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다윗처럼(삼상16:17-1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오늘은 복된 어린이주일이다. 도시의 큰 교회들에 비하면 시골교회에 출석하는 어린이들이나 성도님들은 한 움큼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 손에 쥐어진 하나님의 귀한 금가루들이라는 사실이다. 금가루는 흩어지면 먼지에 불과하지만 함께 모이면 큰 빛을 반짝인다. 우리들도 다함께 하나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큰 빛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잠언 22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여기서 사용된 “아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나아르(נער)”인데, 유아에서 부터 20세 미만의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아이들을 말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알 피 ִּ다르코)”은 ‘그의 길의 입구를 따라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 인생의 올바른 길의 입구(방향)를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가끔 어린아이인도 불구하고 성격이 이상하고 행동이 삐딱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길의 입구가 잘못 입력 되서 그런 것이다. 아무리 속도나 점수가 5G처럼 빠르고, 스펙이 삐까번쩍하고, 외모가 아이돌 빰 칠 정도라고 해도 인생의 입구에서부터 출발과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의미가 없다.

 

어린 시절에 마땅히 행할 신앙의 입구로 잘 들어섬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실례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이 시간에 함께 나누고, 우리 모두가 함께 닮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다윗 왕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사무엘상 16-17장에는 다윗이 어린 시절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왕의 악신을 쫒아내고,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들이 연속해서 나온다. 이때 다윗의 나이가 몇 살 쯤 이었을까? 사무엘상 17장 33절에 보면, 골리앗과 싸움을 자원하는 다윗에게 사울 왕이 이런 말을 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삼상17:33)

 

여기서 사용된 “소년”이라는 말이 앞에서 나온 ‘나아르’다. 그 당시에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가 20세 이상이다. 그런데 다윗의 7명의 형들 중에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셋째 형까지였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다윗의 넷째 형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19살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8번째 막내인 다윗의 나이는 15살이 넘을 수 없다. 게다가 누이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고, 골리앗과 싸울 때는 우리 나이로 치면 대략 초등학교 4-6학년에서 중학교 1-2학년 사이에 해당한다.

 

그러면 어린 시절 다윗의 평소 생활은 어땠을까? 어린 시절 다윗의 생활 모습을 오늘 어린이주일에 어린이들이나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의 다윗의 모습은 왕으로 선택될 만큼 하나님께 인정받은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17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 18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삼상16:17-18)

 

이 말씀은 사울 왕이 자신에게 들었던 악신을 음악(찬송)으로 고치고자 했을 때, 평상시 다윗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던 어떤 사람이 다윗을 추천하는 장면이다. 이 말씀에 보면 소년시절 다윗은 수금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무용”이란 ‘전쟁의 사람’이라는 뜻이고,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는 말은 ‘말씀에 총명한 자’라를 뜻이다. 비록 어렸지만 이러한 영성과 총명함을 베들레헴에 사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거기에 용맹하기 까지 했다. 이것은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사울 왕에게 했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17:34-35)


사자나 곰이 얼마나 포악한 짐승인가? 이런 맹수들을 쳐 죽이고 새끼를 구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 힌트는 ‘물맷돌’과 ‘수염을 잡고 쳤다’는 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적당한 거리에서 물맷돌을 던져서 이마를 명중시킨 후에 잠시 정신을 잃은 틈을 이용해 빠른 스피드로 달려가서 지팡이나 막대기로 짐승의 이마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했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들짐승을 물리친 사례들은 고대 문헌들 속에도 등장한다. 이런 경험이 바로 처음부터 골리앗의 이마를 정조준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다윗은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했다. 사울왕은 이러한 다윗의 말에 감동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의 다윗을 마땅히 행할 올바른 신앙의 길의 입구로 가르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그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사무엘이 왔을 때 막내 다윗을 부르지도 않은 아버지 이새나 형들의 역할을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가정교육의 중심에 서는 것은 유대인들 가정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실제로 다윗은 시편 86편 16절에서 기도 중에 모친에 대해 언급한다. 함께 읽어 보자.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시86:16)

 

주의 여종의 아들(the son of your maidservant)”이라는 말은 ‘어머니가 주님의 여종이었듯이 저도 주님의 종인 것을 인정합니다!’라는 고백이다. 이 표현 속에서 다윗의 어머니가 신앙을 전수해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성서학자들 사이에는 다윗의 어머니와 다윗의 출생에 대한 논쟁도 있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을 근거로 다윗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다윗을 낳았고, 이로 인해 7명과는 이복형제 관계에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아버지 이새가 유독 어린 다윗에게만 양을 치는 혹독한 일을 시켰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분명한 것은 다윗이 출생 이후에 어머니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비록 아버지의 눈 밖에 난 막내아들 이었지만, 다윗의 어머니는 아들을 찬양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교육을 시켰고, 용맹스러운 신앙인으로 마땅히 행할 신앙의 입구로 그를 인도했다. 이처럼 다윗의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희생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이다. 우리 안흥교회 성도들은 지금까지도 이미 자녀손들이 좋은 신앙의 본을 보여주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자녀손들과 주일학교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 즉 신앙의 길의 입구를 가르쳐 줘야 한다.

 

그런데 다윗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단지 어머니의 숨은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어렸지만 다윗 자신도 엄청나게 노력을 했다. 영성 있는 악기연주와 용맹스러움, 정확한 물 맷돌질 등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주일학교 어린이들이나 중고등부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부모나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가르침과 격려에 순종하는 본인의 의지와 믿음과 노력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소년 시절의 다윗처럼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실천하기 바란다.

 

얼마 전 주일학교 교사와 어린이들이 부르는 “주 보혈”이라는 어린이 찬송에 큰 은혜를 받았다.

 

“지금 주께 갑니다. 날 받아 주소서. 죄에 빠져 살다가 지금 갑니다.

주 보혈 주 보혈 능력의 그 이름 이 시간 나를 덮어 주소서.

헛된 욕심 모든 죄 맑게 씻어 주시는 주 보혈 나를 덮어 주소서

 

이 찬송의 가사처럼 지금 주께 가면 주님은 보혈로 우리를 덮어 주시고 치유해 주신다. 하나님의 능력이 둘러 덮으면 안되는 것이 없다. 어린 다윗을 덮어 주신 하나님이 우리들 모두를 덮어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에게 차별은 없다. 하나님은 어린 다윗의 나이를 본 것이 아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았다. 역으로 말하면 주님은 그 사람이 장년인지 노인인지 나이도 안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 도처에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중심을 보시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끝까지 ‘그럴리 없다’고 얼마나 많이 버티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그러므로 다윗의 모친처럼 자녀손들, 어린이 청소년들을 신앙의 바른 입구로 인도하자. 그리고 우리들 자신도 어린시절의 다윗처럼 작은 일에서부터 순종과 충성을 다하자.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통해 빛나는 하나님 나라의 큰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