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다시 오심을 준비하라!
< 본문 – 마태복음 24:37-44 >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이 1558년에 그린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사진1)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Daidalos)의 아들입니다. 유명한 건축가인 다이달로스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Minos) 왕을 위해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라는 괴물을 가둘 미궁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이달로스 미노스 왕의 미움을 사서 그의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자신이 지은 미궁에 갇히고 맙니다. 최고의 발명가요 건축가인 다이달로스는 그 안에서 밀납으로 날개를 만들어 미궁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에게 밀납이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면 녹게 되니 너무 높이 날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는 밀납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크레타 섬의 미궁을 빠져나와 시칠리아 섬으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이카루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아 미궁을 빠져나왔다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너무 높게 날다가 밀납이 녹으면서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맙니다.
바로 그 상황을 피터르 브뤼헬이 오늘의 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입니다. 그런데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을 그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을 발견하셨습니까?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이 그림 오른쪽 아래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 부분만 도려내어 보겠습니다.(사진2) 이카루스는 이미 바다에 추락하고 그의 두 발만 바다 위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극적인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브뤼헬은 그림의 모퉁이에서 이카루스의 발버둥을 치는 발만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의 제목을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이라고 붙였습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치고는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은 너무 작게 그리고 있습니다. 대신 평온하게 쟁기로 밭을 가는 농부의 뒷모습을 훨씬 더 크게 중앙에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목동이 양을 치고 있고, 맨 오른쪽 아래에서는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이카루스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 이토록 무관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상황입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는 열쇠는 네덜란드의 속담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쟁기질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속담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슬픔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 해야 할 일을 계속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욕구하는 이카루스의 무모한 욕망보다도 쟁기질을 하고 양을 치며 낚시질을 하며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의 작가 피터르 브뤼헬은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이카루스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죽음보다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어느 한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향해 묵묵히 가고 있다는 것을 그의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지난날 죄인으로 살던 우리의 모습을 잊지 않는 것은 오늘의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오늘에 그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삶의 바른 가치를 찾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서 지난날의 경험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우리의 신앙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경험이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든 그 모든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잃어버린 과거는 때로 우리의 모습을 왜곡하게 만듭니다. 지난날 죄인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우리는 늘 죄책감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오늘의 삶을 잃어버린 내일은 우리의 삶을 허황되게 만듭니다. 자신의 허황된 꿈에 춤추면서 바람잡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오늘을 보고, 오늘을 발판으로 내일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오늘도 헛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도 하셨고,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해 줍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대린다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흰옷 입은 두 사람으로 표현된 천사들은 이렇게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현장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책망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텐데 일하면 뭐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데살로니가후서 3:11-2)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시냐?’하고 기다린다는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만 바라보며 살 수 없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는 그 하늘로부터 주어진 은혜를 덧입어 오늘 내게 주어진 땅의 삶을 그 은혜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세상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땅을 바라보면 삶에 의욕이 꺾이고,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세상이 변하는 것 같지 않아 낙망될 때도 있습니다. 아파트 안 채 사놓고 1-2년만에 몇 억씩 오르는 어떤 사람들처럼, 내겐 그런 행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죽도록 노력해봐야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한 미래뿐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느끼는 것처럼, 어디를 둘러봐도 나를 위해 마련된 파라다이스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보다 어르신들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힘든 나날을 버텨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조금만 더 견디면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좋은 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어려움을 버텨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렇게 꿈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부여가 없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심리적으로 느끼는 절망감이 이전 시대보다도 훨씬 더 큽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희망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곳에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땅을 밟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밟고 살아가는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땅의 삶은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신 삶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살아가도록 맡겨주신 오늘이라는 땅의 삶을 무시하는 것은 신앙을 외면한 삶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로 커다란 방주를 지었습니다. 홍수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다른 사람들은 홍수로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평범한 삶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 하나님 없이 자기들이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노아가 그 긴 시간 동안 방주를 만들어도 그들은 그것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심판의 때를 준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전혀 준비하지 않고 즐기며 살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도 그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살면서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다면 우리에게도 불현듯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결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두 개의 질문은 다른 듯 하지만 같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해석이 좀 필요합니다. 40절에 언급된 ‘두 사람’은 남자를 말합니다. 자기 식구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업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책임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모든 남자들을 대표합니다. 41절에 언급된 ‘두 여자’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을 대표합니다. 여인이 맷돌질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누가복음 17:34) 두 사람이 밤에 한 자리에 누웠다는 것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에 잠을 자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집안 구석구석 청소도 하고, 손님에게 대접할 맛있는 음식도 준비합니다. 귀한 손님이기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맞이할 수 없어 옷도 깨끗하게 빨아 잘 다려놓은 깔끔한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오실 시간이 가까이 오면 설레는 마음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마당을 서성입니다. 문밖 저 멀리서 인기척이라도 나면 혹시 오실 손님이 아닌가 하고 대문을 빼꼼히 열고 골목을 내다보기도 합니다. 청소가 끝나고 맛있는 음식 장만이 끝나도 마음이 들떠서 다른 것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어서 손님이 오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귀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맞을 때에도 그래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때에도 우리는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주님 다시 오심만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누가 주님의 영접을 받습니까? ‘주님 곧 오시는데 주님 맞을 준비나 해야지.’ 그러면서 오늘 내가 해야할 일 다 미뤄놓고 주님만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가족들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해야 할 사람이라면 열심히 정성껏 가족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님이 ‘왜 내가 온다고 했는지 준비는 하지 않고 네 일만 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왜요? 오늘 내가 살아야 할 삶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의문이 드는 내용이 있습니다. 똑같이 밭을 갈고 있는데, 똑같이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왜 한 사람만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 것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42절과 44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잠을 자지 않고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있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밤에 잠을 자다가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을 버림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처녀 비유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신랑을 맞으러 간 열 명의 처녀 가운데 신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슬기로운 5명의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 올 때에 다른 5명의 처녀들처럼 모두 졸며 잤습니다.(마태복음 25:5) 잠을 잤느냐 자지 않았느냐가 깨어 있음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 매일 반복되듯 살아가는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심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심판을 받고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지만 깨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밭을 갈다가 주님 다시 오실 때 데려감을 당한 사람은 평범한 일상인 밭을 가는 일을 할 때에 그것이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임을 알고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똑같이 집안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맷돌질을 하는 여인 중에도 자신이 가족들을 위해 하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했던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고, 그 여인은 주님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언제 오시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사느냐 특별하게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깨어 있느냐,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비록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삶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 삶을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앞서 보여드린 브뤼헬의 그림 생각나십니까?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저 평범한 일상의 삶을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든, 세상에 어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든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임을 기억하며 말입니다. 그 일이 위대한 일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만한 엄청난 업적을 세우는 일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가정주부는 가정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사업가는 사업장에서,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면 됩니다.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살고 있음을 고백하며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엄청난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평범한 삶을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라보실 때 흐뭇한 미소를 지으실 수 있는 그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런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