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야와 예레미야
< 본문 – 예레미야 26:20-24 >
제가 지난 2016년도에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 사도가 당시 땅끝이라고 알려진 스페인의 갈리시아(Galicia)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전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된 것처럼, 야고보 사도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순교를 당하기 직전에 스페인 갈리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교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설에다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발견된 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길을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이라고 합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발음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걷는 길이 ‘프랑스길’이라고 알려진 코스입니다. 스페인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프랑스 남쪽 ‘생장 피에 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라는 곳을 출발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쪽 지방을 거쳐 대서양이 가까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길입니다.<지도1> 두 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은 ‘포루투갈길’입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Lisbon)을 출발해서 포르투갈을 거슬러 올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약 680km의 길입니다.<지도2> 그리고 세 번째 길은 북쪽길, 또는 해안길이라고 불리는 코스입니다. 프랑스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이룬(Irun)이란 곳에서 출발해서 대서양 연안을 끼고 약 880km를 걸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길입니다.<지도3> 길이 많이 험하지만, 험한 만큼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길입니다. 네 번째 길은 ‘은의길’이라 부르는 코스입니다. 스페인 남쪽 세비야(Sevilla)에서 출발해서 스페인을 가로질로 약 1,000km를 걷는 길입니다.<지도4> 이렇게 네 개의 코스가 가장 잘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지도5>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 네 코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아주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지도 6>
이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특징입니다. 내가 가는 길, 또는 내가 가본 길만이 진짜 순례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모든 것에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방성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에서 개방성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길을 통해서 산티아고 데 콤폴스텔라까지 약 800km를 가는 여정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28일 만에 가기도 하고, 저처럼 34일에 걸려 가기도 하고, 더 천천히 어떤 사람은 40일을 작정하고 가기도 합니다. 며칠을 걸려 가든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면 됩니다. 800여km를 가던 도중 어디에 머물든 상관이 없습니다. 빨리 걷은 사람은 하루에 5-60km를 걷기도 하고, 5-10km만 걸어도 됩니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설 때에도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 6시에 출발하는 사람도 있고, 7시나 8시가 넘어서 출발해도 됩니다. 아침에 같이 출발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빨리 걸어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는 사람도 있고, 같은 일행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늦은 오후나 밤 늦게 도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디에 머물든 상관이 없습니다. 텐트를 지고 가서 야영을 해도 되고, 공립 알베르게에 머물거나 사립 알베르게에서 숙박해도 됩니다. 몸이 너무나도 피곤해서 좀 편안히 쉬고 싶은 사람은 호스텔이나 호텔에 머물러도 됩니다. 밥을 해 먹어도 되고 식당이나 숙소에서 사서 먹어도 됩니다. 배낭 속에 넣는 것도 다 다릅니다. 배낭의 무게도 다르고, 어떤 사람은 그 배낭을 직접 메지 않고 택배로 다음 목적지로 보내고(당나귀 서비스) 자신은 가볍게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배낭을 메지 않고 걷는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왜 당신은 배낭도 메지 않고 순례길을 걷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순례길을 시작했다고 해서 한꺼번에 800여 km를 다 가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올해에 한 주만 걸은 후에 시간이 나면 나머지를 걷기도 하고, 몇 년을 계획하고 걷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치 좋은 코스만 골라 걷기도 학, 중간에 차를 타고 건너뛰기도 합니다. 또 가다가 건강이 좋지 않든 무슨 이유든 가던 길을 포기해도 됩니다. 실제로 프랑스길 800km를 다 걸은 사람은 1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85%는 어떤 이유로든 다 걷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다 걷지 못한 사람을 향해 실패자라거나, 포기자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는 방법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이 다르고 자유스럽지만, 목적지는 동일합니다. 모두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입니다. 그 목적지에 도달하든 도달하지 않든 상관은 없습니다. 단지 목적지는 같다는 것만 동일할 뿐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마치 순례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와 첫 번째 예배에서 드린 말씀의 제목이 ‘순례길 인생’이었습니다. 순례길은 자유입니다. 각자가 길을 걷는 방식이 다릅니다. 목적지만 같을 뿐 거기까지 가는 방법이나 시간이나 모두 다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야 할 목적지는 같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순례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가야할 길은 다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의 형편도 다르고, 각자가 겪어내야 할 시련도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두 명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이라고 소개된 우리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예레미야입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둘 다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거짓 예언자들도 등장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참 선지자들보다 거짓 예언자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예레미야 23: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선지자나 제사장은 백성들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사악함에 빠졌습니다. 이어서 23: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죄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너희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너희가 평안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선지자들은 죄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평안할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죄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재앙은 임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그들에게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예언한 이유를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에스겔 13:19)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 평안을 예언하고 잘 될 것이라고 말해 주면 백성들이 기분이 좋아서 그들에게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건네 줍니다. 얼마 되지 않은 그 먹거리를 얻어 먹었다는 것 때문에 거짓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뇌물을 받아 거짓 예언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겨우 한 끼 식사밖에 되지 않은 작은 것을 얻어먹고서 거짓말로 예언을 해 줍니다.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렇게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해서도 거짓 예언을 서슴지 않던 시대에 우리야와 예레미야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남 유다의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주전 609년 이스라엘은 극심한 혼란 중에 있었습니다. 선정을 베풀고 나라를 부강하게 이끌던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와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 유다 백성들에게는 큰 충격일텐데,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아하스마저 왕이 된지 불과 3개월 만에 애굽 왕 바로 느고에 의해서 폐위 당하고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은 여호야김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남 유다는 이제 강대국 애굽의 압력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애굽의 눈치를 보고 애굽 왕에게 잘 보여야 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고 나라를 멸망시키시겠다.’고 말입니다.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성전이 파괴되고 자신의 나라가 멸망당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여호야김 왕과 유다 백성들은 그 말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지켜 평안케 하실 것이라고 외치던 거짓 선지자들은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고관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을 말려 예레미야를 죽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야까지 합세해서 ‘이 성읍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당연히 여호야김 왕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외친 우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리야는 두려워서 애굽으로 도망을 갔고, 여호야김을 사람을 보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고와 칼로 죽이고 맙니다. 우리야를 죽인 여호야김이 우리야와 동일하게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를 죽일 것은 눈에 보듯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도록 도와줌으로써 예레미야는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리야와 예레미야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처럼 백성들에게 거짓 평안을 외친 것도 아니고, 여호야김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어용 선지자 노릇한 것도 아닙니다. 모두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져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두 사람인데, 우리야는 죽임을 당하고 예레미야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동시대에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는데 왜 우리야는 죽임당하고 예레미야는 죽임당하지 않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예레미야의 생명만 보호해 주시고 우리야의 생명은 보호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후에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두려워서 애굽으로 도망을 갔던 비겁한 선지자이기에 죽음을 맞았고, 예레미야는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을 보호받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바른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여호야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우리야나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할 때 예레미야라고 두렵지 않았을까요? 애굽으로 도망친 것이 문제였다면,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얼마 되지 않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애굽으로 내려가도 되겠느냐?’고 물은 후에 간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애굽에는 나일강 하류를 중심으로 한 풍부한 곡창지대가 있어 먹을 것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단 한 마디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야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죄가 되어 우리야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야는 죽음을 당하고 예레미야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야가 여호야김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데도 우리야를 보호하지 않으셨을까요? 아히감의 손을 통해 예레미야를 보호해 주신 것처럼 우리야도 보호해 주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앞서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우리 인생은 순례길입니다. 그 순례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각자 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다른 방법, 다른 모습으로 걸어도 아무도 ‘왜 그렇게 걷느냐?’고 묻거나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게 그가 걷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합니다. ‘나는 이렇게 힘든 길을 가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가느냐?’고 말입니다. ‘내 인생의 짐은 이렇게 무거운데, 저 사람의 짐은 왜 저렇게 가볍느냐?’고 말입니다. ‘나는 지지리도 가난하게 사는데 왜 저 사람은 넉넉하고 풍요롭게 사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모두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다르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법이나 내용도 모두 다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슷한 길을 간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서는 모두 각각 다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도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가야할 길이 있고, 요한이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사도였지만 그들에게 주신 사명이 달랐고, 가야 할 길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지만,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고 늙도록 살다가 죽었습니다. 왜 베드로는 일찍 순교했느냐고, 왜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고 늙도록 살다가 죽었느냐고 그 이유를 따질 수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가는 길도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사명도 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야와 예레미야가 가는 길이 다를 뿐입입니다.
그걸 가지고 왜 한 사람만 사랑하느냐고 물을 순 없습니다. 왜 우리야는 보호해 주시지 않았느냐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야와 예레미야, 그 두 선지자가 가야할 길이 달랐을 뿐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 선지자냐고 물을 수도 없습니다. 두 선지자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 죽은 우리야가 더 위대한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죽임당하지 않은 예레미야가 더 위대한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이 달랐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오늘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모두 각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연세가 많고 어떤 분은 아직 젊은 나이입니다. 어떤 분은 건강하지만, 어떤 분은 겨우 교회당에 나오실 정도로 몸이 약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한 주간 평강 가운데 사시다가 오신 분도 있지만, 어떤 분은 치열한 전투와 같은 삶을 살다가 오신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찬송하는 하는 것처럼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그렇게도 무겁느냐’고 불평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갈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겨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주신 것처럼 우리 각자가 받은 사명도 다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목적지는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모두 다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도 다르고, 우리가 걷는 시간도 다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속도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모두 다른 삶의 길과 방법과 속도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일찍 순교한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고, 늙도록 살다가 죽은 요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여호야김의 칼에 죽임당한 우리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고, 아히감의 손을 통해 보호해 주신 예레미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더 사랑하셨기에 보호해 주시고, 우리야를 덜 사랑하셨기에 여호야김의 칼에 죽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묵묵히 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일찍 거두어가시든, 아니면 늙도록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시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지금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길을 기쁨으로 달려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걸음마다에서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혹 삶이 힘드십니까?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드냐고 불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힘든 삶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시는 손길을 느끼며 사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면 좋을텐데, 어리석은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왜 예레미야는 보호해 주시면서 우리야는 일찍 죽게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외친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선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다를 뿐입니다. 다른 길을 가지만 우리를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 가십시다. 기쁨으로 주어진 사명의 길을 달려 가십시다. 비록 남들과 다른 길을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