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재앙을 통해서 깨닫는 교훈

 

출 10:21-29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할 때 10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애굽왕 바로가 선선히 이스라엘백성을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께서 이 10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치신 것입니다.

   바로가 통치하던 지금부터 약 3, 4천여 년 전 고대 애굽은 풍부한 노동력으로 대제국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피라미드나 룩소의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나일강의 홍수와 맞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바로 시대에 이 노동력은 주로 장정만 6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백성이 담당했습니다.

   바로는 만일 이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다면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을 놓아주지 못하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9번이나 되는 재앙을 당하고서도, 놓아줄 것처럼 하고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장자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손을 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10가지 재앙들은 점차 그 강도가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재앙을 당하고서도 버틴다면 다음 재앙은 당연히 앞의 재앙보다는 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재앙들은 점점 더 강도를 더 해가다가, 마지막 장자재앙에 와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려는 재앙은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재앙입니다. 상식적으로 흑암재앙을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한 가지는 도대체 흑암이 어떻게 재앙이 되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매일 저녁마다 흑암이 반복해서 찾아오는데, 낮에도 흑암이 머물러 있다고 그것을 재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 북극권에 가면 겨울에는 거의 종일 밤처럼 캄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낮에도 불을 켜놓습니다. 애굽사람들도 이렇게 흑암이 찾아들었을 때 불을 켜두면 되지 않았을까요?

   또 한 가지는 흑암이 재앙이라고 해도 아홉 번째나 되는 정도의 강도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재앙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메뚜기 떼가 날아와서 지면을 뒤덮었습니다. 사람들이 땅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온 지면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곡식, 채소, 풀, 나무 가릴 것 없이 다 먹어치웠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사는 집에도 메뚜기 떼가 밀려들었습니다. 애굽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신하들이 바로를 찾아와서 울부짖으며 이스라엘백성을 놓아주라고 소리칩니다. 자 흑암재앙이 어떻게 이보다 더 강도가 센 재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2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여기서 이 명령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흑암은 어둠인데, 이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빛이 없게 하라!”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흑암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 이상의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흑암은 불을 밝혀도 사라지지 않는, 전혀 다른 어둠인 것입니다. 이 흑암이 재앙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살펴봐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원어 그대로 직역을 해 보면 “흑암이 더듬어 찾도록 만들 것이다.”(darkness will cause to grope)입니다.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더듬어서 길을 찾는 것처럼, 눈이 있어도 전혀 보지 못하게 만드는 흑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흑암은 시각장애인들이 대낮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흑암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전혀 볼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흑암입니다. 그래서 이 흑암이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세가 순종하여 그 손을 내밀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만드는 흑암, 모두를 마치 시각장애인처럼 더듬거리게 만드는 흑암이 온 애굽 땅을 뒤덮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흑암이 애굽 온 땅에 삼일 동안이나 지속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일 동안 서로 볼 수도 없고, 집에서 나와 길거리를 걷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백성을 내 보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가 흑암재앙을 당하면서 두 손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이 흑암재앙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서 깨달아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역설적으로 깨닫는 은혜

 

   하나님께서 흑암재앙을 내리시자 애굽에는 깊은 흑암이 찾아들었습니다. 창 1:2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창조되기 전 흑암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100% 어둠으로 가득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애굽에는 창조 전의 이 흑암으로 뒤 덮여있었던 것입니다.

   이 흑암이 애굽에 뒤덮이자 사람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볼 수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서로 볼 수 없어서 사람 사이의 만남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어서 모든 생활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에게서 이런 변화가 주는 고통은 보던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됐다는데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애굽 사람들이 다른 재앙을 당했을 때와 달리 조용합니다. 피해를 호소하며 몸부림치고 울부짖고 하던 모습이 간 데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충격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지금 보이지 않는 불편함보다 흑암 속에 던져진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은혜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대자연과 아름다운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것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정보를 얻고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것 큰 은혜입니다.

   막 8:18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흑암에 뒤덮여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먹거리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사건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고 남게 하신 사건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칠병이어의 사건입니다.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배부르게 먹고 남게 하신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미 두 차례 친히 먹이신 주님께서 자기들 곁에 계신 데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염려 걱정이라는 영적인 흑암에 뒤덮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것 큰 은혜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보지 못한다면 애굽사람들이 보지 못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었던 것처럼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는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 23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함께 모여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 땅 전체에 흑암이 뒤덮여있었지만 이스라엘백성이 머물러있던 고센 땅에만 흑암이 드리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당시 고센 땅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자기들이 머물러 있는 땅 밖에 울타리를 두르듯 짙은 흑암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애굽사람들은 모두가 그 흑암 속에서 두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흑암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하셨다는 아주 특별한 은혜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주 안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다릅니다. 주님 손잡고 인생길을 걷는 사람과 자기 혼자 인생길을 걷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다릅니다.

   시 31:1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이 말씀은 다윗이 쓴 시의 한 부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가 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쌓아두신”이라는 말은 “차판”(צפן)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차판이라는 말은 “숨겨놓다”, “비장(秘藏)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비장의 카드로 숨겨놓으셨던 은혜를 받은 체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사람들은 흑암에 사로잡혀있더라도 이스라엘백성들은 빛 가운데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쌓아두신 은혜 곧 차판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코로나19의 참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납니다. 우리가 주께 피할 때 하나님께서 쌓아두신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차판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체험으로 깨닫는 신앙

 

   구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대체로 이 10가지 재앙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바로와 애굽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을 내보내지 않으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경고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백성에 대한 교훈의 메시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백성은 4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애굽의 영적환경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여러 가지 신들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그 신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이런 이스라엘백성에게 그 신들은 다 사람이 만든 우상일 뿐이고, 참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왜 이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이 10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하나씩 심판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실제로 출 12: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마지막 장자재앙을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장자재앙을 끝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의 모든 신을 다 심판하시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흑암재앙은 어떤 신을 심판한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당시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신들 가운데 최고봉인 태양신에 대한 심판입니다.

   애굽은 사막의 나라입니다. 애굽에서 태양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시대부터 이 태양은 애굽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아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애굽사람들은 이 태양을 다양한 모습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태양의 그 모습에 따라 태양신이 여럿 존재했습니다.

   우선 아몬(Amon)인데, 태양의 숨겨진 면을 상징하는 신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신으로 모든 신과 만물을 창조한 신으로 여겨집니다. 둘째는 레(Re) 또는 라(Ra)인데, 정오의 태양을 상징하는 신입니다. 셋째는 케프리(Khepri)인데,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하는 신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아툼(Atum)인데 서쪽에 지는 태양을 상징하는 신입니다.

   당시 애굽사람들이 가장 추앙하던 신이 이 태양신 네 신입니다. 그리고 바로는 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신처럼 받들어졌습니다. 가장 강력한 바로 가운데 한 사람 이름이 라암셋입니다. “태양신인 라신이 나를 낳았다.”라는 뜻입니다.

   흑암재앙은 이 태양신들과 바로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흑암을 보내시자 그들이 신중의 신이라 믿었던 아몬도, 가장 강력한 태양을 뜻하는 정오의 태양 라도, 그 흑암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바로도 흑암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들이 모두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데 위세를 떨던 바로도 연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이 누구신가 자기들이 믿고 섬겨야 할 신이 누구신가를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대로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 애굽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가나안 땅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 이 시대에도 본문의 애굽시대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참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가 있고 참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종교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모든 종교를 존중해야 하고, 다른 신들도 인정하며 더불어 살자는 영적 분위기입니다.

   최근에 바로를 신으로 추앙하듯 사람을 신처럼 부르는 일들도 생겨났습니다. 국민 MC라 불리는 유재석씨를 ‘유느님’이라 부르며 신과 동급이라고 부릅니다. ‘트롯신’이니 ‘장사의 신’이니, ‘투자의 신’이니 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신의 반열로 높이기까지 합니다. 정말 영적으로 혼미한 시대입니다. 무엇이 신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영적 분위기입니다.

   사 45:5-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외에 신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흑암재앙은 바로 하나님께서 영적인 혼란 가운데 살고 있던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만이 신이시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외에 신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 많은 신들 그리고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 모두가 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흑암재앙과 같은 과정으로 우리에게 이점을 알게 해주고계십니다. 우리가 잘 깨달아서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직 우리가 믿고 섬겨야 할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점을 깨닫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