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본문/ 벧전2:1-12
우리는 지금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민자들을 세대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누면, 이민 1세, 이민1.5세, 이민2세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부류 중에서 어느 그룹이 가장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생각할 시간을 준다)
각각 힘든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1세 – 언어(영어) 문제가 가장 힘들 것입니다.
1.5세 - 중간 세대인데요, 정체성의 혼란의 문제가 있을 지 모릅니다. 한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미국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누구지,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세 – 미국에서 살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부모 세대와의 소통이 되지 않는 것, 한국인이라서 백인 주류 사회에 진입하려고 할 때, 좌절감을 맛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민1세라서 1.5세나 2세의 어려움이나 고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민1.5세나 2세대가 더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아주 힘든 문제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입니다. 자기 소속감이 분명할 때, 안정감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지만, 소속이 불분명하고, 정체성이 불분명하면, 불안하고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설교 제목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데요, 정체성이란 말이 약간은 어려운 단어입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갖는 특성’, ‘존재의 본질 또는 이를 규명하는 성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identity라고 할 수 있고요, 비슷한 말로 identification(신원확인)- I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ID를 신분증이라고 하니까, 정체성을 쉽게 얘기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증”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청소년기에 분명하게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반항도 하고 방황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바른 정체성이 세워지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민 1.5세나, 2세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는 더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정체성이 세워지지 않은 사람이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고 살게 되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때,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몇 가지 중요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벧전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Once you were not a people, but now you are the people of God; once you had not received mercy, but now you have received mercy.)
예수님을 믿기 전과 후 – 이 변화는 역사가 BC와 AD로 나누이는 것처럼, 신분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어둠의 백성이었는데, 믿은 후에 빛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옛 사람이었는데, 믿은 후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마귀의 지배를 받는 백성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라는 것보다 더 좋은 특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인도, 돌봄을 받는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난민들이 국경을 넘거나 다른 나라 대사관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TV에서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도 미국이나 독일의 대사관을 향해 다려 가는데요, 일단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국 공안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전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왜요? 통치 영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통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패스포트가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변화에 대해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언을 들어보세요. 빌3: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신분증이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신분증 – 한국이나 미국 시민의 신분증이 있으며,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시민의 신분증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겠습니까?당연히 하늘의 시민으로서의 신분증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는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 시민권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두 번째로 이야기 하는 것은 ,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벧전2:11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Dear friends, I urge you, as aliens and strangers in the world, to abstain from sinful desires, which war against your soul.)
거류민 : 남의 나라 영토에 머무는 사람
나그네 :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무는 사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신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상이 –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 또는 인생은 풀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관주의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벧전1:24-25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풀 - 길어야 몇 달 동안 푸르름을 자랑합니다. 한 철입니다. 풀의 꽃의 영광은 더 짧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의 인생 – 길어야 7-80입니다. 유한합니다.
시편90:9-10절에서 모세는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영원한 시간에 빗대어 볼 때, 인생은 풀의 꽃처럼 짧게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예화 - 트럼트 대통령의 권력을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본향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11:13-16절을 보세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정체성- 하늘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생은 풀의 꽃과 같이 아주 짧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한 가치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과 달리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임을 망각하여 큰 낭패를 만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그의 선택부터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세상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의 우선권을 주었을 때, 소돔 땅을 선택했습니다. 아직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에 그 지역이 좋아 보여서 택하였습니다. 요단 들이 마치 에덴 동산과 같았고, 애굽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데요, 소돔 사람들의 부도덕과 악행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함께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그는 소돔 성과 함께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롯은 소돔성에 살 때에, 외국인과 나그네의 모습이 아니라 그 도시의 시민처럼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19:9절에 보면, 소돔 사람들이 롯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가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네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한다’는 표현으로 볼 때, 롯은 소돔성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롯이 좋은 의도가 있었겠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할 나그네로서보다 그 도시의 시민으로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지혜롭게 살려면, 우리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잠깐 왔다 가는 거류민이요 나그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셋째로,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은 제사장 직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어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누구나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갖게 되었다, 라는 것은 구약 시대에 비교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 시대엔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구약 시대엔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1회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피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심으로써,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의 직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더 설명을 하겠지만, 제사장 직분은 특권이라기 보다는 책임이 강조되는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일반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였던 직분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하지 못하고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직분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성도의 제사장 직분도 마찬 가지입니다. 특권보다 책임이 큰 직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살아야 할 이유는 정체성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체성을 갖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 정체성은 의사나 간호사 가운과 같은 것입니다. 의사나 간호사는 평상복을 벗고 하얀 옷을 입게 되면 그 옷에 합당하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베드로는 몇 가지 실제적인 권면을 합니다.
(1) 우선 버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믿지 않을 때에 가지고 있었던 불경건한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벧전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쓰레기를 버리듯이 버려야 할 죄악들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기만과 외식(이중성), 시기와 비방하고 비판하는 말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죄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교인들 중에- 여전히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비판(비방)이 있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이런 죄된 습성들은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 갓난 아기들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계속 믿음이 자라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벧전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갓난 아기- 젖을 줄 때까지 웁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신앙 성장의 필수 두 요소 중에 하나가 말씀을 사모하는 것과 고난을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은 신령한 젖입니다.
(3)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면,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 항상 나아가서 산 돌이신 예수님처럼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과 교제하고 동행함으로써,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벧전2:4-5절을 보세요.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리스도인은 한시도 그리스도 예수님과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와 교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모든 면에서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함께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믿음의 공동체에서 함께 자라가고 있나요?
2)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갖아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욕심이나 미련을 버리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거류민과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염려와 두려움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 사도는 벧전2: 11절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대로 순응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롯은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 땅에 살 때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서 모세의 믿음을 묘사할 때, 참 감동적입니다. 모세는 이 세상의 영광보다 하늘의 상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 땅에서 철저히 나그네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3) 셋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책임을 다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 – 아주 독특한 직분입니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과 죄인의 중간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직분입니다.
성경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언급할 때는, 항상 책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는 레위 지파, 그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았는데요, 확대 해석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는 제사장 민족,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세계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복을 받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출19:4-6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은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의 관심-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해 주시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 민족에게 전파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28장의 지상 명령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훈련하여 파송하시는 목적도 다르지 않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도의 사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게 되는데요,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세상에서의 복음 전도의 사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5장에서 복음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롬15: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을 통해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벧전2:9절을 다시 보세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어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이 구원의 복음은 감추고 보관할 소식이 아니라 널리 전파하여 사람들을 구원해 내야 할 소식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말로써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삶으로써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가 권면합니다.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받았습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로서의 정체성, 복음의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여, 그 정체성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하는 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