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인사(2)
                                                        (빌 1:1-2)


                                                              Ⅰ

이번 주부터 다시 빌립보서 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울의 인사 가운데, 바울이 빌립보서의 수신인인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부르는 내용과 바울이 그들을 축복하며 문안하는 내용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Ⅱ

먼저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부르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의 수신인인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1절 중간에 나오는 대로 이렇게 부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말씀에 나오는 대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감독들 요즘 직책으로 이야기하면 교역자와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을 포함한 모든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는 우리가 깊이 살펴보아야할 중요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구절에 담겨 있는 내용이고, 둘째는 “성도”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구절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을 부를 때나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신앙과 삶의 자세와 내용을 말할 때 참 많이 사용한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 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48회 나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같은 의미의 말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가운데 예수를 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34회 나오며, 그리스도 예수 대신 주를 사용하여 “주 안에서”라고 한 말이 50회 나옵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는 그와 같은 의미의 말을 132회에 걸쳐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바울이 이 말을 그렇게 많이 사용했을까요? 그 이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이 말이 바울의 신앙과 바울에 있어서 핵심적 내용이고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아무 생각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사용한 입에 붙어있던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 서신들을 보내면서 형식적인 인사말로 사용했던 말도 아닙니다. 이 말 안에는 분명 깊은 신앙적 내용과 신학적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연구해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깊은 신앙적 내용과 신앙적 사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이 말에 감겨 있다고 해서 이 말을 철학적 이론이나 추상적 관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이 말안에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으로 예수님과의 신비한 연합을 이룰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신앙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이 담긴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런 그리스도인이 어떤 의식과 자세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이 이 말 안에 담겨 있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 의미는 첫째, 그리스도인은 새가 공기 중에서, 그리고 물고기가 물속에서, 그리고 나무뿌리가 흙 속에서 사는 것 같이 자신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분명하게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순간순간 예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며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세상과 죄를 이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디서나 예수님을 따라 살아 살아야 하고, 언제나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그리고, 예수님의 임재와 사랑을 언제 어디서나 느끼며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며, 예수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진정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라기는 말씀드린 내용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Ⅲ

다음으로 성도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요즘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도라는 단어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를 교회안의 직분 중에서 가장 낮은 직분으로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장로, 권사, 집사 되기 이전의 교인을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오해는 성도의 ‘성’자가 거룩할 ‘성’(聖)자이니, 글자의 뜻 그대로 거룩하게 사는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이 성도라는 이름이 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오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생각들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럼 성도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에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성도라 불렀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 불렀습니다. 그럼 왜 그들을 성도라 불렀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성도라는 단어의 원어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하기오스(άγιος)이고, 히브리어로는 카도쉬(kadosh)입니다. 이 하기오스나 카도쉬는 모두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성도라 불러준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뛰어난 민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민족과 구별하여 선민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 불러준 것은 그들의 도덕적 거룩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세상의 백성과 구별된 그리스도 안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교회만의 낮은 계급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이 성도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신앙을 가진 사람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성도라 불렀습니다. 즉 그들의 인격과 삶이 훌륭하지 못했음에도,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적은 믿음이었음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었기에 바울은 그들을 성도라 불러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래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성도가 되었다 해서, 성도로 불리워진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라는 이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성도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관계된,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된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렇게나 산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도 더럽히게 됩니다. 성도라는 단어의 뜻인 구별된 무리라는 뜻 그대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소속도 구별되어야하고, 생각하는 것이나 관심의 대상도 구별되어야하며, 먹는 것이나 옷을 입는 것이나 삶의 목적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인생의 종착점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빌립보에 사는 성도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빌립보라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런 세상 사람들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사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됨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과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구별된 의식과 삶의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사람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한 성도입니다. 바라기는 성도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Ⅳ

다음으로 2절 말씀에 나오는 바울이 빌립보서의 수신인인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축복하며 문안하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의 이 인사말은 당시 사람들이 인사말로 많이 사용하던 인사말입니다.「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인데, 이 카리스라는 단어는 은혜라는 뜻과 함께 복 또는 기쁨이란 뜻을 가지고 평강은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인데 평안이나 평화와 같은 말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 가운데 은혜를 빌어주는 것은 헬라식 인사이고, 평강을 빌어주는 것은 히브리식 인사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헬라식 그 인사와 히브리식 인사를 결합한 인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사에는 그런 헬라식 인사와 히브리식 인사의 내용을 뛰어넘어 깊은 기독교적 인사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의 내용을 기독교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울의 이 인사말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Ⅴ

먼저 은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은혜라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가 복과 기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독교적 의미에서 은혜라는 단어에는 그 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 기독교적 의미에서 은혜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독교적 의미에서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린다면 그 내용은 네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은혜의 원천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은혜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값없이 주십니다. 사건이 어떤 댓가를 치루었기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로 성령을 보내주셨고, 복음을 듣게 하셨으며, 그 복음을 믿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우리를 천국 백성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것뿐이고 잘못 산 모습 밖에는 없는데, 그런 우리를 보시지 않고 그냥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셋째, 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간들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은혜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도 받으며, 인생의 참 행복을 누리는 은혜도 받고, 천국 백성되는 은혜도 받습니다.
넷째, 이 은혜에는 풍성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져 주셨다고 은혜를 시시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을 살게 하는 능력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도 있으며, 천국이 내 집 되게 하는 능력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후사가 되게 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는 풍성한 능력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너무도 큰 기쁨과 복을 가져다주는 풍성한 능력에 분명 은혜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축복하며 문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은혜를 똑 같이 주고  계십니다. 주신 그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Ⅵ
 
다음으로 평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평강이라는 말은 평안, 평화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평강이라는 말의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뜻은 완전하다, 건강하다, 온전하다 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완전하고 건강하며 온전한 상태를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빌어준 평강은 그런  세상에서 말하는 평강과는 그 내용이 다릅니다. 바울이 빌어준 평강은 깊은 기독교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한 기독교적 의미의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적대 관계가 제거된 화해에서 나온 평강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평강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말한 평강이 바로 그런 평강입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그 평강은 인간의 불안과 고통의 원인이 죄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인간은 모두 다 평강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고 있음에도 인간은 평강을 누리고 있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늘 불안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에는 값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죄로 인해 이 땅에 살면서 다른 인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는 값을 치루어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육체는 물론이려니와 영혼까지도 죽는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에는 값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은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기에 평강을 누리기 원하는 인간은 죄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여러 해 동안 도망을 잘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공소시효를 일주일 앞두고 잡혔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일주일만 잘 도망 다녔으면 자유롭게 되었을텐데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질문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요. 오늘 밤부터는 발 쭉 뻗고 잠 잘 수 있어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은 절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셋째, 이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죄의 용서를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일을 감당키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평과 용서와 구원의 완전함을 보이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오늘도 이 땅의 인간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해결해 주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평강을 얻습니다.
넷째,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도 사람에게 평강을 주기는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평강은 국부적이고 순간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 평강은 가짜 평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평강은 환난 중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강이고, 죽음 앞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강이며, 누구도 빼앗아 갈수 없는 평강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평강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강은 환난과 죽음 앞에서 빼앗기게 되나 예수님께서 주신 평강은 그 누구나, 그리고 어떤 것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평강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있기를 축복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그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사는 복된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Ⅶ

그런데 여러분! 왜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이 은혜와 평강을 함께 축원했을까요? 그 이유는 우선 빌립보교회의 교인 구성이 헬라문화에 익숙한 이방인들과 히브리문화 속에서 살았던 유대인들로 되어 있었기에 이 두 문화권의 교인들에게 그들에게 익숙한 인사말로 각각 축복해 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기독교적 신앙의 내용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 깊은 의미는 단어의 배열 순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배열순서는 먼저가 은혜이고, 다음이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왜 은혜를 먼저 말했고 평강을 다음에 말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은혜로 평강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맺은 열매가 평강입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서 죄를 해결하지 못한,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서는 평강이 없습니다. 분명 은혜가 평강의 뿌리고, 평강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에서 해방된, 진정한 평강과 영원한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Ⅷ

마지막으로 짧게 하나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이 편지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주고받던 편지에 나오는 인사말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다른 점은 당시 유대인들이 주고받던 편지의 인사말은 대부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나님만 나온 것과 달리, 바울의 편지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렇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은 위치에 계시다는 것을 신앙적으로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이 동등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기 위해서 그렇게 썼다 그 말입니다.
초대교회시대 있었던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 가운데 모델이 되는 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의 잘못됨을 보고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 인사말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 부인하면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바른 기독교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Ⅸ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과 구별된 성도입니다. 바라기는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한 성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가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늘 충만한 복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