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

< 본문 마태복음 26:62-65 >

 

  세계 3대 박물관 중에 하나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에는 모나리자를 비롯한 유명한 명화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그림1) 가로 9.8m에 세로 6.2m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이 그림에는 등장하는 인물만도 204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1804년에 있었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본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사실 이 안에는 조작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결혼한 것을 싫어하여 대관식에 참석하지도 않는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그림 중앙에 그려넣는 것도 그렇고, 작은 키로 유명한 나폴레옹의 키를 훨씬 크게 그린 것도 조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조작된 장면은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입니다.

  당시 황제의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줌으로써 세속의 권력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해야 함을 천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왕관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나폴레옹(Napoleon, 1769-1821)은 이탈리아의 속국이었던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쿠데타를 통해서 제1통령이 된 후에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야욕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라는 한 나라의 왕이 아닌 유럽의 군주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아닌 제국의 군주가 되고 싶어하던 나폴레옹은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교황이 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관례를 깨고,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왕관을 썼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궁중 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황제의 대관식이 있은 후 3년 동안 황제의 대관식장면은 그리면서, 나폴레옹이 교황에게서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쓰는 장면은 왠지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는지 나폴레옹이 왕관을 왕비 조세핀에게 쓰워주는 장면으로 그렸습니다.(그림2) 그리고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도록 로마에서 강제로 호송된 교황 비오 7(Pius VII)는 그 뒤에서 어정쩡한 모습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교황은 그래도 교권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뒤에서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손가락 3개를 펴서 나폴레옹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교황의 권위도 무시하고 스스로 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던 나폴레옹! 그러나 그 나폴레옹의 최후는 비극이었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10년 만에 나폴레옹은 실각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인 1815년 엘바섬을 탈출하여 권력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그의 권력은 불과 100일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몰락하고 맙니다. 그 후 그는 영국 정부에 의해서 다시 남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당하게 되고, 거기에서 그는 그 섬의 총독에게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자부심이 강한 나폴레옹을 무례하게 대했고,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며 조롱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의사의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18215월 그는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변변찮은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했기에 누구보다도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적 질곡 속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그는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의 황제 등극은 시대적으로는 루이 16세를 계승한 것이었지만, 그의 정치적인 야망은 천년 전 유럽 최대 영토를 장악했던 프랑크 왕국의 사를마뉴 대제(Charlemagne, the Great, 742-814)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럽대륙을 통일시킬 황제이기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머리에 쓸 정도로 자신을 높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야망은 조금씩 이뤄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10년 만에 자신의 왕좌에서 내려와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야망을 가졌던 나폴레옹이었지만 그의 말년은 외롭고 쓸쓸하게 버려진 존재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지, 어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지, 그의 인생 말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는 알지 못할지라도 나폴레옹 황제라는 이름만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기억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이 하더라도, 아무리 큰 권력을 꿈꾸었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는 그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반드시 오고 맙니다. 세상의 권력은 다 그렇게 무위로 돌아가는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늘 무한대한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서 부단히도 기를 씁니다. 21세기인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최첨단 과학시대, 냉철한 이성주의의 시대에도 그런 권력에 대한 탐욕은 끊이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접하는 것처럼, 중국의 시진핑이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진행된 6중 전회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장기집권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지난 2018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 주석의 임기제한을 없애버리고, 선교사들을 추방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수순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시진핑은 중국에서 영웅적인 존재, 더 나아가 신적인 존재처럼 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실권자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막강한 권력은 손에 쥔다 한들, 그 권력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뭔가 권력이나 힘을 손에 쥐려고 안간힘을 쓰며 삽니다. 비록 모두가 황제가 되려 하거나 절대권력을 가지려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같이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황제의 권력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러나 힘이 없다고 하는 우리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조금씩이나마 권력을 가지려고 애를 쓰며 삽니다. 때로는 그 권력이 돈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애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그 권력이 자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권력이 인기나 성공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더 많은 인기와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려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권력은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마음을 절제하고 먼저 낮아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심문은 예수님께 어떤 죄가 있느냐는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에게서 분명한 증거를 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예수님의 죄를 증명하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마지막으로 에수님을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은 성전모독죄를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 사람의 증인을 내세워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서 지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죄를 추궁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물론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 나오는 요한복음 2:21절에서 그 말씀의 의도를 분명하게 전달한 것처럼, ‘성전된 자기 육체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죄의 꼬투리를 잡아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으로 예수님을 압박했습니다.

 

  성전모독죄를 지었다는 증인들의 증언에 이어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대답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 6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증인들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은 조급한 듯 계속해서 재촉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분명하게 말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시면 그것으로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죄가 있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죄와 성전모독죄입니다. 지금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잠잠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6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의 분노는 극이 달했습니다. 65절입니다.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는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이기에 신성모독이라며 대제사장이 이렇게 분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 왕권의 보좌에 앉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대신에 다른 말로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늘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 많이 나타나는 하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곧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관용구입니다. 그런 관용구 가운데 하나가 권능입니다. 이 권능도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처럼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보좌 우편, 권능의 자리에 앉으실 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왕권의 자리에 앉으실 분이라고 말씀하시자 대제사장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신성모독을 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신 것처럼, 예수님 또한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신 것처럼, 예수님 또한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비록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애초부터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왕이셨음을 자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 때, 비롯 세상의 왕처럼 왕궁의 요람에서 태어나신 것은 아니지만 동방박사들로부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 받으신 온 세상의 왕이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영들의 세계까지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풍랑을 잔잔케 하심으로 자연의 질서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온 우주의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어느 정복자나 왕처럼 화려하고 위엄있게 수려한 말을 타지 않으시고 대신 초라한 나귀를 타고 가셨지만, 그분이야말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왕으로 당신이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땅에 오셨지만, 그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할 세상이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은 빛으로 오신 그분을 영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주님은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지만,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그게 바로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비록 지금은 한없이 약한 자처럼 보입니다. 거짓 증인들의 증언에 의해서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군병들의 조롱을 그대로 당하시고, 침을 뱉으면 침에 맞는 모욕을 당하시고, 채찍으로 내리치면 그 채찍질을 다 당하셔야 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행악자의 조롱도 참으시며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어느 모습 속에서도 왕의 체면이나 왕의 위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지금은 조롱을 당하시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언젠가 마지막 날 왕의 위엄으로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때에는 세상 그 누구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흰보좌 앞에서 왕의 위엄으로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 심판에서 긍휼을 입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작은 권력과 힘을 가지고 마치 내가 왕인 것처럼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진짜 왕이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나의 작은 권력으로 왕노릇 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그 왕노릇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를 철저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칼날에 목숨을 잃어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어 죽어갔고,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불에 태워져 죽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요? 주님이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도 지금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 권력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권력도 다시 오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하늘 구름을 타고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우리가 매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는 것처럼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주님께서 왕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때 인류의 역사는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잘 들어보지 못한 낯선 말입니다. 교회의 절기를 중심으로 한 교회력은 대림절을 기점으로 한 해가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다음 주일이 그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러니까 다음 주일은 교회력으로 새해 첫 번째 주일이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갖게 해 줍니다. 우리 인간의 생애도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을 만남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세계의 역사도 주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것을 상기하면서 지키는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은 만왕의 왕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억하며 지키는 주일입니다.

 

  여러분,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고 계십니까?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하는 자세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왕이신 주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왕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백성들은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주님의 명령을 받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왕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의 왕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며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면 왕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왕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하늘나라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또 당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로는 낮아지시고, 때로는 품어주시고, 때로는 용서하시고, 때로는 거짓과 불의에 저항하시며,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침묵하시며, 때로는 기도하시며, 때로는 찬양하시며, 때로는 하늘나라의 당당함으로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신앙인으로 사십시다.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내 삶에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사십시다.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산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왕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