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교훈

 

행 15:12-21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다섯 사람이나 나옵니다.

   하나, 사도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도 요한의 형입니다. 이 사람이 사도들 중에 최초로 순교했습니다.

   둘, 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홉 번째 제자입니다.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야고보가 둘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셋은 어린 야고보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여인들과 함께 있던 어린이입니다.

   넷은 제자의 아버지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이 사람은 초대교회의 최고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람을 살펴보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야고보에 대해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 사람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런 변화에 주목하는 것은 이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믿음의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회심이전의 야고보

 

   마 13:55-5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이 말씀을 보면 남동생이 넷이고, 누이들은 적어도 두셋 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동생들은 적어도 여섯 이상이나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 7: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시절에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막 3:21을 보면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리고 막 3:31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예수님께서 공생애사역을 하실 때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아닌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제정신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중심에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야고보는 왜 이랬을까요? 당시 야고보는 예수님 바로 밑의 동생으로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적어도 25년이 넘도록 예수님과 함께 해왔습니다. 아마도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혼란을 느껴왔을 것입니다. 때론 많은 인격적 감화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론 이해하기 힘든 말과 행동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간 뒤에는 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생애를 포기하고 인류구원을 위해 공생애의 길을 걷는 형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형이 집을 나간 뒤 고스란히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야고보로서는 형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것이고, 화도 났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당시 야고보는 철저히 인간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저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형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면에서는 불만스러운 형이었을 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삶을 보았으면서도 아직 그에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학에서는 ‘회심’이라는 말을 씁니다. 원어성경에 나오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초월적인’, ‘더 본질적인’이란 뜻을 가진 ‘메타’(μετά)와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노이아’(νοια)가 합해진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마음이 초월적인 마음으로 변화된 것, 더 본질적인 마음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회심은 마음이 변화된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속사람이 바뀐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인 줄로 착각하고 살던 사람이 예수를 주로 영접한 뒤에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며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원하고 계획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목표 삼고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던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와 함께 살면서도 아직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사람은 교회 다니고 교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자신의 주로 영접하지 않았고, 마음이 새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세상 바라보고, 세상 좋아하고, 세상에서 성공해 보려는 꿈을 가지고 삽니다.

 

  최근 안타까운 통계를 보았습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한 조사통계입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부모 따라 교회 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성인이 되어 독립한 뒤에도 여전히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1/4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태신앙인 사람들 가운데 자라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성인이 된 뒤에 보니 무려 3/4이나 되는 사람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이들이 왜 교회를 떠났을까요? 간단합니다.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지만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 그 위기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아직 회심하지 않았던 야고보를 어떻게 보고 계셨을까요? 막 6:4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한 마디로 서원함과 안타까움을 표시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회심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주님께서 그들을 보실 때 서운함과 안타까움을 표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회심해야 합니다. 겉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물론, 우리의 속사람도 온전히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의 회심

 

   그러면 야고보는 언제 어떻게 회심하게 됐을까요? 사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게 답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7 말씀입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동생 야고보를 찾으셔서 만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생 야고보를 마음에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야고보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고자 하셨습니다. 주의 나라의 큰 일꾼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뒤에 일부러 야고보를 찾아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회심했습니다. 그동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형, 미워하기도 했고 때로는 정신 이상자 취급까지 했던 형이었지만, 부활하신 모습을 보자 달라졌습니다.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야고보는 약 1:1을 보면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에서 야고보는 자기가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예수의 동생이었지만 회심한 이후 자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회심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찾아와 주신 주님, 그 주님을 만난 뒤에 회심한 것입니다. 그의 속사람이 변했습니다.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회심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임하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나주실 때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사람들끼리 애쓰고 힘쓴다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개인 혼자서 노력한다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회심은 전적으로 은혜인 것입니다.

 

  한기홍 목사님이 쓴 [오늘을 만족하라]는 책을 보면 자신의 간증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시절 정치가의 꿈을 안고 미국에 유학을 왔으나 돈 한 푼 없었습니다. 알고 지내던 선배의 소개로 LA 인근 롱비치에 있는 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치계를 주무르는 야심찬 정치가가 되리라는 야망은 어느덧 주유소를 가득 메운 기름 냄새에 희석되는 듯했습니다.

  어느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낮에 누군가가 주고 간 전도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무심결에 그 전도지를 보는데, 요한복음 3장 16절과 히브리서 9장 27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말씀을 읽는데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렇지. 사람은 한 번은 다 죽지. 그런데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수많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파도처럼 요동쳤습니다. 그날 이후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연락해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예배당 맨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내 어깨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것 같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주님이 나를 만나주셨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 때문에 내게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회심의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회심의 체험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회심이후의 야고보

 

   그러면 회심이후 야고보는 어떻게 됐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2-1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당시 초대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을 다녀온 뒤 생긴 문제입니다. 그동안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지만 율법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 중에 복음을 전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를 믿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기독교는 무엇이고, 또 교회는 무엇인가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교회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 중요한 회의의 의장이 바로 야고보였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당시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심이후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물론 답은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갈 2:9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이 예루살렘회의를 다녀온 뒤 쓴 편지에서 한 말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가보니 기둥같은 세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첫째가 야고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둥같이 여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탈무드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스라엘의 세 기둥이라고 부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기둥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마음을 다해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가 야고보를 그렇게 기둥처럼 존중하며 높이며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교인들로부터 기둥같은 사람으로 존중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기둥같은 사람으로 존중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정에서 기둥같은 사람으로, 교회에서 기둥같은 사람으로, 일터에서 기둥같은 사람으로,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기둥같은 사람으로 존중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들이 모두 기둥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야고보는 회심이후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됐을까요?

   약 1:2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리고 약 2:22를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한 마디로 야고보는 회심이후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을 일치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라는 책을 보면 야고보가 성전에서 기도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됐다고,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교인들과 당시대의 사람들이 야고보를 ‘오블리아스’ 즉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가 기둥같은 사람으로 존중받은 이유는 바로 말씀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믿음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야고보처럼 살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너무도 세속화된 세상이고, 우리가 믿음대로 살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것은 더욱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믿음대로 살고,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회심했고, 회심한 뒤에 말씀대로 살아서 교회에서 기둥처럼 존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회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뒤 말씀대로 살아서 기둥처럼 존중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