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원수
                                                  (빌립보서 3:18-19)

                                                              Ⅰ

여러분! 원수라는 말의 뜻을 아시지요? 원수란 ‘자신이나 자신과 관계된 사람과 단체와 사물에게 해를 끼치어 원한을 갖게 한 사람이나 단체나 사물’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원수는 대적해서 물리쳐야 할 대상이고,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싸워서 박살내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남한이나 미국을 대적해야 할 그리고 박살내야 할 원수로 여기고 있는 북한에서는, 남한이나 미국에 대한 적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본래 표준말로 사용했던 원수대신 원수의 수자를 센 소리인 쑤자로 표기하며 원쑤를 표준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도 이 원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은 진리의 원수, 천국의 원수, 예수님의 원수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대로 원수는 대적해서 물리쳐야 할 대상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말 안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런 사람들을 대적해서 물리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지금부터는 요약해서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하겠습니다만 오늘은  그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며 신앙인이라 하는 우리를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Ⅱ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살펴봄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원수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교회 밖의 사람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라 했으니, 그들은 분명 신앙이 없는 교회 밖의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물론 교회 밖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부인하며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십자가의 원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그런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말씀을 포함한 빌립보서의 모든 말씀은 교회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 해석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본문 말씀에 나오는 십자가의 원수를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 그리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신앙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큰 고민은 교회를 복음으로 세워주고 신자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바르게, 교육하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그런 지도자가 부족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이 교회 저 교회로 바쁘게 다니면서 신자들을 가르쳤고 교회를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교통의 불편함과 시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들은 모든 교회를 자주 방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초대교회에서 인정해 준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스스로 교회를 방문하여 자기가 기독교 신학과 신앙을 잘 안다하며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그릇된 신앙의 내용을 가르치는 잘못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잘못된 사람들의 가르침은 십자가의 복음을 훼손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 잘못된 사람들의 가르침으로 초대교회에 이단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초대교회가 바른교회가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 그릇된 신앙지도를 하는 사람들로 인해 발생한 이단 문제와 함께 당시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렇게 교회에 지도자가 없다보니, 교회 안에  그릇된 신앙의 목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즉 십자가의 정신으로 신앙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신자들 가운데에는 신앙의 목적을 오해하며 신앙생활하는 신자들도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초대교회가 바른 신자를 길러내기 위해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의미도 오해하는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에는 아직 신앙이 바로 서지 못한 신자들이 그런 잘못된 사람들, 즉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고 그릇된 신앙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복음과 신앙을 오해하여 잘못된 신앙의 내용과 자세를 신자들이 갖게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동안에도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18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여러 번에 걸쳐 그런 잘못된 사람들을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잘못된 사람들에게 미혹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럼 잘못된 사람들에게 미혹된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본문에서 그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이니 그들을 따르지 말고 대적하라는 말을 눈물로 간곡하게 한 것입니다

                                                              Ⅲ

그럼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었던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말한 교회 안에 있었던 십자가의 원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훼손시키는 이단을 전파하는 자들입니다.

초대교회의 이단에는 크게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단들은 모두 다 유대교,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교에서 강조했던 율법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초대교회의 이단이 유대교와 관련이 있는 이유는 기독교의 뿌리가 유대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이단 중 첫째는 구원이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야 받을 수 있다는 그런 주장을 했던 이단입니다.
빌립보서 강해 31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던 3장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바울은 이 말씀에서 신앙인이 만나서는 안될, 그리고 따르면 안될 것을 삼가야 할 세 부류의 사람들을 지명합니다. 첫째는 개들, 즉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입니다. 둘째는 행악하는 자들, 즉 잘못된 신앙임에도 그 신앙이 옳은 줄 알고 열심을 다해 따르면서 진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몸을 상해하는 일을 강조하는 자들, 즉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는 부족하다 하며 할례와 같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세 번째 몸을 상해하는 일을 강조했던 자들이 바로 방금 말씀드린 초대교회 안에 있던 이단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르친다하며 초대교회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십자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를 말하기는 하였지만,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고 율법의 규범도 유대교에서 지켰던 것처럼 잘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주장은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구원의 완전조건임을 무시하는 반복음적 이단사상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보면서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방법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치루신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구원의 완전조건임을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십자가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인간은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 은혜를 믿는 믿음 외에 그 무엇도 구원을 받는 일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기독교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구원받는 일에 십자가 은혜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있다면, 그런 사람이나 교회는 잘못된 사람이고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이나 교회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두 개의 큰 이단 가운데 또 하나의 이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 율법의 금지조항 같은 것은 무시하고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주장을 했던 이단입니다.
이 이단은 초대교회 시대에 널리 퍼져있던 영지주의가 갖고 있던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고대 혼합종교사상 가운데 하나로 헬라어로는 지식을 뜻하는 단어인 그노시스(γνῶσις)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노스틱시즘(Gnoticism)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의 영지주의는 이원론이라는 사상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이단에 대해 바로 알려면 초대교회시대의 영지주의 사상인 이원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시대의 영지주의 사상인 이원론은, 우선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영혼은 언제나 선하고 깨끗하나 육체는 본래 악하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악한 육체가 죄를 더 짓는다고 해서 인간의 육체는 더 더러워지지도 않고, 그 육체의 죄 때문에 언제나 선하고 깨끗한 인간의 영혼이 더럽게 되지도 않으며, 인간이 더 악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초대교회시대의 영지주의 사상인 이원론의 내용인데,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복음과 이원론을 혼합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을 믿어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혼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면 되고, 율법의 금지사항 같은 것을 무시하고 육체는 욕망에 따라 살아도 된다고 신자들을 미혹했습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이것은 기독교의 신앙과 어긋난 이단사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혼만 구원받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속량 받게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신앙인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깨끗하게 지켜야 하고, 영혼과 육체를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성도가 된 신앙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분명 영혼이 구원받았으니 육체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있다면, 그런 사람과 교회는 이단자이고 이단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이단자나 이단교회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두 개의 이단이 초대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분명 그런 이단들은 모두 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무시하고 훼손시킨 십자가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십자가의 원수인 이단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최종을 멸망으로 종결시키십니다. 19절 말씀가운데 첫 번째 문장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렇습니다. 이단이 아무리 큰 세력을 갖고 있다 해도 이단은 결국 멸망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그런 이단에 미혹되어 멸망당하는 일이었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그들에게 이단을 전파하는 십자가의 원수를 대적하여 물리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둘째,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19절 말씀 가운데 두 번째 문장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 이 말씀에 나오는 ‘그들’은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리고 신은 헬라어로 ‘데오스’(θεὸς)인데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는 헬라어로 ‘코일리아’(κοιλία)인데 사람의 창자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 문장의 뜻은 십자가의 원수들의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욕망, 즉 자기들의 육체적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 중에는 자기의 배에 만족을 주는 육체적 욕망을 신으로 섬기며, 그 육체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자가 되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그리고 육체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의 배에 만족을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들, 즉 돈과 명예와 쾌락을 신으로 섬기며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적 욕망을 이루는 일에 신앙이 방해가 되고 부담이 되면, 주저하지 않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런 자기만을 우선하고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신앙은 절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분명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려는 내용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목적 역시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영광을 얻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4장 7절과 8절에서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바울의 말씀 그대로 신앙은 내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수단으로 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내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육체적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이나 신앙을 수단삼아 자기 영광을 얻으려는 사람은,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어서 교회 안에서 큰 직분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기독교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십자가의 원수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19절 세 번째 문장입니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이 말씀에 나오는 부끄러움은 헬라어로 아이스퀴네(αίσχύνη)인데, 그 뜻은 벌거벗는다 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원수가 신앙을 이용해서 얻게 된 세상적 영광을 벌거벗겨 부끄러움을 겪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그런 부끄러움을 겪지 않는 참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신앙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고 있는 십자가의 원수를 대적하고 물리치라는 부탁을 눈물로 했던 것입니다.

셋째,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19절 말씀 마지막 문장을 읽겠습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여러분! 말씀에 나오는 땅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고 땅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땅은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본능을 말합니다. 그리고 물질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땅의 일이란 세상의 일, 육체의 본능을 따르는 일, 물질을 추구하는 일, 육신을 위한 일을 말합니다. 따라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그런 세상의 일이나, 육체의 본능을 따르는 일이나, 물질을 추구하는 일이나, 육신을 위한 일들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실 사람들을 나눌 때 사람은 땅의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과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땅의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땅의 기준이 인생의 기준이 된 까닭에 당연히 땅에 합당한 땅의 사람이 되고,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늘의 기준이 인생의 기준이 된 까닭에 당연히 하늘에 합당한 하늘의 사람이 됩니다.
또 사람들을 나눌 때 사람은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하늘의 일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으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땅의 것만을 많이 가지려하고, 땅의 사람들만을 의식하며 살고, 땅에서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하늘의 것을 많이 가지려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고, 하늘에 자기 이름이 기록된 것에 즐거워합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언제나 하늘 기준을 가지고 하늘의 일을 생각하며 사는 신앙인이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땅의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있겠고, 땅의 것만을 전부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의 영광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절 말씀을 통해 신앙인인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아마도 빌립보교회 교인들 중에 땅의 것만 추구하며 사는 그런 십자가의 원수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사는 당신들이 십자가의 원수이니 십자가의 원수 된 모습에서 빨리 돌이켜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 천국의 영광을 얻는 진정한 인생 승리자가 되라고 눈물로 말했던 것입니다.

                                                              Ⅳ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이단을 따르고 전파하는 자,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자, 그리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가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진리의 원수, 천국의 원수, 예수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원수가 된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신앙의 열조가 오래되고 교회 안에서 큰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고,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영광은 결국 부끄러움이 되며, 그 사람들이 영원을 보낼 장소는 절대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묻습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이 혹시 십자가의 원수가 아닙니까? 진정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바른 신앙을 소유하여 이단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는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 신앙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추구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신앙생활하며 사는 사람이, 십자가의 사람이고 십자가의 군병입니다. 그런 십자가의 사람, 그런 십자가의 군병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