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 본문 고린도전서 15:21-22 >

 

  지난주 감동적인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미국 뉴욕 메트로교회의 빌 윌슨(Bill Wilson) 목사님이 쓴 『누구의 아이인가?』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어린이에 대한 열정으로 뉴욕의 흑인 빈민가에 홀로 들어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지금은 5만여 명의 흑인 아이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는 75천 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사역하는 분입니다. 처음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이라는 빈민가에 들어가 아이들을 위해 사역한다고 할 때 어느 누구도 응원하거나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알코올과 마약 중독이 일상화되어 있고, 살인과 성폭행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 미국 정부와 경찰들마저도 포기한 동네입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가정에서 버려지고 무관심 속에 하루 한 끼의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아이들을 위해 주일학교를 시작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너 혼자 그곳에 간들 그곳이 변화되겠어?”

  그러나 빌 윌슨 목사님은 그곳으로 들어가 주일학교를 시작했고, 지금 한 주에 5만 명의 아이들이 모이는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에 책에 왜 그가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800년대 초 스코틀랜드의 작은 교회에서 집사님들이 나이가 지극한 목사님에게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며 사실상 교회에서 나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해 아홉 살짜리 꼬마 아이 한 명을 전도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연세 많은 그 목사님은 가족에게 버린 받은 아홉 살짜리 아이를 데려다가 극진히 보살펴 주었지만, 목사님이 교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그 아이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20년 후 그 아이는 뛰어난 학자로 성장해 성경을 여러 개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가 바로 해외 선교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 1795-1883, 사진1)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로버트 모팻은 영국의 한 대학에서 연설하던 중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아직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땅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가야 합니다.” 그 때 청중석 오른쪽 끝 줄에 앉아 있던 청년이 자신이 그곳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청년이 후에 로버트 모팻의 사위가 된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 사진2)입니다. 아프리카 미지의 정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리빙스턴은 불과 60세의 나이에 아프리카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리빙스턴의 죽음이 알려지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가 사람을 보내 그의 시신을 영국으로 가져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거부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삶을 바친 이곳에 묻히길 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세워서 말입니다. 결국 영국에서는 아프리카로 배를 보내 리빙스턴의 시신을 싣고 영국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출발하기 전날 리빙스턴의 전도로 신자가 된 두 사람이 배에 몰래 숨어들어 죽은 리빙스턴의 심장을 도려냈습니다. 그래서 리빙스턴의 몸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심장은 아프리카에 묻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빌 윌슨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펫을 거둬들인 스코틀랜드의 목사가 실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아이에게 쏟은 헌신적인 사랑이 훗날 수많은 선교사와 개종자를 탄생시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p.231)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그를 변화시키니까 그가 세계역사에 큰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빌 윌슨 목사님은 뉴욕의 빈민가로 홀로 찾아갔습니다. 그 빈민가의 아이들은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꿈을 꿀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단지 어떤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인가?’만 물을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내일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홀로 그곳으로 들어갔고,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토요일 하루에만 5만여 명의 아이들이 교회를 찾는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위험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빈민가 아이들에게 칼에 찔려 여러 번 병원을 찾아야 했고, 15번이나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진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에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아이들의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참 중요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 사람은 아주 작고 미미합니다. 전 세계 70억이 넘는 인구 가운데 나 한 사람은 70억 분의 1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이 없으면 70억의 인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치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 한 사람은 정말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거짓과 불의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이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세상을 분명 정의로운 사회, 정직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물론 우선 당장 그렇게 된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곧 우리가 사는 사회를 규정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한 사람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죽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오직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어기고 그 열매를 따 먹음으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죄를 지은 인간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사망의 구렁텅이를 향해 달려가던 우리 인간에게 다시금 사망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신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 인간은 죽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삶(영원한 삶인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그분을 믿는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일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아담과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길 원하십니다. 온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 한 사람을 부르셔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 홍수의 심판에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노아 이후에도 여전히 죄악에 빠져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준비시키시더니 8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모세를 애굽의 바로 왕에게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며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부르셔서 세계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물론 그 한 사람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시고 그 계획을 완성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응답으로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짐승을 태울 수 있는 어마어마한 방주를 만들라는 말씀에 순종했던 노아로 인해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서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란에 머물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함에도(히브리서 11:8) 순종함으로 인류 역사에 믿음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바로 앞에 가기를 주저하던 모세가 그럼에도 순종하여 바로 앞에 설 때에 그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과 해방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을 부활의 주님께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종과 열정으로 복음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증거되었고,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서도 복음의 메아리가 울려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았지. 나 같은 사람이 그들과 비교할 수 있겠어?’ 물론 맞습니다. 그들은 모두 영웅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영웅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위대한 일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모두 우리처럼 실수하고 허물 많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 술에 취해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다가 자식들에게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허물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실수를 그 한 가지만 기록하고 있지만, 성경의 기록대로 950세까지 살았다는 노아의 생애를 하나하나 들쳐 본다면 얼마나 많은 실수와 허물이 있었겠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오직 말씀만 의지하고 하란을 떠났던 아브라함이지만, 그는 애굽에서도, 또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목숨을 건지려 했던 못한 사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것만 10여 가지나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말입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경험했던 모세인데 모세도 순간순간 분을 참지 못했고,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는 모세에게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던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이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백처럼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디모데전서 1:13)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성질머리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마가 요한을 데려가느냐 하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마가 요한을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가 다툰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자신을 역사의 무대 위로 이끌어준 은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야인으로 숨어지내던 자신을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안디옥 교회로 불러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아무도 바울의 변화를 믿어주지 않고 그를 만나주려 하지 않을 때 그의 보증인이 되어 사도들을 만나게 주선해 주었던 사람도 바나바입니다.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바나바는 그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 중에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에 은인인 바나바와 다투면서까지 헤어져야 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반대했던 마가 요한은 그 당시에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후에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고, 사도 바울 자신도 인생의 말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디모데후서 4:11)고 말할 정도로 사도 바울 자신에게도 엄청나게 도움이 된 사람입니다. 너무 급한 성격에 사람을 신뢰해 주지 못하고 바나바와 다퉈야 했고, 사람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에 실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허물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실수투성이이고, 허물 덩어리입니다. 자식들 앞에서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노아를 하나님께서 쓰셨다면 우리인들 쓰임 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살겠다고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씩이나 속이고 아내를 빼앗겼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면 우리 역시 믿음의 가문을 세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화를 참지 못하고 때로는 믿음까지도 회의를 가졌던 모세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다면, 우리 역시 지도자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에게 은인 중에 은인인 바나바에게 그렇게 대들고 사람을 신뢰하지 못했던 사도 바울이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다면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는 전도자로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그래도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시대에 나를 쓰시길 원하신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가 필요한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를 죄악과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를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필요했던 것처럼, 모세 시대에는 모세가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아니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를 필요로 하십니다.

 

  물론 나를 노아나 아브라함, 모세나 사도 바울처럼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는 멸망할 인류를 구했고, 아브라함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나눠줄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할 그릇’(사도행전 9:15)으로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들만큼 그렇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노아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모두가 아브라함이 되거나 모세가 되거나 사도 바울이 되라고 말씀하시진 않습니다. 대신 내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서 노아와 같은 사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작은 내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 주변이 은혜로 채워집니다. 내 주변이 나로 인해 아름다워집니다.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은혜를 보게 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받고, 하늘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나 한 사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그건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누가 듣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간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빌 윌슨이 쓴 『누구의 아이인가?』라는 책에 우리가 많이 들어보았을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중엽, 미국 시카고에서 신발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에드워드 킴벨(Edward Kimball)이라는 주일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여 쉬는 시간이면 시카고 중심가로 가서 길거리에서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를 통해서 D. L.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라고 하는 청년이 1858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무디는 유명한 복음전도자요 명설교가가 되었습니다. 1879년 무디는 메이어(F. B. Meyer, 1847-1929)라는 한 청년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 메이어도 역시 성장하여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습니다. 메이어는 채프만(J. W. Chapman, 1859-1918)이라는 청년을 그리스도께 인도했습니다. 채프만 역시 설교가가 되어 후에 빌리 선데이(William A. Sunday, 18621935)라는 야구선수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야구선수를 그만두고 복음전도자가 된 빌리 선데이가 모르데카이 햄(Mordecai Hamm)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서 부흥회를 열어 말씀을 전할 때, 빌리 프랭크(Billy Frank)라는 고등학생이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부흥집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당시 그 지역의 학생들이 이 집회를 방해하려고 하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서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도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빌리 프랭크라는 이름의 그가 바로 후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으로 알려진 20세기 최고의 복음전도자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이 전세계적으로 무려 22억 명에 달하고,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1993년 한 해 동안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만도 25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D. L. 무디나 빌리 그래함 목사님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적인 설교가가 탄생하게 된 데에는 한 무명의 주일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신발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주일학교 교사 한 사람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어느 누구도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일학교 교사 한 사람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디나 빌리 그래함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주일학교 교사처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한 사람, 오직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 5:1) 하나님은 지금도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나입니다. 작고 부족하지만, 그런 나를 통해 당신이 계획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로부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