 깊은 골을 메우기 앞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깊은 골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누렸던 아름다운 교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에베소서 2:12-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이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렇습니다. 범죄한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세상에서 구원의 소망조차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님과 우리가 화평의 관계로 회복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1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을 헐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화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화평을 누리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평을 누리를 수 있을까요? 바로 이어서 로마서 5:2절에서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은혜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곧 평화입니다. 구약성경 언어인 히브리어로 화평 또는 평화를 가리키는 말이 샬롬(שלום)입니다.이 샬롬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일상적인 인사입니다. 우리가 만나면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잘 지내고 계시죠?’라고 인사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만나면 ‘샬롬’하고 인사를 건넵니다. 단순히 만났을 때만의 인사가 아니라, 힘들고 슬픈 일을 만났을 때 위로하는 인사말도 ‘살롬’입니다. 샬롬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평화, 평강, 화평, 평안’ 등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주창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의 권력에 의해서만 평화가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힘에 의해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부흥되고, 국민들이 평안하고,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로마가 절대적인 힘으로 그 평화의 키를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복음 14:27-표준새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평화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평화, 하늘나라의 평화입니다. 로마제국은 자기들의 힘으로 만든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자기들의 말을 잘 듣고, 자기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평화로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런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유지되는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시기 바로 앞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시면서 평화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주님의 평화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평화, 화평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세상의 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들도 평화가 세상의 힘에 의해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부강해야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나라가 부강해야만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세계 강대국이라고 말하는 나라들만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고 부유해야만 평강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부유해야만 평강을 누릴 수 있다면 세상에 부를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평강를 누리지 못한 채 늘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속앓이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가진 자들보다 더 평화와 평강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뭔가 힘을 가져야만 평화를 누리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화평)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 영혼이 진정한 평화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죄악에 매여 사는 사람, 죄악에 종노릇하며 사는 사람은 그래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도 원래 죄의 종노릇하며 평안을 잊은 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죄의 사슬을 끊고 우리로 죄에서 해방된 구원의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살 때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평화의 두 번째 모습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는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 용서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마음에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해 마음에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삶의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순교의 현장에 서더라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도록’(로마서 8:28) 역사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두렵거나 걱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평화의 세 번째 모습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 그것이 바로 평화요 화평입니다. 에베소서 4:3절에서 말씀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평안이라는 줄을 가지고 하나로 묶어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할례자와 무할레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자유자와 종, 주인과 노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 부르셨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묶는 줄은 바로 평안입니다. 샬롬입니다. 평화요 화평이요 평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화평한 관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힘써 지키라”는 말씀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평화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평을 누리는 것은 노력과 희생과 수고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 ‘화평게 하는 자’라는 말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됨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보십시다. 나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분란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거기에 있음으로 그곳에 평화가 넘쳐나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어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갈 때 만들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정욕과 탐심에 끌려 살면 거기에는 반드시 다툼이 생겨나고 분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나의 욕망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성령께 온전히 맡길 때 나를 통해서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성령의 은혜 안에 온전히 거할 때 내 마음에도 평안이 깃들일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도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주님이 주시는 화평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화평(평화)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