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
합 1:1-4
우리가 살다보면 생각대로 되는 일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했는데 바라는 대로 응답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또한 예고 없이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척이나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그렇게나 많은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내게 이런 고난과 역경이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사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가 겪는 사건보다도 그 사건에 대한 이해부족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해가 돼서 머리가 끄덕거려지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힘이 들지 않은 일이어도 이해가 안 돼서 머리를 썰레썰레 흔들게 되면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게 되는 사건을 잘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는 자기가 겪게 된 사건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는 신앙인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선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하지 못해 몸부림치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 문제입니다. 하나는 왜 거룩한 길을 걷고 있는 의인들은 힘들게 살고 있는데, 불의한 길을 걷고 있는 악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 택하신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나라들에게 정복당하고 지배를 당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개인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는 공동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문제로 몸부림치면서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로 힘들어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소중한 길을 안내해 줍니다.
“여호와여!”
2절을 보면 “여호와여”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은 대부분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인생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으로 믿음의 조상에 걸맞은 이름이고,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으로 초대교회 영적 지도자로서 걸맞은 이름입니다.
본문의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어떨까요? 이 하박국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는 ‘하바크’(חבק)라는 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하바크는 히브리어 동사 ‘아바크’(אבק)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 아바크는 ‘씨름하다’, ‘몸부림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이란 이름은 몸부림치는 사람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와 씨름하는 그 모습에 걸맞은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붙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주에 [메이즈랜드]라는 미로공원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미로가 가장 길다는 공원입니다. 입구로 들어가면 어디로 가야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로가 펼쳐집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출구로 나오게 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빠르면, 10분, 늦으면 한 시간도 넘게 걸리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높은 곳에서 보면 길이 다 보입니다. 만일 길이 다 보이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묻고 그 사람이 길을 안내해 준다면, 3분 안에 입구에서 출구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이 그렇습니다. 마치 미로와 같습니다. 자기 혼자서 길을 찾아가려면 어렵습니다. 헤매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가서 낭패를 보기도 합니다. 미로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의논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서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찾는 것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도 미로 안에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물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미로 위에서 길 전체를 보고 있는 사람처럼, 우리가 걷고 있는 인생길 전체를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찾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삼하 5:17-19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블레셋이 기선을 제압하려고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다윗은 왕이기 때문에 자신이 빠르게 판단하고, 어떻게 할 것을 명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다윗이 한 일은 하나님 앞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태도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미로 같은 인생길을 성공적으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뜻에 합한 삶을 살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박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혼자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서 외쳤습니다. “여호와여!”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 “여호와여!” 소리 질러야 합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를 만나면 소리 질러야 합니다. “여호와여!”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여호와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묻고 또 씨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침묵하십니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질문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질문에도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시기로 하신 것이라고 판단하기까지 하게 됐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왔다면 참 잘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칫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기를 보시고 바로 응답해 주셔서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바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는 일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것은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있습니다. 대부분의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응답이 자기들 생각보다 더디기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시 13:1-2를 보면 다윗은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너무도 급하고 두려운 마음에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습니다. 다윗은 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하실까요? 왜 이렇게 다윗을 애타게 하셨을까요? 다윗의 관심은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다윗의 영적 훈련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과정을 죽고 사는 문제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연단의 과정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묻게 됩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 칠 때는 그 문제가 두려워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두려워 질문을 드리게 됩니다.
현대를 대표하는 영성가 필립 얀시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사색과 통찰을 담은 책을 썼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와 씨름했기에 같은 주제로 책을 세 권이나 썼습니다. 책 제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고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그런데 얀시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이런 몸부림, 이런 영적 갈등은 참된 신자들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짜 신자는 절대로 이런 갈등을 하지 않는다고 못 박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가 어느 때까지니이까 라고울부짖는 것은 결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윗이 그렇게 부르짖은 것도 결코 하나님께 불평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의 과정에서 외치는 고통의 신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연단의 과정이 찾아옵니다. 그 때 그 고통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며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의 한 차원 더 성숙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보너스로 그 문제도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의 눈을 보게 하시나이까?” 오랜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라고 질문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마주치게 된 고난과 역경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응답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질문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성경을 보면 이런 상황 하에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요나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욘 1: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여기서 “그러나”라는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왜곡한 채로 따릅니다.
대표적인 예를 바울로 회심하기 이전의 사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행 7:5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은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왜곡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 핍박을 합리화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합 3: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상황을 보면 아니지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믿고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히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주어진 것들을 지금 내 시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강영우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이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분입니다. 6년 동안 이 직을 수행하면서 미국의 5400만 장애인을 대변하는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분은 중 1 때 친구가 찬 공에 눈을 맞아 실명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14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졸지에 눈먼 고아가 되었습니다. 동생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자신은 맹인재활센터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 정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눈을 떠서 동생들을 돌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실망했지만 계속 하나님을 믿고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훗날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됐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 때 제 눈을 뜨게 해주셨다면, 저는 소년 가장으로 동생들을 먹여 살리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 미래를 내다보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장애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고쳐드립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를 통해서, 장애 덕분에‘라고요”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기도했지만 응답이 내 기대와 다를 때 우리는 “어찌하여?”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응답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기대보다 더 큰 뜻을 가지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됩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도 겪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질문을 드리며 호소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을 겪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질문과 함께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