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속의 그리스도(고난 받는 종)
본문/ 이사야52:13-53:12
찬송가/ 79장 3-4절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네 개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 중에 하나입니다.
이사야서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구주 예수님에 관한 가장 완전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복음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개의 종의 노래
(1 (1) 사42:1-9
(2 (2) 사49:1-7
(3) 사50:4-11
(4) 사52:13-53:12 – 이사야서를 반지에 비유한다면, 이사야53장은 다이아몬드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사42장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도 ‘보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보라’는 말은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뭔가 중요한 것이나 사람을 보여주려고 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놀 때, 많이 사용하는 말도 보라는 말입니다. “얘들아, 이것 봐, 와서 봐”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보여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아이들은 ‘이리 와서 봐’, 라고 말하는 것이죠.
어른들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여기 보세요”라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누군가를 소개할 때도 이분을 보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누구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보라는 말로 시작할까요?
하나님은 ‘내 종을 보라’ 라고 하셨습니다.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 예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은 정확히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는 그냥 소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라고 먼저 외치고 나서 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고 하면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 이사야 53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 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많이 받았으며,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원래는 존귀한 분이셨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를 받고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단어는 멸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멸시를 받았나요?사람들이 그에게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아야 할 때, 얼굴을 가립니다.
또한 그는 간고와 질고를 겪었다고 했는데요, 간고는 ‘가난과 고생’이고, 질고는 ‘질병으로 당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다 겪은 것입니다.
이 구절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본래 멸시를 당할 분이 이니요, 존귀한 분이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셨으며,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존귀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온갖 멸시와 천대, 고난을 다 받으신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존귀하신 예수님이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온갖 간고와 질고를 다 겪으셔야 했을까요?
-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불행하게 되면, 본인의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인과 응보) 욥의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욥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찾아와서 함께 있어 줬던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욥이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9장에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면서, 그는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이런 불행한 일을 만났을까,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이 사람이 맹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 고난을 겪고 있다’ 라고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에 대해 그의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그러나 여러분, 이사야53장의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받은 것,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온갖 간고와 질고를 겪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멸시하고 천대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 때문이었습니다.
2. 그래서 두 번째로, 여호와의 종의 특징은 멸시 천대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온갖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우리 인간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53:5-6절을 보세요. 사53장은 구약 성경에서 다이아몬드와 같은 귀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사53:5-6절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부분입니다. 구약에서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하는 구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이 구절은 예수님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은 이 구절이 예수님에 관한 정확한 예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멜 깁슨(Mel Gibson)이 만든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2004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데, 이 영화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인 것 같습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봤는데요, 아직도 가장 머리에 남는 장면은 예수님이 채찍에 많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입니다. 너무 잔인하고 끔찍하여 눈을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얼굴을 가리며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발표되기 전에 시사회에서 어떤 기자가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잔인하게 죽임 당하는 장면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유태인 기자였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영화에서 의도하는 것이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책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는가? Anti-semitism 사상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멜 깁슨은 강하게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기자는 되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는가?
왜 그렇게 죽었는가?
멜 깁슨은 정말 그 대답을 듣고 싶으냐고 되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내가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인간이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무서운 인간의 죄가 그를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죽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이동원목사 설교 중)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죽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6-7세기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인데, 정확하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 때문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 그는 조롱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셨습니다.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천으로 얼굴을 덮고 때리고 나서, 선지자야, 누가 때렸는지 맞춰보라고 했습니다.
- 로마 군병들은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혀 주고, 가시로 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라고 조롱 섞인 인사를 했습니다.
- 예수님은 많은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사용한 채찍은 일반 채찍이 아니라 끝에 쇠조각이 달려 있어서, 맞을 때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왔다고 합니다.
-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엔, 군인들은 조롱하기 위해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 십자가 달렸을 때, 여러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거든 십자가에서 어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라고 조롱하였습니다.
-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도 창에 허리를 찔려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조롱과 채찍질과 찔림을 당하셨을까? 모든 것이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으면, 마태는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마8:17, “이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는 두 대명사입니다. 하나는 ‘그’(He)라는 대명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We)라는 대명사입니다. 그와 우리는 상관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속했습니다.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질은 전적으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나음 주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채찍으로 맞으시고 찔리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것은 정확하게 우리 때문이며 우리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기 위해 양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양은 두 가지 상반된 특징이 있는데요,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 중에 양의 부정적 특성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의 긍정적 특성을 닮았다, 라는 것입니다.
양의 부정적인 면은 – 시력이 나빠서 쉽게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목자를 떠나면 십중 팔구는 길을 잃어버립니다. 다른 짐승들을 다 집을 찾아오지만, 양은 자기 집도 못 찾아오는 어리석은 동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양처럼 길을 잃고 그릇 행했다는 것입니다.
사53: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NIV 영어 성경, “We all, like sheep, have gone astray, each of us has turned to his own way; and the LORD has laid on him the iniquity of us all.
우리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죄인이 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롬3:10-11, 3:23)
우리 인간은 부정적 의미에서 양과 같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긍정적 의미에서 양과 같았습니다.
사53:7-8절을 보세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양의 특성 중에 하나가 온순함입니다. 털이 깎일 때에도 가만히 앉아 있고, 심지어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도 다른 짐승과 달리 잠잠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의 가장 이상한 특성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오셔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잠잠했던 양처럼 기꺼이 인류 구원을 위한 어린 양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죄가 아닌 남의 죄를 위해 죽으시면서도 잠잠히 당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도 잠깐 말씀을 나눴습니다만, 예수님은 무슨 힘이 없어서 체포를 당하거나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거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체포 현장에서도 하나님께 구하면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함 같이 자원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간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기 때문이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3. 본문에서는 고난 받은 종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더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고난 받는 종의 특징은, 그는 장차 높임을 받고 존귀한 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사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리라.”
이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셨지만,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2장에서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 이야기를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찬가로 불리는 빌2:6-11절입니다.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본래부터 존귀한 자였습니다. 잠깐 동안 우리를 위해 낮아 지셨고, 멸시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높여 주신 것입니다. 지금은 영광 중에 계시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시고 우리 대신 맞으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은 세 가지만 간략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첫째로,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를 죄에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사용해야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
롬6:12-14,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제는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 옛사람의 죄의 본성을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것입니다.
2) 둘째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막8:34)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이 땅에 이룰 각자의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우연히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야 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주를 위해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도 인용한 시인데요, 윤동주의 십자가를 다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며, 그 사명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십자가로 이해했습니다.
십자가
쫓아 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대화의 시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내 양을 치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세 번 반복해서 목회 사명을 주십니다.
-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에 대해서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니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그러나 베드로는 동료 제자인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해서 요한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나기도 하였지만, 그런 뜻은 아니라고 요한복음 저자인 요한이 스스로 증거하였습니다.
-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제자들일지라도 사명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순교를 통해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사람도 있고, 요한처럼 오래 살면서 많은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사명은 각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과연 어떤 사명을 받으셨나요?각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충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세째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치유 기적이 있은 후 예수님은 나가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아직 예수님이 드러나길 원치 않으셔서, 그런 부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런 부탁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로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게 된 것입니다. 왜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했나요?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해 주고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그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증거를 멈출 수 없었다, 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전도하게 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난 주간을 어떻게 경건하게 살 것인가?
목양 칼럼에서도 썼습니다만, 세 가지 정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금욕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보다, 고난 주간에 우리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 찾아서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 새벽 기도회에 많이 참여하자.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습관보다 더 좋은 경건의 훈련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막1:35절을 보세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2) 복음서를 읽어보자. 예수님의 생애를 읽으면서 예수님이라면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았을까를 묵상해 보자.
3) 한두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보자.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인데, 부활주일 예배에 초청해 보자. 전도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서 한 주간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교제하며 동행하시고,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시고, 복음을 증거하는 기쁨을 누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