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교훈 – 회심의 모범

행 9:3-9

 

   식품은 오랜 시간 저장하다보면 변질됩니다. 이 때 변질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패’고, 다른 하나는 ‘발효’입니다. 식빵을 보관하다가 곰팡이가 폈다면, 그것은 부패입니다. 먹을 수 없어서 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콩을 삶아서 으깨 만든 메주에 곰팡이가 폈다면, 그것은 발효입니다. 이것을 원료로 된장, 고추장 그리고 간장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부패와 발효를 우리말에서는 더 분명하게 구분하여 표현합니다. 부패를 ‘썩는다’고 하고, 발효를 ‘삭는다’고 합니다. 썩으면 악취가 나고, 우리 몸에 좋지 않은 독성분이 있기도 해서 먹지 못하고 버립니다. 그러나 삭으면 젓갈이 되고, 식혜가 되고, 김치가 돼서 그 풍미가 깊어집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이 썩는 부패와 삭는 발효는 모두 미생물에 의해 분해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분해 결과 우리에게 유익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발효라고 하고, 사용할 수 없거나 해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면 부패라고 합니다. 사실 과학적으로는 같은 과정이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유익하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구분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도 살다보면 변합니다.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건을 겪거나 특별한 상황을 만나면 갑작스럽게 변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의 변화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썩는 부패와 같은 변화가 있고, 삭는 발효와 같은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변화는 썩는 부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변화는 삭는 발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인물은 성경이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회심의 예인 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발효가 잘 된 식품처럼 요긴한 인물로 변화된 바울입니다.

   바울의 회심이 특별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 회심이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가던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회심했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주님과의 만남으로 박해자가 전도자로 변한 것입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회심의 결과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바울의 회심으로 복음이 이방세계로 널리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한 민족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 열방의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회심으로 복음의 의미가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정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학체계가 올바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회심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바울의 회심사건을 통해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루신 회심

 

   바울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오늘 본문이 소상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행 8:3을 보면,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잔멸하는 일에 앞장 선 바가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무려 200킬로나 떨어져 있는 다메섹이라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을 체포하려고 그곳까지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메섹이 가까운 어느 길 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가 놀라서 땅에 엎드리자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후 주님께서 준비하신 변화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만남에서 눈이 멀어버린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안수를 받고, 성령이 충만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됐고, 그 후 세례를 받고 건강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전적으로 주님의 기획 하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회심시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정하신 때 주님의 뜻대로 회심의 과정이 진행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꿈에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남인숙이라는 분이 쓴 [인생을 바꾸는 결혼수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장이 있습니다. 거기에 도발적인 말이 나옵니다. “결혼하면 이 사람이 바뀌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저자는 연애할 때 과거와 다르게 변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결혼하면 변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순간만은 진심일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반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대체로 3년 내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가슴 뛰는 사랑이 식고, 반했던 콩깍지가 벗겨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대사처럼 “사랑이 변했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변한 것이 아니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장의 결론은 변하게 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대신 남편을 관리하라고 권합니다. 변하지 않으니, 나쁜 점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잘 관리해서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겉사람은 변할 수 있어도 속사람은 정말 변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변하기 어렵고 누군가가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변하게 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니 주님께서 변하게 하시면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저히 변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도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하고 싶으면 혼자 변해보겠다고 애쓰지 마십시오. 힘 만들고 안 됩니다. 대신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이미 변했지만 아직도 변해야 하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여주옵소서. 나를 변화시켜주소서.”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녀나 부모님 또는 지인들 가운데 그 속사람이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변화시켜보겠다고 애쓰지 마십시오. 힘만 들고 자칫 관계에 금이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주여 변화시켜주소서”

 

목적이 있는 회심

 

   바울의 회심이 주님께서 이루신 회심이라면, 주님께서는 왜 바울을 회심하게 하셨을까요?

  그 답은 본문에 명확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을 회심시키시는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안수하여 세우라고 당부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회심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전하기 위해 회심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롬 11:13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은 자기의 회심에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회심하여 사도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누군가를 회심시키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회심한 사람들은 그 목적을 아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발효와 부패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부패는 대부분 저절로 일어납니다. 생명체가 죽어 버려지면 저절로 부패가 일어나고, 식품도 상온에 그냥 놔두면 부패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발효는 대부분 의도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장이나 김치 또는 치즈와 같은 발효 결과물은 주부나 장인의 정성이 담긴 수고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주부나 장인이 왜 그토록 힘든 발효의 과정을 일으키느냐는 것입니다. 장, 김치, 치즈와 같은 맛있는 발효식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정성을 다하는 것은 최고의 발효식품을 얻으려는 기대 때문이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회심시키실 때는 기대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하나님의 기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편적인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특수한 기대입니다. 그 사람에게 특별히 부탁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한 뒤에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았더라도 사는 것이 바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기대만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 기대를 이루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에게 배워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나를 회심시키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기대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기대를 이루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뒤따르는 회심

   오늘 본문을 보면 의미심장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장차 그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 그대로 바울은 회심 이후에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후 11:24 이하를 보면 바울이 자기가 당했던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그렇습니다. 회심 이후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고난의 형태와 강도는 저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이겨내야 회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도 회심 이후 고난을 겪었습니다. 저는 불신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회심 이후 가정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제사문제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장손이셨기 때문에 제사가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일가친척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회심한 이후에 제사에 참여하지 않자 말이 많았습니다. 어른들에게 심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제사 때마다 반복됐는데, 견뎌내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사가 다가오면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체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담대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원래 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이 없었고, 박해가 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제가 고백하게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겪은 뒤에 3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자기가 그런 극심한 고난을 다 견디고 이겨놓고 자기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자기가 고난을 이겨냈다면 자기의 강함을 자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달리 강건하고 멘탈도 강하기 때문에 이겨냈다고 자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고난 속에서 자기의 약함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힘이 들어 쓰러질 뻔했고, 너무 두려워서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면서 약한 자신을 강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견딜 수 있게 해주시고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회심한 우리에게 고난만 주시지 않습니다. 함께 하십니다.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도 주시고 지혜도 주십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고전 15:31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회심한 이후 날마다 죽는 체험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회심했다고 완전히 천사처럼 변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영접해서 새로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연약한 육신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 이후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또 다른 고난입니다.

   

  요요현상(Yo-yo effect)이란 것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체중이 줄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체중감량을 위해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다시 살이 찌는 것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마치 장난감 요요가 되돌아오는 것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영적으로도 이런 요요현상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육신이 다시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심 이후 영적 요요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는 체험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이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울처럼 회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