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교제
                                                        (빌 1:3-5)

                                                              Ⅰ

한문의 사람인(人)자가 의미하듯이 사람은 서로가 기대며 살아야하는,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의 사귐, 즉 이웃과의 교제를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과 어떤 교제를 나누며 사느냐는 사람의 인격과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그런데 이런 교제와 관련해서 사람을 나누면 사람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은 이웃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없었던 이 세대에 만들어진 단어가운데 「왕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왕따라는 단어는 학교에서 생성된 단어로, 주위에 있는 학생들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받는 학생들을 부르는 용어입니다. 요즘에는 학교뿐만이 아니라 군대나 직장에서도 이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만, 어디에서든지 한번 왕따로 찍히게 되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외톨이가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상관치도 않으며, 심지어는 그 사람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습니다. 한 두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같으면 반 전체 학생들이 그렇게 하고, 군대 같으면 같은 내무반을 쓰는 전우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한번 왕따로 지목된 사람은 너무도 큰 외로움 가운데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고, 그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오는 절망감으로 인해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택합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학교나 군대에서 왕따가 원인이 된 이런 저런 비극적 이야기를 우리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제가 단절된 삶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입니다.

교제와 관련해서 두번째 부류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첫번째 부류의 사람과 같이 교제가 단절된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지만, 잘못된 교제를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교제 가운데 잘못된 교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지 못한 사람과의 교제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사람은 누구와 교제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 인격과 삶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자기와 교제하며 사는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지 못한 사람과의 교제는 그 사람의 인격과 삶과 신앙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다줍니다. 이렇게 좋지 못한 사람과의 교제는 분명 잘못된 교제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 하는 교제입니다. 그래서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의리나 체면 같은 것은 철저하게 외면하며 그 교제를 끝냅니다. 그런 교제, 우리가 요즘 TV나 신문을 통해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제와 관련해서 구분하는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방금 말씀드린 교제의 부정적인 내용과는 다른 긍정적인 내용의 교제를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분명 바른 사람과의 교제와 좋은 사람과의 교제는 사랑의 인격을 바르게 해주고, 삶을 아름답게 해줍니다. 그래서 그런 교제를 하며 사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내용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의 교제가 바로 그런 교제였습니다. 그들 사이의 교제를 살펴보십시다.
빌립보교회의 설립자는 바울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믿게 된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믿어 성도가 된 것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 생각했습니다. 또 그와 함께 바울의 영적지도를 통해 영적성숙을 이루어가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양육자인 바울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선교여행을 할 때나 옥중에 갇혀 고생하고 있을 때, 모금을 하여 사역을 도왔고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수고에 감사했고, 바울을 존경하며 사랑했습니다.
그런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감사와 사랑을 받으면서 바울 역시 그들의 감사와 사랑에 보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시할 줄 알고, 자신의 선교사역에 협력하며 옥중의 자신을 위로할 줄 아는 그들의 성숙해진 영적모습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기뻐하면서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이런 교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그리고 감사가 가득한, 그리고 기쁨의 희생이 가득한 교제가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 사이의 교제였습니다.

                                                              Ⅱ

오늘 이 사회는 교제는 존재하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교제가 가득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삭막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럴지라도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은 그럴지라도 성도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사회와 세상사람들의 풍조를 교회와 성도들도 따라갑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도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교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가운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의 교제는, 성도인 우리가 어떻게 다른 성도들과 교제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모델적 교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의 교제는 어떤 내용의 교제입니까? 네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Ⅲ

첫째,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입니다.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기에서 복음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번역 된 구절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한 단어를 정리되어 있는데, 그 단어는 교제를 뜻하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라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관계속에서 예수님의 일을 위해 교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좀 더 원인적 내용으로 요약하면 예수님 때문에 이 맺어진 성도의 교제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 그렇습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관계가 맺어졌고, 예수님 때문에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라는 말에는 크게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 의미는 그들의 교제가 복음적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된 교제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적 신앙 안에서 하나 된 교제” 여러분! 복음적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창조주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원자 메시아로, 그리고 성령님을 우리를 믿음 안에서 살게 하는 보혜사로 믿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적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도 우리가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적 신앙이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 복음적 신앙 안에서 즉 예수님 안에서 성도가 된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다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복음적 신앙을 가졌다하면서도 성도들을 차별하여 대하고, 골라서 교제하며 사귀는 것은 크게 잘못 된 것입니다. 분명 복음적 신앙 안에서, 즉 예수님 안에서 성도된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분명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 교인들도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복음적 신앙 안에서, 즉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형제와 자매가 된 서로를 사랑하면서,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성도의 교제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그들의 교제가 복음 사역, 즉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함께 감당하는 교제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사역을 위해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물질과 기도로 후원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바울의 복음사역을 함께 감당했습니다. 즉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성도의 교제로 복음을 위한 일을 함께 감당하는 교제를 한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간혹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도의 교제를 성도들끼리 함께 모여 여행이나 하고, 식사나 하고, 친목회나 하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을 성도의 교제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불신자들하고도 나눌 수 있는 교제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라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성도의 교제는 친교의 차원을 넘어 복음을 위하여 기도하고 협력하기 위한 목적이 내용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복음사역을 위해 짐도 함께 지고, 고난도 함께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성도의 교제입니다. 즉 선교사업과 활동에 함께 몸으로 참여하고 물질로 후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길이다 그 말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바울과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를 이루며, 예수님을 증거 하는 복음 사역을 함께 감당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라는 말의 세번째 의미는 그들의 교제가 종말과 관계된 영원한 교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는 오늘 이 땅에서 끝나고 마는 교제가 아닙니다. 평생을 함께 살던 부부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성도의 교제는 이 세상에서 끝나는 교제가 아니라 하늘나라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교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제를 이루며 사는 성도들의 모임을 마라나타 코뮤니티(maranatha community)라고 부릅니다. 이런 교제를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과의 교제는 복음 안에서 이룬 교제, 즉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였습니다. 그 교제는 복음적 신앙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었음을 의식하며 나누는 교제였고, 복음사역을 함께 감당하는 교제였으며,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하늘나라에까지 이어지게 될 교제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가 그런 교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의 교제를 이루며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Ⅳ

둘째, 꾸준한 교제입니다.

5절 처음부분을 읽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이 첫날부터 이제까지라는 말씀은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의 교제가 꾸준한 교제였다는 말씀입니다. ‘꾸준한 교제’, 이것은 교제에 있어서 너무도 귀한 것입니다. 사람도 꾸준한 사람이어야 사람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일과 공부도 꾸준히 해야 하고, 신앙생활도 그런 사람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신앙인입니다. 꾸준히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그런 꾸준한 분들을 여러분 보고 있습니다. 꾸준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꾸준히 교회사랑하고, 꾸준히 교역자들의 힘이 되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분들인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저를 아는데 제가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까? 그분들이 그것 모르겠습니까? 또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다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자신이 몰라서 그렇지 무슨 뜻이 있을 거야 하면서 목사가 하는 일을 따라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꾸준히 교회를 섬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성도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교제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사실 교제에는 냄비형 교제도 있고, 가마솥형 교제도 있습니다. 냄비형 교제는 한번 쉽게 끓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교제이고, 가마솥형 교제는 쉽게 데워지지는 않지만 데워진 다음에는 오래 오래 그 열기가 보존되는 교제입니다. 세상사람들과의 교제도 가마솥형 교제가 아름다운 교제인데, 성도의 교제가 꾸준한 교제가 되어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바울과의 교제에 있어서 처음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나,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지금 이제까지 꾸준했습니다. 이런 꾸준한 교제가 진정한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도 이런 빌립보교회 교인들처럼 예수님을 꾸준히 사랑하고,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우들과 꾸준히 교제하며, 교회도 꾸준히 성실하게 섬기고,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사역에도 꾸준히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꾸준함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Ⅴ

셋째,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교제입니다.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에는 두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 하나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영적성장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 성장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첫번째 의미를 살펴보십시다. 추운 어느 날, 밤 11시가 넘었는데 어떤 엄마가 딸을 기다리며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사람이 ‘그렇게 서 있는 다고 해서 딸이 더 일찍 오겠느냐, 그냥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에 그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딸도 기다리고 있지만, 이렇게 서 있는 시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도 하고 어머니께 감사하고도 있다. 내가 내 딸만 했을 때 어머니도 이렇게 나를 기다리셨는데, 그때 어머니도 지금의 나처럼 얼마나 추우셨겠고 얼마나 마음 졸이셨겠는가!’
원한은 마음에 새기고 은혜는 쉽게 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받은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은 분명 잘못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을 늘 생각하면서, 빌립보교회 교인들과의 만남을 있게 하시고 그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두번째 의미를 살펴보십시다. 두번째 의미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영적성장의 모습을 보면서, 그 들의 그런 성장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의식 가운데 하나는 나보다 뒤처져 있던 사람이 나보다 앞서게 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된 것을 보면서 잘했다고 기뻐해 주기 보다는 깎아내릴 것이 없는가를 찾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목사들 중에서도 그런 목사가 있습니다. 그런 목사들은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목사 안수도 늦게 받은 사람이 교회를 부흥시키고 유명한 목사가 되면, 그 목사의 흠을 찾아내려하고 비판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물론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영적수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해서 바울보다 더 뛰어난 영적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그렇게 감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영적수준이 바울보다 더 높아졌다 할지라도, 바울은 똑같이 감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보여주는 신앙의 의식과 자세가 예수님을 닮은 의식과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자세가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이룰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며 기뻐할 줄 아는 차원의 삶이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길입니다. 즉 내 아들이 대학 입학에 실패했어도, 대학 입학에 성공한 교우의 아들을 장하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길이다 그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식과 자세를 가지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영적성장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들과의 교제를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 대한 두 가지의 생각, 즉 그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그리해야 합니다. 즉 함께 신앙의 길을 걷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내게 베푼 사랑과 그들의 발전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사랑과 발전을 기쁘게 생각하며 그것이 늘 감사하며 주위의 교우들과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Ⅵ

넷째, 기쁨으로 항상 기도해 주는 교제입니다.

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매일 같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기도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더 큰 영적성장을 이루어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쁨과 이런 기도가 바른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웃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그 교회가 더 크게 더 바르게 부흥하기를 기도해 줄 수 있어야 교회끼리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교우의 일이 잘될 때 기뻐하면서 그 잘된 일이 이제는 잘 지켜지게 해달라고, 그리고 지금보다도 더 잘된 이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줄 수 있어야 성도의 교제도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쁨으로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 교인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바울의 기쁨으로 항상 기도해 주는 신앙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교우들을 위한 기쁨으로 항상 기도해 주는 성도의 교제가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Ⅶ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저는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과 이루어진 성도의 교제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교제, 꾸준한 교제,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교제, 그리고 기쁨으로 항상 기도해 주는 교제가 바울과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보여준 성도의 교제였습니다. 그런 성도의 교제를 우리도 교우들과 이루어야 합니다. 축복하기는 그런 성도의 교제가 있는 온전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