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
요 4:20-26
주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마리아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심령 저 깊은 곳에서 자신을 괴롭혀왔던 죄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되었고,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큰 은혜를 받고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참되게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예배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예배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예배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주일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예배 시간 감사와 감격이 온통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예배가 무거운 짐입니다. 왜 그렇게 주일은 빨리 찾아오는지...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예배 자리를 찾아오기는 합니다. 왜 예배 시간은 그렇게도 길게 만 느껴지는지... 예배 시간 내내 지루하고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창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 형제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비극으로 이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몇 가지 점을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배라고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드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가인이 거절당한 자기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려 하지 않고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인 것을 보면서, 예배에 문제가 생기면 인생에 더 큰 문제가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참되게 예배드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의 예배에 대한 질문에 답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 23절에 우리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배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는 뜻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가인처럼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 중에 아벨처럼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찾으신다는 말은 성경원어로 ‘제테오’(ζητέω)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제테오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눅 15:8-10에 나오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한 여인이 집안에서 동전 열 개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불을 켜고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찾았습니다. 이 때 찾는다고 한 말이 제테오입니다. 그리고 그 동전을 찾은 뒤에 너무 기뻐서 친구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그 만큼 찾기가 힘이 드신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을 찾으신 뒤에 너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자
본문 2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신데, 그분은 영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왜 예배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씀부터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보실 때 우리가 참되게 예배하지 못하는 가장 우선적인 잘못은 하나님께서 영이신지 모른 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 불신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했고, 또 지켜보았습니다. 늘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제사를 위해서는 아끼지 않고 최고의 음식을 차렸습니다. 평상시 먹을 수 없던 과일, 고기, 음식들을 정성껏 차렸습니다. 그런데 당일 잠깐 제사상 앞에서 절하고는 음식을 내려서 참여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궁금해서 아버님께 여쭈었습니다. “왜 이렇게 정성껏 음식을 차려야 합니까? 이 음식은 누가 먹습니까?” 아버님께서 당황해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조상님들이 오셔서 드신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제삿밥을 드시려고 1년에 한 번 오신다는데, 혼령으로 오신다면서 어떻게 사람이 먹는 이런 음식을 드시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은 어머님을 따라 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불당에도 부처님 앞에 과일과 음식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불자들이 절을 했습니다. 같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 음식은 누가 먹는가? 돌로 만든 저 부처님이 드시는가?” 누구도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으로 무지해서입니다.
우선 이들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잘못 섬겼습니다. 조상을 하나님처럼 섬겼고,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길 때 사람을 섬기듯 했습니다. 그 앞에 가서 음식을 차려놓고 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름대로 종교를 만들고,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무지해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예배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신을 마치 사람을 섬기듯 섬겨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예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문제가 바로 장소문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반드시 예루살렘성전에 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 갈 수가 없어서,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라고 공격했고,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다고 다투었습니다. 결국 참된 예배여부가 장소가 어디냐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논쟁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바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해야 하느냐 아니면 사마리아에서도 예배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은, 자칫 영이신 하나님을 어떤 장소에 갇혀계신 분으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어디에서나 예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되게 예배하기 위해 연구하고 논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배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느냐 하는 문제도 연구하고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기에 적절한 장소냐 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어야 합니다.
오늘 온라인 문제에 대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과연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를 참된 예배로 인정할 것인가? 과연 온라인을 통해서도 공동체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들여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팬데믹의 위기상황에서는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드릴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런 논쟁보다도 어떻게 하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든, 영이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참되게 예배하려면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드려야 할까요? 본문에서 주님께서 너무도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4절을 보면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참되게 예배하려면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구약시대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대로 양해하시고 그런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참되게 예배드릴 때 즉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그 때는 언제일까요? 바로 성령이 강림하시는 때입니다. 실제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신 뒤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꼭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제물을 불살라 드리던 제사형식의 예배가 사라졌습니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이 중심이 되는 영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신 뒤 예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예배자로 세워졌습니다. 성령으로 그들의 영이 새로워졌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영안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양을 드릴 영적 입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열렸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되게 예배하기 위한 대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참되게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지금 성령이 충만한지...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배해야 할까요?
첫째, 영으로 예배하자
우선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예배 자리에 영으로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고 교제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 안에 영이 있습니다. 이 영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위축되기도 하고, 역동적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마치 추운 겨울이 오면 굴속에 들어가 동면을 하고, 따뜻한 봄이 되면 밖으로 나와 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 짓는 자리, 음란한 자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자리에 있을 때 우리의 영은 동면하듯 위축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자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에 있을 때 우리의 영은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제가 대학시절 영적인 충격을 받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서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예배순서가 교회예배와 달리 아주 간단했습니다. 참여한 사람들과 인도자들의 복장이 자유로웠습니다. 잘 모르는 찬양을 드리고 있었고, 기도형식과 내용이 낯설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고 드리던 예배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함께 예배드리면서 제가 영적으로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영이 기뻐 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양을 함께 부르며 내 영이 춤을 추는 것 같았고, 기도할 때 내 영이 크게 소리 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영이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영이 즐거워하고, 힘 있게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가 복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눌리고 위축되었던 우리의 영이 예배하며 회복됩니다. 상처받고 찢긴 영이 위로받고 치유됩니다. 우리의 영이 찬양하며 기쁨을 회복하고, 기도하며 새 힘을 얻고, 말씀을 들으며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게 됩니다.
이 시간 영으로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예배할 때마다 영으로 예배하시는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둘째, 진리로 예배하자
다음으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진리는 주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내가 말씀이 충만한 채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자리에 나옵니다. 말씀을 들으며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는 다짐과 결단으로 예배 자리를 떠납니다.
한 번은 그런 말씀을 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예배드릴 마음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교회에 오다가 접촉사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다툼을 하는 중에 감당하기 힘든 말을 들었고, 자기도 안했으면 좋았을 말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예배 내내 상대방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릅니다. 화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했던 말도 떠오릅니다. 후회가 막급합니다. 예배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감정에 휘둘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감정이 우리의 예배에 걸림돌이 됩니다. 심지어 예배를 드리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뜨거운 감정이 복받쳐 오릅니다. 자칫 이런 감정도 우리가 진리로 예배하는 일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감정이 문제라기보다도 그런 감정에만 빠져서 예배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론 책망하시기도 하고, 때론 위로하시기도 하고, 때론 깨닫게 하시기도하고, 때론 가야할 길을 안내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문제는 자칫 다른 생각에 빠져서 귀를 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감정에 취해서 귀를 열 생각을 못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졸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진리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예배드릴 때마다 진리로 예배드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참되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으로 진리로 참되게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