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가 보인 눈물(왕하20:1~11)

 

우리 인체에서 분비되는 액체 가운데 눈물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눈물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기본 눈물입니다. 항상 눈에 촉촉이 분비되는 눈물입니다. 둘째는 반사성 눈물입니다. 눈에 티나 양파 껍질의 매운 냄새 등 이물질이 들어가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눈물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안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눈물이 마르면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공 눈물을 넣기도 합니다. 셋째는 감정 눈물입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분비되는 눈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감정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게 사람에게 좋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TV에서 눈물에 관한 특집 방송(SBS-TV신이 내린 묘약 - 눈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감정 눈물을 흘리면 스트레스를 배출할 뿐 아니라, 고혈압이나 심장병 등 현대인의 질병에 대한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일본 토호대학교 의대 아리타 히데오 교수가 눈물을 흘리기 전과 후의 상태를 비교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뇌파, 안구운동, 심전도 등의 변화를 조사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 직전에는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다가 눈물을 흘린 직후에는 카타르시스가 되어 평상심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수명이 긴 이유가 바로 눈물을 많이 흘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감정 눈물이 이렇게 좋은 것임에도 우리는 어려서부터 눈물이 대해 부정적인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울면 어른들은 으레 어떻게 합니까? “! !”하며 그치게 합니다. 특히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라니까 눈물을 억지로 참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은 눈물을 좋은 것으로 증거합니다. 눈물에는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신앙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눈물이 없다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회개할 때, 감사할 때, 답답할 때, 슬플 때, 그리고 기쁠 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눈물을 귀히 보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찰스 스펄전 목사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No coming to Heaven with dry eyes).” 천국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우리를 맞아주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신앙생활에 필수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신실한 신앙의 인물일수록 눈물을 많이 흘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다윗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들을 보면, 곳곳에서 다윗의 눈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다윗은 한 마디로 거룩한 울보였습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눈물이 메마른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통함의 눈물은 있는데 순수한 눈물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신앙은 영성과 감성이므로 당연히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눈물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고 영혼도 육체도 치유되고 회복되는 축복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눈물을 보인 히스기야 : 위기 가운데 간절한 기도

 

본문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남 유다 왕국의 제13대 왕(B.C. 728~687 재위)입니다. 그에게 눈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메마르게 되면서 은혜도 메말라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 눈물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가 죽을병에 걸리게 됩니다. 왕하20: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때는 강대국 앗수르의 침공 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직후를 가리킵니다. 승전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병한 겁니다. 그 때 나이를 계산해 보면 대략 38세쯤으로 추정합니다. 요즘보다 평균수명이 무척 짧았으니까 지금의 나이와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인간적으로 너무 아까운 나이입니다. 게다가 나라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아들을 낳지 못해서 대를 이을 왕세자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통보합니다. 이제 살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신변정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왕하20:2~3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벽을 향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심히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가늠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38: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 ” 눈이 짓무르도록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약간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감히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에 약하다! 우리도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그렇잖아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이사야가 성읍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합니다. 왕하20: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히스기야가 눈물을 보이자 기특하게 보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치유해 주십니다. 단순 치유가 아니었어요. 왕하20: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질병 치유, 수명 15년 연장, 국가 안보 보장 등 세 가지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7절 보니까, 이사야가 사람들을 시켜서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상처에 얹어 놓습니다. 그러자 치유됩니다. 무화과 반죽은 그 당시 종기를 치료하는 민간요법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의 약효가 대단하다기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응답을 받았음에도 히스기야가 확실하게 해 두고 싶어서 하나님께 징표를 요구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떤 징표를 주셨죠? 왕하20:10~11 “10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해시계의 그림자가 거꾸로 갔으니까 결국 뭔가요? 태양이 10(시간으로 하면 40) 거꾸로 움직였다는 겁니다. 히스기야의 중병을 고쳐주신 것도 초자연적인 이적이었지만 태양이 10도 뒤로 간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이적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사례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토해놓고 눈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50:15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성경에 보면 유사한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한나가 생각납니다. 그녀는 불임증 여인이었습니다. 고대에는 무조건 다산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서슴없이 축첩을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이방의 풍습을 따라간 것입니다. 한나는 남편과 첩 사이에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자식을 달라고 눈물로 기도합니다. 삼상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 ” 다행히 하나님이 그녀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 응답으로 아들을 낳았는데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무엘(‘샤마’=듣다 +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신앙고백이 들어간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결코 좌시하지 않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아프리카 차드에서 한국에 유학하러 왔던 조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학 6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가 사역하고 있습니다. 언어 문제도 있고 기후나 음식 등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학위논문을 어렵사리 썼는데 미처 챙기지 못한 마지막 관문이 있었습니다. 학위 수여 규정 상 외국인의 경우 한국어 시험 4급에 합격해야 되는데 이게 문제였습니다. 1년에 시험이 두 차례의 기회만 있데 연속해서 떨어지는 겁니다. 1년이 휙 지나고 자칫 잘못하면 1년 반 혹은 2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학교에서는 장학금 받고 교회에서는 생활비 도움 받고 선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도움 받았으니 죄송해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고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성도들과 동역자들 보기에도 창피해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조엘 목사님이 너무 힘들어 한다고 해서 차드로 1달 휴가를 보내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좋았겠지만 돌아오는 시간부터 부담감을 더욱 더 커졌습니다. 신세를 더 많이 졌기 때문입니다. 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하나님 앞에네 나아가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아마 통곡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시험을 치렀는데 다행히 합격했습니다. 합격선이 150점인데 150점을 받았습니다. 합격만 하면 되니까 점수가 높지 않아도 문제될 게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가 지금은 차드 암바타 신학교 학장으로 사역 하고 있고 교단 총회 내에서도 중심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답답한 일을 만나거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무조건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눈물이든 간구의 눈물이든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아무쪼록 눈물 신앙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눈물이 마른 히스기야 : 은혜를 잊어버리고 눈물이 메마름

 

그런데 히스기야에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가 죽을병에서 치유 받고 나라도 태평해지고 왕자도 얻어서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눈물이 메말라갔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죽을병에서 나았다는 소식이 바벨론에 전해졌습니다. 그 당시 국제 정세는 이랬습니다. 앗수르가 강대국이고 바벨론은 아직 신생국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의 침략에 맞서려면 유다 왕국과 바벨론이 손을 잡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친밀한 외교 관계가 필요했던 바벨론 쪽에서 축하 사절단을 보냅니다. 히스기야가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 자체는 좋은 일이었죠.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지 않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간증할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바벨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기회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과거 역사 속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잖아요. 솔로몬 왕 때 남방의 시바 여왕이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된 전례가 있습니다(왕상10:1~3, 12:42).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우쭐해진 나머지 자기 자랑만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왕궁의 보물 창고, 무기고 등을 다 열어 보여줍니다. 국기기밀을 누설한 것입니다. 나중에 바벨론이 적국이 될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이사야가 그의 한심한 처신을 지적하느라 물었는데 눈치도 없이 자랑스레 대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왕하20:15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이사야는 그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배은망덕한 그의 모습을 보고 괘씸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결국 유다 왕국의 암울한 미래를 경고합니다. 왕하20:17~18 “17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cf. 왕하24:13,15, 25:7) 후일 역사 속에서 이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됩니다. 비극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런 무서운 예언을 듣고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안심하는 그의 모습입니다. 왕하20: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자신의 살아생전에는 무탈하니까 좋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측이심(如廁二心)이란 말이 있죠. 뒷간에 갈 적 마음이 다르고 올 적 마음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죽을병에 걸려 울고불고 매달려 기도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건강하고 평안해졌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채 만해졌으니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아무리 눈물로 기도했어도, 그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어도 배은망덕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교만하면 눈물이 마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결국 망하고 맙니다. 16:18은 경고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3] 눈물로 사는 그리스도인 : 회개, 기도, 감사, 헌신

 

그러므로 우리는 히스기야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위기의 순간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배울 만하지만 은혜 받은 후 사후처리가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평생 눈물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혹시라도 합당치 못한 게 있으며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물론 고난과 역경의 상황에 처하면 눈물로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구원의 은혜, 보호의 은혜, 기도 응답의 은혜 등)를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생각하며 헌신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럴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승리의 역사가 연속해서 나타납니다. 이게 바로 축복과 승리의 비결입니다.

 

신실한 성경 인물들은 평생 눈물이 메마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한나를 보십시오. 불임 중에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 눈물을 보시고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은 후 눈물로 감사하며 헌신합니다.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멀리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 제사장 수업을 받게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초조기유학을 보낸 셈입니다. 1년에 한 번 겨우 볼 수 있었으니 어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눈물을 보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32녀를 더 주셨는데(삼상2:21) 사무엘까지 합치면 자식이 42녀가 된 겁니다. 불임 여성이었던 그녀가 다산의 축복을 받았으니 최고의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게다가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암흑 같은 사사시대에 샛별 같은 지도자로 쓰임 받았으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를 보십시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셨죠.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26:34) 그대로 됐죠. 그때 베드로는 통곡합니다.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그는 그 후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너무 부끄럽고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특별히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보답할까 생각하며 헌신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스 태생의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가 그린 성화성 베드로(1579)를 보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눈물이 베드로의 생애를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세계적인 수학자 김인강 교수의 이야기입니다(자전적 신앙 에세이기쁨 공식참조). 그는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 유학 후 귀국해서 카이스트 교수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는 고등과학원(KIAS)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07년에는 40세 이하의 우수한 과학자에게 주는젊은 과학자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얼른 보면 그가 순탄하게 엘리트 코스만 밟은 것처럼 보입니다. 한국불어권선교회 이사회 모임에서 그분을 몇 번 만났을 때는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간증을 책과 신문에서 읽고 얼마나 어려운 날들을 보냈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비료 부대 위에 엎드려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대를 잡아끌며 흙바닥 위를 다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혀를 찼다.” 서지도 못하는 장애인 소년! 게다가 너무 가난했던 장애인 소년! 그를 보면서 누가 밝은 미래를 예상했겠습니까! 당연히 혀를 찰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는 끔찍한 재활 치료 후 6학년 때 목발을 짚고 겨우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합니다. 목발을 짚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드넓은 캠퍼스를 다니다 보니까 목발과 갈비뼈가 부딪치면서 폐에 구멍이 났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습니다. 위험한데다 돈도 없었던 그는 절망 가운데 어머니와 함께 기도원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원망조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하신가요? 항상 아프기만 하고, 아무 쓸모없는 나를 데려가 주세요.” 그 때 등 뒤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 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 주소서 ... ” 그 순간, 자아가 꺾이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회개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 간구의 눈물이 뒤범벅됐습니다. 그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만만치 않기에 때때로 고난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수학자라도 문제 한 개를 놓고 1년 이상, 심지어 3~4년을 씨름한 때도 있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또 눈물로 기도하며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간증입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평온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연을 알고 보니까 그 뒤에 있는 눈물이 보였습니다. 바로 그 눈물이 그의 인생을 빛나게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눈물 없이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가 답답한 일 막막한 일 만날 때 기도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받은 은혜 생각하면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헌신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눈물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자꾸 눈물이 메말라갑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이제 다시 깨어나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묵상하며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답답한 일 만나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 앞에 눈물로 기도함으로 응답받고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눈물의 영성이요 눈물의 감성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 앞에 평생 눈물을 보이며 살아감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