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허무 왜 그리고 어떻게
전 1:1-11
사람들은 살면서 인생의 허무를 생각해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반복된 일상에 지쳐있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그렇고, 죽음이 무게 있게 다가올 때 그렇습니다.
시인 박재삼은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라는 시에서 인생의 허무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꽃이나 잎은/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은 지고 만다.
그런데도 그 멸망을 알면서/ 연방 피어서는 야단으로/
아우성을 지른다.
다시 보면 한정이 있기에/ 더 안쓰럽고/ 더 가녀린 것인데, 그러나/
위태롭게, 아프게, 이 세상에/ 끝없이 충만해 있는 놀라움이여.
아, 사람도 그 영광이/ 물거품 같은 것인데도 잠시/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빛날 뿐이다
시인은 꽃을 비유로 인생의 허무를 시로 읊은 것입니다. 한정이 있음을 알면서도 살아내려는 인생의 깊은 허무를 감상적으로 읊은 것입니다.
성경에 이 시인처럼 인생의 허무를 깊이 생각하고 절절하게 느껴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자인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끼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허무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어떻게 허무를 느끼는지, 그리고 그 허무는 왜 생기게 되는지, 나아가 어떻게 그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깨달음을 글로 남겨서 후배들에게 소중한 영적 유산으로 남겨놓은 것이 전도서입니다.
허무를 느끼다
본문 2절을 보면 전도자가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마디로 허무를 느끼며 한 탄식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헤벨’(הבל)이란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헤벨이라는 말은 원래 ‘증기’ 또는 ‘호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은 ‘있는 것 같으나 실체가 없는’, 또는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하는’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헛되고 헛되며”라는 말은 히브리어 어법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의 ‘헛되고’는 단수로 그리고 뒤의 ‘헛되며’는 복수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어법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번역해 보면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입니다. 이런 표현 방식은 히브리어 어법에서 최상급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헛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장 헛되다는 이 최상급 표현이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헛된 것들보다 더 헛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자는 사람의 말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헛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해 온 모든 일, 그래서 가지게 된 모든 것, 그리고 그래서 얻게 된 모든 평판, 그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많이 놀랐습니다. 이 말씀이야 말로 그 어떤 책이나 그 어떤 사람의 말에서 볼 수 없는 “지독한 허무”를 말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전도서 전체를 보면 이 헛되다는 말, 이 헤벨이 무려 38번이나 나옵니다. 구약성경 전체에 78번 나오는데, 12장짜리 이 작은 책 전도서에만 절반 정도가 나옵니다. 그야말로 전도서는 인생의 지독한 허무를 말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독한 허무를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1절에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솔로몬 왕을 말합니다.
이렇게 지독한 허무를 느끼며 전하고 있는 사람이 솔로몬 왕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솔로몬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왕 가운데 가장 큰 부귀영화, 명예, 지혜, 그리고 권력을 누려본 왕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가져보고 누려보기 전에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고, 또 설레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가져보고 누려보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가져보고 풍성하게 누려보면, 기대감과 설레임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립니다.
비행기를 타고 처음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설레임에 며칠 전부터 잠을 설치고 기대 속에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자주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비행기 기장이나 출장이 잦은 대기업임원들은 비행기여행이 그냥 일이고, 때로는 피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솔로몬은 모두가 그렇게 가져보고 싶고 누려보고 싶은 그 모든 것을 그 누구보다도 풍성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가져보고 누려보았을 것입니다. 기대감이나 설레임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것들이 대수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하는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많은 부귀영화, 명예, 권세 이게 다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의미의 공백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헤벨, 대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별게 아닌 헛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기대감이나 설레임이 사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그것 해 보면 또 뭐하나? 그리고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 땀 흘려 쌓아 놓은 것, 고생하며 모아놓은 것 그것들 속에서 의미의 공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다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이때가 헤벨 곧 허무를 느낄 때입니다.
사실 이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자칫 삶의 열정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 온 모든 노력 속에 담긴 소중한 뜻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복인 줄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무의 원인 찾다
솔로몬이 이렇게 지독하게 허무를 느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요? 어떤 사람들처럼 다 내려놓고 도를 닦으러 갔을까요? 아니면 그 지독한 허무감에 사로잡혀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솔로몬은 그 허무감의 실체를 깨닫게 됐습니다. 왜 그토록 지독한 허무를 느끼게 됐는지? 허무함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그 답은 본문에 나오는 “해 아래”라는 말 속에 담겨있습니다. 3절을 보면 “해 아래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해 아래에는”이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 짧은 책 전도서 전체에 해 아래라는 말이 무려 29번이나 나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그렇게 지독한 허무감을 느끼게 된 것은 해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헛된 이유가 해 아래에서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2절에는 보다 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깨달은 것은 그 지독한 허무가 바로 “해 아래”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리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삶의 자리, 일하는 자리, 사랑하는 자리, 즐기고 누리는 자리 그 자리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해 아래”라는 자리는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해 아래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태양 아래인 땅, 즉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태양 아래 살아간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습관이고, 또 문학적인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지 공간적인 분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해 아래 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비록 해 아래에서 살아가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해 아래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해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의 자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 아래라는 말은 신학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해 아래라는 말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인간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자기가 주인이 돼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심할 경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한국연극영화계의 전설로 손꼽히는 분 가운데 강계식 선생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 1941년에 연극배우로 데뷔해서 2000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연극과 영화에 몸담아왔습니다.
한 번은 이분이 그동안 연극이 끝나고 나면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면서 짙은 허무감을 느껴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건너가게 하소서]라는 연극이 끝나고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 연극은 하나님의 민족 구원사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장로로서 이 연극에 출연해서는 매번 막이 내릴 때마다 내 생명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며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감동에 젖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연극은 막이 내릴 때 짙은 허무를 느끼게 하지만, 어떤 연극은 막이 내릴 때 감동에 젖게 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여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신의 인기와 돈을 위해 연기할 때, 그 끝에서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연기할 때, 그 끝에서 감동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금 이 점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느끼게 된 이 지독한 허무는 바로 자신이 해 아래에서 땀 흘려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 아래에서 살아갈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갈 때, 그 끝에서 헤벨 즉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점을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 아래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해 갈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이 홀로 인생길을 걷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일들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될 때 결국은 짙은 허무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허무를 극복할 길을 찾다
사실 허무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그 허무를 떨쳐버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 봅니다. 그러나 허무는 마치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져들면 스스로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듭니다.
다행히 솔로몬은 이 지독한 허무를 극복할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은 확실했습니다. 바로 해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어떻게 허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요 15:4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헤벨, 곧 허무를 느끼는 이유는 그 말 자체에서 보듯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땀 흘려 노력해서 무엇인가 나름대로 이룬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살펴보니 아무 것도 없다고 할 때, 헤벨 곧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 자부해왔지만 살펴보니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 때, 헤벨 곧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 아래 거하지 않고 주 안에 거하게 될 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열매가 우리 생각과 마음을 공격해 오는 이 헤벨 곧 허무를 몰아나게 될 것입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쓴 하나님께 바치는 노래인 [기탄잘리 81]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헛되이 보낸 많은 날들을 두고/ 나는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잃어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님은 내 생명의 모든 순간을/ 친히 님의 손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님은 모든 존재의 깊은 속에 숨어/ 씨앗을 길러 싹트게 하고
봉오리는 꽃을 피게 하고/ 꽃은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나는 고단하여 침상에 잠들면서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은 다 끝나 버렸노라고,/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자
내 정원이 꽃의 기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흘린 땀방울들이 결코 헛되지 않고 나름대로 열매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이웃에게 선한 도움을 주게 됩니다. 주님께서 열매 맺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선교사 토머스 목사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올라가며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다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체포돼서 강변에서 붙잡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조선에 왔다가 선교를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순교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열매들이 있습니다. 그가 순교당하기 직전에 전했던 성경말씀을 읽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래서 평양 장대현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교 이야기를 전해들은 존 로스 선교사가 감동을 받고 한글로 성경 번역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의 순교사건이 계기가 돼서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됐고, 그 결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가 정식으로 우리 땅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주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때 헤벨 곧 헛된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허무한 감정에 휩싸일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내가 거하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과 무관한 해 아래 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빨리 그리스도 안으로 자리를 옮기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데도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맺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더 열심히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과 삶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더 의미 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