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31:21-26)
한 젊은 청년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집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를 해서 은행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여러 달 동안 애를 쓰고 노력했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집세가 밀려서 자그마치 15만원이나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 돈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청년은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이런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통장에는 2천원 정도 남았을 텐데... 그 돈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수면제를 사서 먹고 인생을 끝내야지.' 이런 안 좋은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행에 가서 통장을 조회해보니까 통장의 잔액이 152,110원이 들어있었습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해서 다시 한 번 더 확인을 해보았는데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누가 그 돈을 입금했는가를 확인해 보니 통장에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아버지의 생활도 힘들고 어려울 텐데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시는구나.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정말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서 큰 사업체는 아니지만 조그마한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이 글을 쓰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대부분이 조건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조건 때문에 사랑하고 조건 때문에 미워하기도 합니다. 조건 때문에 동료가 되고 조건 때문에 원수가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이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환경, 여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인 사랑입니다. 이런 조건이 없는 부모님의 사랑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는 결코 비교가 안 되는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4장에 보시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동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그녀를 좋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손가락질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아주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다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그 남편도 정상적인 남편이 아닐 정도로 관계가 복잡한 여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아침과 저녁 서늘할 때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문화인데, 아무도 다니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으러 갔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 땅으로 일부러 지나가셨고, 거기서 이 불쌍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가 주신 겁니다. 찾아가셔서 만나주시고 그녀의 영혼을 품어주셨습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얼마나 기뻤으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도 다 이 사마리아 여인과 똑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못한 죄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안타까운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군의 하나님이 하늘의 영광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30년 동안 목수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죄로 삼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이 밀레도 섬에서 장로들을 불러놓고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0:28에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곳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크고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불구의 몸이었고, 아내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습니다. 두 사람이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면서 절망한 나머지 한 때는 마약중독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 두 부부가 고민하면서 의논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핀을 만들고 거게에 예쁜 하트모양을 만들어서 붙였습니다. 그냥 하트모양이 아니라 깨진 하트모양을 붙인 핀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 때문에 예수님의 가슴이 이렇게 깨어져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핀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런 구원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내 마음이 너무 무디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이 너무 일상화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잘못된 삶의 자리에 서 있다면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성령의 음성을 통해 새롭게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나요?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의의 푯대이신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함께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3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어디에다 맞추고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그림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이 정말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보람된 삶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또 크게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도 거기에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격이 없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많이 움켜쥔다고 해서, 많이 가진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노래를 부르면서 그 열매를 먹고 누리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이제는 세상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항상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말씀 전체를 읽어보면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라는 심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21절에 보시면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처녀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비록 죄 때문에 너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해주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깨끗해져서가 아닙니다. 공로가 많아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물론 나중에 그들이 회개를 했지만 회개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꼭 해야 될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할 수 있는가? 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21절에 보시면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막에 세워놓는 돌무더기를 의미합니다. 사막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일종의 방향표시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또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희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좋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원래 개혁성경에 보면 "너를 위하여 길표를 만들고,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너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 라고 했습니다.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천국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잠간 동안만 머무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나그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나를 위하고 나를 생각한다면 천국으로 가는 이정표를 분명하게 세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이정표를 세워놓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 홍대거리에 가보면 불금이라고 해서 얼마나 타락한 거리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덜 그렇지만 낮과 밤의 구분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천국을 향해 가는 우리들이 어떤 이정표를 바라보고 가야 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신임을 받아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 길이 가롯 유다는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은 30개에 팔아버렸습니다. 마지막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지만 이미 멸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진 후였습니다.
가롯 유다가 어떤 이정표를 보고 달려갔습니까? 자신의 뜻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버리고 간 길이 바로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심판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이정표를 바르게 세우지 않으니까 결국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정표나 푯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라는 말씀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예언서들도 읽어보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내 말을 잊어버렸구나. 너희들이 나를 버렸구나. 내가 아닌 우상을 쫓아가고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없이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앉아 있지만, 과연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지금 내가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음의 길이라고... 진리의 길이라고... 생명의 길이라고 잘못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정표로 세우고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성도들이 고난을 이기게 되고 매일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47절과 148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시편 기자는 새벽마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꽉 붙들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54절에도 보시면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예 나의 노래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입에서 노래처럼 읊조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항상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집을 나서면 늘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갈림길이 나오면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던져서 지팡이의 머리가 향하는 쪽으로 그날 장사를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던지는데, 한번 던지고, 두 번 던지고, 세 번 던지고, 계속 지팡이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이 너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매일 한번 씩만 던지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많이 던지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 꼭 왼쪽으로 가고 싶은데, 이 지팡이가 자꾸 오른쪽을 가르키는구만. 그래서 왼쪽으로 향할 때까지 지팡이를 던지는 중이라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뜻을 위해 고집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내 뜻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신앙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 놓고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추어 주십시오."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고 싶은 길로만 열심히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이정표를 세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또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완전히 내 삶의 이정표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혹시 나도 내 뜻에만 집착하고, 내 욕심에만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다면 지금 바로 내 자신의 악함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2절에도 보시면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얼른 회개하고,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에게 더 많은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이런 처방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환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두려워하고, 답답해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한 숨도 못 잡니다. 그래서 의사가 그 환자에게 이런 처방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편 23편을 꼭 읽으십시오. 그리고 밤에 자기 전에도 시편 23편을 읽으십시오. 그것을 6개월 동안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어떤 약도 처방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환자가 의사의 처방대로 아침에 일어나면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도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이것을 계속했더니 6개월이 되기도 전에 병이 깨끗하게 치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폴 투루니에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인해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창조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10년도 아니고, 100년도 아니고, 43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했으면 이미 그 생명이 다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애굽을 탈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새롭게 창조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형 에서를 보십시오. 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소홀히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에서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가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속이기를 잘하는 야곱은 간사한 사람이었지만 말씀의 이정표를 세우고 나아갈 때에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22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성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언젠가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21절에 "처녀 이스라엘아"라고 했고, 22절에는 "반역한 딸아"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남자는 강대국인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창조하시는 새 일이 뭐겠습니까?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이 말씀은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바벨론을 반드시 이기게 해주겠다."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면 반드시 이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절대로 패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역사가 렘 30장과 31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에 일어나게 되는 일들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그들에게 평안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23-25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 마지막 부분에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24절에 "유다와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곤하고 연약한 심령을 다시금 회복시켜주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이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26절에 보시면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니까 잠도 편안하게 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부분 아니겠습니까?
소위 부자들만 산다고 자부하는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큰 약국 주인의 말에 의하면 자기들이 파는 두통약이나 신경계통의 약이 1년에 10톤의 분량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와 명예가 사람들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평안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안을 주노라. 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안을 빌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언제까지 방황만 하고 계실 겁니까?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 우리에게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좁고 험한 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과 눈물과 아픔이 있는 가시밭길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그 길을 선택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지만 그런 우리의 연약한 심령을 회복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런 회복의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