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지금 여기에)
본문/ 창28:10-22; 한436장(1,3,4절), 228장
2021년 표어를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자’라고 정했습니다.
왜 이렇게 정했는가?
오랫동안 제게 있던 고민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이중성 문제입니다. 왜 겉과 속이 다를까? 왜 말과 행동, 믿음과 삶의 분리될까? 왜 교회에서 모습과 가정이나 사회 속에서의 모습이 다를까?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 1차적 원인은 인간의 죄성과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두 번은 잘할 수 있지만 계속 잘하기는 어렵습니다. 한두 곳에서는 잘 할 수 있지만, 어디서나 잘하기는 어렵습니다.
- 그런데 더 근본적인 원인은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한 달 간은 “어떻게 하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
성경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쳐서 하나님을 실망시킨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출애굽기로부터만 보아도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할 때부터 실망, 또 실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망각하고, 불평불만, 원망을 쏟아 놓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순종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였는데, 각종 우상 숭배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첫 임금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왕을 세운 것을 후회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쳤습니다. 솔로몬도 처음엔 좋았는데 차차 변질되었습니다. 정략 결혼을 통해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 이후에 나라가 둘로 쪼개지더니, 급기야 주전722년에는 북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약 150년 후, 주전586년에는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망하고,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심판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타락, 이중성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성도라고 하지만,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맛 잃은 소금처럼,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전도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은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딤후3:5)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만, 월요일엔 다릅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만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예배 때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지만, 평상시의 삶은 다릅니다.
이런 이중성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왜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을까요? 왜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까요?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지,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야곱의 하나님 체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챈 후에,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떠나는 첫째 목적은 배우자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실상은 형의 노여움을 피하여 살기 위해 도망치는 것입니다.
당시에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함께 이스라엘 남쪽 지방인 브엘세바에 살고 있었는데, 외삼촌이 살고 있던 하란을 향하여 북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서 해가 져서 유숙하게 된 것입니다.
하루는 야곱이 들판에서 돌베게를 베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아, 하늘의 별들을 하나 둘 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게 되었는데, 사닥다리 (또는 층계)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에서 위로 하늘에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그 때 사다리 위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4)
야곱은 이 말씀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격려와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는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렵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 깨닫게 된 놀라운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28:16-19을 보세요.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은 이 날에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분이신데, 이 진리를 놓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긴 알았는데,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인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패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 생활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그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는 아는데, 피상적으로 아는 것,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하란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돌베게를 자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지, 체험적으로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 아침에 놀라운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었다.”
신앙 생활의 실패의 원인 –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면,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야곱처럼 체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요, 절대자이십니다.
모세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뜻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피조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 절대자이십니다.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다른 신과 비교할 수도 없으며, 인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2) 둘째로,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요, 언제 어디서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깨달은 것도 하나님은 영으로 언제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하시면서 영과 진리의 예배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느니라.”
하나님이 영시라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예배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계시며,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예배의 태도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온라인 예배든 오프 라인 예배든 상관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어떤 사람은 예배에서 실패하는지 아세요? 예배에서 실패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께서 지금 영으로 함께 하시며, 내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온 라인 예배)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빈번해 질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요, 온라인 예배에서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예배가 기냐 짧으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 화질이 좋고 나쁘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 예배가 재미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 각각의 예배자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어떻게 믿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야곱-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는데, 관념적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 나의 삶과 관련이 없는 문으로 알았습니다. 조상의 하나님으로 알았지 자기 자신의 하나님으로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벧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은 여기,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너무 신기해서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기 계신데 내가 알기 못했구나!”
(3)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이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도적적 성품’에 대해 우리가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귀신이나 우상과 다른 점은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도덕적으로 의롭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잘 알지 못하면, 신앙이 미신으로 변질되고, 세상의 우상 숭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귀신을 닮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 요한1서 1장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빛 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죄를 미워하고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1:5-7절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빛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죄를 미워하고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2021년 새해엔 항상 죄를 미워하고 거룩한 빛 가운데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또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이 없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반론의 여지 없이 우리도 사랑 가운데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야곱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야곱이 보인 믿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하나님을 체험한 곳을 기억하기 위해, 베개 삼았던 돌을 취하여 세우고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야곱은 그 은혜 받은 순간과 그 장소를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변치 않는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도 벧엘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매 주일에 모여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때, 매일 말씀 묵상을 통해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날마다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야곱이 보인 믿음의 반응은 서원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헌신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 서원 기도를 올렸습니다.
-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다시 평안히 집에 돌아오게 해 주시면, 영원히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그곳에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 그리고 또 한 가지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창28:20-22절을 보세요.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여러분, 누가 신실하냐 아니냐는 무엇을 말하느냐 보다 말한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약속을 했을 때엔 사람이 약속을 잘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는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잘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새해 들어서, 우리도 하나님께 서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야곱과 똑같은 서원을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기도 중에 나름대로 결심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면서, 하나님께 뭔가를 약속을 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 서원을 다 들으셨습니다. 반드시 여러분과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한 순간도 여러분을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주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시139:7-10절을 보세요.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한 순간도 이 귀한 진리를 잊지 마시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한 약속이 있다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성실히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살다 보면, 2021년에 여러분의 신앙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성장하고 성숙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히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