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나신 이야기

 

요 3:1-15

 

  세상에서 가장 비싼 한 끼 식사는 무엇일까요? 그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세계적인 투자가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입니다. 이분은 재미있는 제안을 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는 점심식사를 경매에 내놓고, 그 수익금은 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식사 장소는 뉴욕의 스테이크 식당 ‘스미스 앤드 월렌스키’로 하고, 낙찰자는 식사를 하면서 투자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2000년부터 경매가 시작됐는데, 그해 낙찰가가 2만5000달러(3200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262만6411달러(35억 45백만원)였고, 코로나 직전 2019년에는 457만달러(59억원)나 됐습니다. 코로나로 2년 중단 됐다가 금년 6월에 다시 재개됐는데, 놀랍게도 1900만 달러(246억 원)에 낙찰 됐습니다. 한 끼 식사 값이 무려 246억원이나 된 것입니다.

  저는 참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식사 한 끼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내는 사람은 누구며, 또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그 큰 돈을 내고 낙찰을 받았을까요? 도대체 워렌 버핏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큰 돈을 써가면서라도 함께 식사하며 만나고 싶어 할까요? 과연 식사하며 대화를 마치고 돈이 아깝다고 후회하지 않았을까요? 참 놀라운 만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워렌 버핏과의 만남보다 더 놀라운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비록 비싼 돈을 내고 함께 식사하는 만남은 아니지만, 그 어떤 사람들 사이의 만남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차원이 다른 만남입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당대 최고의 율법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이 사람을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라는 말은 ‘아르콘’(άρχων)이란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아르콘은 당시 권력층 사람을 지칭할 때 쓰던 말입니다. 실제로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사회의 최고위 권력층인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2절 말씀에 나오는 “밤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몰래”라고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남모르게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왜 밤에 몰래 찾아왔을까요?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감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는다면, 산헤드린 공회원 자격을 박탈당할 것은 물론이고,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 위험을 무릎 쓰고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자칫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주님을 만나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만남은 돈 내고 만나는 워렌 버핏과의 만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Why)

 

   그러면 니고데모는 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그 답은 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 배우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당시 최고의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누구에게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니고데모에게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꼭 알고 싶은데 알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 모든 책을 다 찾아봤을 것입니다. 알 만한 사람도 찾아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됐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시고,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산헤드린 공회원인 자기가 예수님을 찾아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가 쌓아온 그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을 만나서 배움을 청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남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워렌 버핏과의 만남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금년도 낙찰자는 이름을 밝히기 원치 않아 익명으로 처리됐습니다. 그런데 2019년 낙찰자는 457만달러(59억원)에 낙찰을 받은 암호화폐 트론의 CEO 저스틴 선이라는 사람입니다.

  기자가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느냐고 묻자, 주로 암호화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고 답했습니다. 암호화폐를 개발해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버핏의 생각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투자자가 볼 때 암호화폐의 미래가 어떤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낌없이 거액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그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배움을 위해 그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부러웠습니다.

   니고데모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정규교육과정을 밟은 랍비였고, 또 그런 랍비를 가르치는 랍비 중의 랍비였습니다. 그리고 나이도 50이 넘어 유대사회에 존경받는 어른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못했고, 나이도 이제 30밖에 안 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배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배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잃는 위험도 감수할 수 있고, 이제 자존심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배움에 대한 놀라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니고데모를 기꺼이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남다른 이 배움의 열정을 귀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으셨던 영적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지식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 얻게 됩니다. 영적인 지식은 더 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무엇?(What)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셨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큰 랍비였지만 이런 말씀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특히 거듭난다는 말은 정말 상상도 할 수없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모태에서 또 한 번 태어나는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7-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 거듭남이라는 말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세상 나라의 말이 아니고, 바람처럼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요, 영적인 개념입니다. 세상 나라의 언어로, 육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람이 육으로 나는 것이 있고, 또 영으로 나는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란 육으로 난 뒤에, 다시 영으로 한 번 더 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육과 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선 ‘육’이라는 말은 성경원어 ‘사르크스’(σάρξ)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사르크스의 원 뜻은 ‘살’(flesh) 다시 말하면 이 몸뚱아리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이 사르크스를 인간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욕망에 휘둘리고 죄 짓기 쉬운 연약한 인간을 가리킬 때 주로 이 말을 씁니다.

   다음으로 영이란 무엇일까요? ‘영’이라는 말은 성경원어 ‘프뉴마’(πνυμά)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프뉴마의 원 뜻은 숨, 바람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이 프뉴마를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관계를 맺는 속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과 소통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영적 인간을 가리킬 때 주로 이 말을 씁니다.

 

  새는 알에서 태어납니다. 어미 새가 둥지에서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부화되어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아직 날지 못합니다. 어미가 먹이를 날라다 주면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날개에 힘이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면 어미처럼 날개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이렇게 볼 때 새는 두 번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알에서 부화되는 것입니다. 생명체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처음 날갯짓하며 하늘로 나는 것입니다. 비로소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태어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선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납니다. 부모의 양육을 어른으로 자라갑니다. 아직 영이 아니고 육일뿐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됩니다. 드디어 영으로 나게 된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이런 것입니다. 육으로 태어나 살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본성으로 세상나라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이 영이 깨어나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보지 못하던 영이신 하나님을 영적인 눈으로 보고, 과거에 듣지 못하던 하나님의 음성을 영적인 귀를 열어 듣게 됩니다. 마치 새가 하늘을 날게 된 것과 같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새 중에 날지 못하는 새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타조, 호주의 에뮤, 우리 주변의 닭 같은 새들입니다. 날개가 있어도 그 날개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날지 못하고 땅만 보고 새이면서도 걷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그 영이 기능을 멈췄습니다. 마치 타조날개처럼 그냥 모양만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그저 세상나라만 보고 살아갑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 거듭남의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남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남을 체험해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으로 영으로 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How)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본문 8절에서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발달 단계를 따라 자라갑니다. 1년 쯤 되면 걷습니다. 또 1년 쯤 더 지나면 말도 곧잘 합니다. 그렇게 어린이가 되고, 또 청소년, 청년으로 자라갑니다. 누구나 이렇게 변해갑니다.

   그러나 육으로 난 사람이 이렇게 영으로 난 사람으로 변해가지 않습니다.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인 사람도 그저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영으로 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성령을 받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받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잠자고 있던 우리 영을 깨우십니다. 우리 영이 작동할 수 있게 하십니다. 힘도 주시고, 은사도 주십니다. 드디어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찬 85장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예수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나를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예수를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에 기쁨이 솟구칩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좋다고만 말합니다.

   영으로 난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리고 이 찬송을 부를 때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영으로 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예수를 생각해도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 예수 믿고 그 이름을 불렀지만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미국의 한인교회에 한 집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교회에 와서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예배 준비를 합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제일 끝까지 남아서 정리하고 돌아갑니다.

  한 번은 목사님께서 예배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마침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 집사님 가정을 만났습니다. 너무 고맙고 귀해서 격려하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멀죠?” 사실 이 가정은 두 시간 넘게 운전하고 교회에 옵니다.

  이 집사님 답이 “아니요 교회는 멀지 않습니다.” 조금 뒤 덧붙여서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집은 머네요”

 

   예배드릴 생각으로, 주님을 섬길 생각으로 교회 올 때는 그렇게 먼 교회가 하나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후 집으로 갈 생각을 하니 집은 멀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주님 만날 생각하면 아무리 먼 거리도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생각에 아무리 시간이 들어도 짧게만 느껴집니다. 주님께 드릴 생각을 하니 아무리 큰 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거듭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거듭나서 영으로 난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가르쳐주셨고, 오늘 이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영으로 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으로 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고,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늘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