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기쁜 소식
본문/ 눅23:54-24:12, 고전15:20-26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옆 사람 하고 인사하시죠. 혼자 예배 드리는 분은 혼자 소리쳐 보세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 각 가정에 충만하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상, 올해와 같은 부활절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지 못하고 집에서 부활절을 맞게 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하게 한 부활절이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부활절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뉴욕/뉴저지 지역에서는 요즘 하루에 약1000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의료진의 1/3 이상이 감염된 것 같아요. 심각한 상황에서 부활절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부활 사상은 복음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두 가지 교리를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 지기 쉽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어려운 교리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믿어지면 다른 것은 다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와 부활이 믿기 어려운가? (비기독교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 십자가
- 누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다면 죄를 범한 당사자가 받아야 하지, 왜 제3자가 받아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지은 사람 따로 있고, 벌 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분명히 뭔가 크게 잘못 됐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 어떻게 2000년 전 유대땅에서 일어난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가? 난센스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의 교리는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교리는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성경에서는 크게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성전의 비유 (양)– 구약 시대에 제사에서 죄 사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인의 죄가 사해지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으로 오셔서 희생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유월절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믿어지든 안 믿어지든, 그날에 양의 피가 장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죽음의 천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2 장의 비유 (노예)– 옛날 노예 시장에서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돈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 노예가 되면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대속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고, 믿는 자들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대속물”
(3) 법정의 비유(판사) – 로마 법에 의하면 죄인은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 즉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믿는 자들에게 의를 선물로 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교리입니다.(니키 검불)
하지만 아무리 좋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를 위한 사건으로 믿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실 때, 이사야53장의 의미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이사야53:5-6절을 보세요. 지난 주 고난 주간에 많이 묵상한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이사야는 주전 700년 전 남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과 우리의 자리가 맞바꾸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모든 것은 다 우리 때문이요,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세요?여러분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으로 믿어지세요? 아멘!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사실은 그의 부활 사건입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믿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해마다 부활절을 기념하며 예배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무슨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부활)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쉬웠다면, 성경에서 부활에 대해 자세히 증거할 이유도 없었겠죠. 그냥 당시 사람들이 부활을 쉽게 믿었다, 또는 다 쉽게 믿게 되어 전도할 필요도 없었다, 라고 한 마디만 기록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쉽게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적어도 세 번 이상 장차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 즉 고난과 죽음과 사흘 만에 부활할 것에 대한 예고를 해 주었지만,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먼저 목격한 사람들의 말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본문 눅24: 11절에 보면 제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난센스처럼 들었다, 허탄한 듯이 들렸다, 라고 했습니다. 도마 같은 제자는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손가락을 못 자국에,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3년이나 곁에서 보고 경험한 제자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 중에서 부활이 확실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오늘 본문 눅24:11-12절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허탄한 듯이 들렸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들렸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보면 난센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것은 난센스야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만이 소식을 듣고 무덤에 확인 차 달려가는데, 완전히 믿은 것이 아니라 놀랍게 여길 정도였던 것입니다. 빈 부덤과 세마포를 보니 참 이상하다, 라고 생각한 것이지, 부활을 확신하진 못했습니다.
빈 무덤과 예수님의 수의는 부활의 증거임에는 틀림 없지만, 사람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빈 무덤과 세마포가 부활의 확실한 증거라고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 그렇다면 부활이 믿기 어렵고, 잘 안 믿어지는데, 그러면 부활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면 반드시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믿어져야 합니다. 더 더욱 믿을만한 진실입니다.
여러분, 믿기 어려운 것과, 믿을 수 없는 것과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믿기 어려워도 사실이고, 진리인 것도 있고, 반대로 잘 믿어지고, 믿을만한 사실인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진실이고, 믿어야 할 진리입니다.
· 어떻게 부활이 믿을 만한 사실인가?
1) 목격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목격자들을 세어보면, 최소한 500명 이상이 됩니다. 법적으로도 두세 명만 확실히 보면,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증인 중에서도 여성들이 첫 목격자로 등장하는 것도 믿을만한 사실임을 증거합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꾸며내려고 했다면, 증인을 여성으로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이 20세기 일어났습니다. (1920년)
오늘 본문에도 최초의 목격자들이 여성들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름까지 적어 놓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및 여러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남자인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다 어디 가고 여자들이 용기를 냈는지, 첫 부활의 목격자들이 되었는지 남자로서 부끄럽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곁을 지킨 사람들도 여자들이었고, 향품을 준비해서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간 사람들도 여자들이었습니다.
눅23:54-56절을 보세요. 무덤에 가기 위해 얼마나 준비를 서두르는지 보세요. 금요일에 돌아가셨는데, 무덤과 그 시체가 어디 두었는지 확인하고 옵니다. 그리고 향품과 향유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자, 백 미터 경주에서 출발하듯이 무덤을 향해 달렸던 것입니다.
눅24:1-2:-절을 보세요.
“인식 후 첫 날 새벽” – 아직 날이 밝기 전입니다. 어둑어둑할 때, 여자들이 두려움도 잊고 무덤을 향해 간 것입니다.
게다가 마가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이 여자들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드리려고 향품을 가지고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새벽에 무덤으로 향하면서,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문을 열어 주지?” 하면서 갔습니다. 즉 이 여자들은 무덤 문을 열어 줄 사람도 없는데, 무덤을 향해 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행동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랑하면 용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 여인들에겐 로마 병사들도, 이른 새벽의 어둠도, 묘지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은 것입니다.
예화) 부활절을 맞아서, 남자들은 반성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성들이 믿음에 있어서 휠씬 뜨겁고 헌신적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때에서 권사님들이 더 앞장서서 마스크도 만들고, 중보기도도 더 많이 해 주시면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코로나와 싸우는 의료진들도 여자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2/3는 여성들일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에서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들어가 보았는데,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놀랐습니다. 처음엔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누가 시신을 훔쳐간 줄로 알았습니다.
두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눅24:4-9절입니다. 이 천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결국 천사들의 증언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제야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졌습니다.
성경에서 첫 목격자들로 여성을 내세우는 것도 믿을만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가장 확실한 증거는 제자들의 삶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전과 후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행의 제자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신앙과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전도나 설교에서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관건은 확신의 차이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전하면 진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2 용기가 생겼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산헤드린 앞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아세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
이제 사도들은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처넣어도 상관 없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은 오히려 복음이 더 멀리 퍼져가게 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에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로마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은 더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한 전력 때문에 더 열심을 낸 측면도 있습니다.
적대자들이 때리고 고발하고 감옥에 갇히게 하여도 그의 복음 전도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 영향력은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열세 권의 성경을 기록해서 성경이 되게 했습니다. 더 깊게 더 멀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없었고, 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3) 무엇보다도 초대 교회 성도들의 변화된 삶은 사랑과 거룩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했던 로마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실천자들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처리하고, 장례식을 치뤄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핍박 속에서도 300년이 안 되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 여러분, 부활이 잘 안 믿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활이 믿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에 이어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0 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그 둘 중에 하나는 글로바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큰 실망과 함께 기대를 갖고,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실망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뭔가 큰 일을 하실 줄 알았는데,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이요, 기대는, 누군가의 말에 무덤이 비어 있었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 대화 중에 예수님이 동행하셨는데도, 처음엔 그들이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경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증거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특히 같이 식사할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신 후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눅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무엇을 가지고 당시의 부활을 증거하셨나요?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와서 봐라, 보란 말이야, 내가 부활한 예수란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표적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셨습니다.
눅24:30-31절을 보세요. 언제 두 제자의 영안이 열렸어요?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여기서 떡을 떼시고 축사하신 것은 성만찬을 연상시킵니다. 성만찬은 예배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 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잘 안 믿어지거나, 누군가에게 부활을 증거하려고 할 때, 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그리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의 눈이 열려, 부활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복음이 달라진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하신 것도 아닙니다. 초대교회나 오늘날이나 복음도 똑같고 예수님도 동일하십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 우리들이 주님과의 관계에서 너무나 멀어져 있다, 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한 교제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공동체가 약화되었습니다. 함께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과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언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첫 열매가 열렸다는 것은 계속해서 같은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15:12-13절,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다면 성도의 부활도 확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20-22절도 보세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런데 부활에는 순서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로 깨달은 말씀입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 그 다음은 예수님의 재림 때의 그리스도인들( 살아 있는 성도뿐 아니라 죽은 성도도 포함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의하면, 죽은 성도가 먼저 부활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모든 세상 나라가 끝나게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의 재림과 죽음의 멸망(죽음의 소멸)으로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은 완전히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전15:23-26절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오늘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들의 믿음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부활절을 지키고 있지만, 진심으로 부활을 믿고 살고 있나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삶으로 표현되고 있나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이웃 사랑의 실천, 타락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나요? 여러분이 뉴욕에 거주하는 의료인이라면 감염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성심성의껏 돌볼 수 있나요?
오늘 부활절이 그냥 해마다 형식적으로 기념하는 절기가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장차 우리도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것을 믿는지 확인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결단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 것을 결단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상은 결코 머리로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상이 아닙니다. 결코 관념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실제적입니다. 십자가는 죄사함의 축복을 경험하게 합니다. 죄에서 자유케 하며 죄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 주고, 소망 중에 환난도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부활 신앙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현재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생활을 하며, 이웃 사랑을 기꺼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장차 부활에 참여할 것을 확신하며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 조차도 의연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부활 신앙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부활신앙으로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