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 굼!(5:21~24,35~43) 

 

마가복음 5:21~24, 35~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여러분, 세상 살기가 어떻습니까? 참 힘들죠. 요즘 같은 때는 힘들다는 느낌이 절실합니다. 문자 그대로 험한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이 필요하죠. 힘이 있어야 문제도 해결하고 고난도 극복하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힘에 부치면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힘을 기르고, 가능한 한 큰 힘을 소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지! 그래서 재력을 키우려고 애를 씁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는 게 힘이야! 그래서 지력을 키웁니다. 혹자 또 이렇게 말합니다. 돈이나 학벌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권력이 있어야지! 그래서 권력을 키우려고 애를 씁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것 다 있어도 건강 잃으면 아무 소용없어! 그래서 체력을 키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재력, 지력, 권력, 체력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력입니다. 심력(心力)이라고 하죠. 실제로 모든 것을 갖고 있어도 마음이 무너지면(멘탈 붕괴) 인생을 그르치게 됩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J. A. 하드필드(James Arthur Hadfield, 18821967)의 연구에 의하면 마음속에 자신감이 있고 없고가 얼마나 중요한 차이를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마음속에서 난 틀렸어!”라고 생각하면 실제 능력의 30%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자신감이 있으면 500%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리치료를 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봅니다. 특별히 운동선수들의 경우 심리 요법을 통해 많은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믿음의 힘 즉 영력(靈力, spiritual power)입니다. 심력을 포함해서 앞에서 열거한 모든 힘들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영력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힘 즉 영력이 중요함을 성경은 누누이 강조합니다. 요일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본문은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살려낸 이적의 기록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죽은 자를 살린 사건이 세 번 나오죠.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소녀를 살린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게 가장 강력하죠. 예수님 자신은 몸소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힘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험한 세상을 살면서 꼭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영력을 키워야 합니다. 아무쪼록 갈수록 큰 믿음으로 영력을 키우심으로 험한 세상 당당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인간의 한계 : 믿음의 시작

 

먼저 본문을 통해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살펴봅니다. 여기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야이로라는 사람인데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지역의 유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역마다 회당을 갖고 있었는데,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센터입니다. 회당장은 그 회당의 운영 책임자로서 건물 관리에서부터 예배 순서를 작성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랍비를 선정하고, 지역의 질서도 유지하고, 심지어 재판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사회에서는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고 많은 힘을 가졌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재력도, 지력도, 권력도 다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엄청난 문제가 닥쳤습니다. 12살 먹은 어린 딸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12세면 고대의 유대인 사회에서는 문자 그대로 다 큰 겁니다. 얼마 후에는 결혼도 할 수 있는 성년에 근접한 나이입니다. 더욱이 병행구절인 눅8:42을 보면 무남독녀 외딸이었으니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억장이 무너졌겠죠. 그는 힘깨나 쓰는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힘들을 다 합쳐도 별 게 아니었습니다. 한계에 부딪친 야이로에게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각색 병자를 고치고 많은 이적을 행하신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생기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이 제법 많다고 생각할 때는 믿음이 생기기 어렵죠. 그런데 한계에 부딪치면 마음이 겸손해지면서 믿음이 싹트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나아만 장군 이야기(왕하5:1~14)입니다. 그는 아람의 구국공신이요 2인자였습니다. 막강한 권력도 엄청난 재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불치병이었습니다. 곳곳에 썩어문드러져 외모가 흉측해집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고칠 수 없고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소녀를 통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그는 체면불구하고 찾아가 엘리사가 전해 준 말씀대로 요단강에 가서 7번 목욕합니다. 놀랍게도 완전 치유의 이적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방 아람 장군 나아만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됩니다.

 

야이로가 바로 그렇게 된 겁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인간의 한계를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어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무관심하게 지나쳤을지 모릅니다. 아니, 이단자 정도로 생각하고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미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안식일 등의 문제로 예수님을 오해하여 죽일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회당의 책임자인 그로서는 당연히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작은 믿음이 싹트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용기를 내서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5: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앞서 말씀드린 대로 회당장은 유지입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지금이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이 많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저 30세가 갓 넘은 평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체면에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었습니다. 그 다음 절을 보면 그에게 분명한 믿음이 싹텄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결과적으로 보면 그에게 외동딸이 사경을 헤매는 고난을 당한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치유만 받은 게 아니라 믿음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인 인간적인 힘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 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힘들을 자랑하느라 하나님께 나오지 못한다면 그런 것을 축복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적인 힘의 한계를 느끼는 게 오히려 축복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고백하는 간증을 들어보면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 많습니다. 또 이미 믿던 분들 중에도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더 뜨겁게 체험하고 큰 축복을 경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중병에 걸렸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가정 불화로 고민할 때, 시험에 낙방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등등 ...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시 고난을 당해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없다면 믿음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음이 있다면 더 큰 믿음으로 키울 수 있는 기회로 주셨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고난당한 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난당한 것도 힘든데 믿음 손해 보지 말라고!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믿음이 좋아져야지 반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스스로 자학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당하고 믿음 손해도 보고, 두 배로 손해 보는 겁니다. 고난당했지만 오히려 믿음도 좋아지고 문제도 해결 받고 승리하는 게 지혜로운 겁니다.

 

그런 점에서 야이로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원망과 한탄만 한 게 아니라 이제 갓 싹튼 믿음이었지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와 함께 집으로 갑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심방을 가신 겁니다. 그 과정을 보면 예수님이 단순히 소녀를 살려주시기만 한 게 아닙니다. 야이로에게도, 소녀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심지어 주변에 있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승리 방식 : 문제 해결 + 믿음 연단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문제를 갖고 나아갈 때 혹은 기도할 때 단순히 그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 과정 가운데 믿음을 연단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와 함께 가시는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데 도중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25~34절에 삽입된 기록이 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잃던 여인을 치유해 주신 사건입니다. 그 여인 역시 너무 불쌍하죠. 오랜 세월 하혈하면서 고통을 받았는데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녀도 차도는 없고 오히려 악화되어 죽을 날만 기다라던 여인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갔을 겁니다. 11초라도 빨리 가야 딸이 고침 받을 수 있을 텐데 시간이 자꾸 지체되니까 초조하고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는 동안에 집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집에서 온 사람들이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 아무 소용없으니 예수님을 모시고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야이로의 눈앞이 캄캄해졌을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원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좀 빨리 가시지 않고 다른 일을 하시나, 저 여자는 왜 끼어들어서 지체하게 하나, ...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다분히 예수님이 야이로의 믿음을 연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두르실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가셨을 겁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붙잡았다고 해도 그냥 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 여자를 불러 세우고 동행하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시간을 끄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리게 하심으로 인내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연단해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내를 통해 자랍니다. 기도하는데 응답이 지연되면 연단의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연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문제도 해결되고 믿음도 더 커지는 갑절의 축복이 있습니다. 믿음이 커지면 다음번에 어려운 문제가 닥쳐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커져야 예수님께 꼭 붙어 있다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다리면서 인내하도록 하실 때가 많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증거합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시편기자도 노래합니다. 126:5~6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러므로 혹시 기도해도 응답이 지연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이 지연될 뿐 아니리 심지어 상황이 악화되어도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믿음을 더욱 굳게 하면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더욱 더 좋은 것으로 승리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야이로가 딸의 소식을 듣고 낙심할 뻔 했지만 예수님이 말씀으로 그를 붙잡아 주십니다.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Ignoring what they said-NIV)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곁에서 들으시고라는 말은 그냥 들으셨다는 게 아니라 무시하셨다(ignore)는 뜻입니다. 상황이 악화되니까 야이로가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계속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말고 굳세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시선 싸움입니다. 눈앞의 상황을 보면 낙심이 되고 포기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영안을 뜨고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면 대번에 실패합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베드로가 물에 빠진 사건이 나오죠. 제자들이 밤에 갈릴리 바다를 항해합니다. 따로 떨어져 있던 예수님이 합류하려고 물 위로 걸어오시는데 몰라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소리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인 줄 확인하고 비로소 안도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자기도 예수님처럼 걸을 수 있나 질문하자 예수님이 오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자 정말 물 위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자 출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베드로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고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러자 여지없이 빠져버립니다(14:30).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시선을 놓치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미국의 수영선수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 1918~1995)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장거리 수영선수로 영국해협을 최초로 헤엄쳐서 건넌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19527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캘리포니아 해안으로부터 35km 떨어진 카타리나 섬에서 해안까지 수영으로 횡단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습니다. 16시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않고 수영하는 초인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목표지점을 불과 800미터 앞두고 짙은 안개가 몰려왔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안개 때문에 도저히 계속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두 달 후 재도전합니다. 9월이라 바닷물은 더 차가워졌고 출발부터 안개가 몰려와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16시간 만에 거뜬히 성공합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안개가 처음부터 짙게 깔렸는데 어떻게 성공했나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가야할 목표 지점을 마음속으로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개와 같은 문제나 고난이 앞을 가로막아도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면 당당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12:2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 아무쪼록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는 큰 믿음으로 항상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야이로가 계속 믿음을 지키며 따라오도록 하셨습니다. 마침내 그 집에 당도합니다. 문자 그대로 초상집 분위기입니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수군거리고 또 통곡을 합니다. 예수님이 소녀가 죽은 게 아니라 잔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살려 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분명히 죽었는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제자 세 사람과 부모만 데리고 소녀가 안치된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달리다는 아람어로 소녀야’, 그리고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자 시신이 정말 깨어났고 일어나 걷는 겁니다.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소녀가 살아나니까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야이로도, 소녀 본인도, 가족도, 제자들도, 그리고 모인 사람들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작은 자에게 믿음이 커졌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생명과 부활의 주님임을 깨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달리다 굼!”이란 말씀을 통해 누워있는 소녀를 일으켰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믿음을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을 통해 의도하셨던 것은 소녀 한 사람만 살려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믿음을 일으켜 세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주저앉으면 다른 조건들이 좋아도 낙심하고 실패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커지고 굳게 세워지면 다른 조건들이 나빠도 얼마든지 용기를 내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달리다 굼!”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세워주시는 주님의 말씀인 셈입니다.

 

한번은 신앙잡지에서 이런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이야기인데 그분은 택시를 타면 으레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젊은데 얼굴이 너무 어둡고 말도 퉁명스럽게 하더랍니다. 이야기를 걸어도 대꾸하기 싫다는 뜻으로 자기는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라며 때때로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말하더랍니다. 무슨 사연이 있구나 싶어 살살 달래가며 말을 걸었습니다. 마침 주행 시간이 길어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열리자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큰 교통사고가 나서 장기간 입원해 있는데 그 사이에 부인이 가출했답니다. 그 후에는 누님이 중풍으로 몸져누워 대소변을 받아내게 됐고, 여동생은 정신 이상으로 격리 수용되어 있어서 면회 다니며 돌봐줘야 하고 ... 이런 형편이라 당장 죽고 싶어도 누님과 동생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면 차마 자살은 못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장로님이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야죠!” 그러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집 나간 부인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누님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동생의 정신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셨는지 말씀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 못 가요! 먹고 살아야 되는데 시간이 있나요? 교회 가고 싶어도 헌금할 돈이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은 교회에 가고 헌금하는 게 당연하지만, 교회 안 나가도 되고 헌금 안 해도 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운전하면서 극동방송을 듣고 설교 테이프 들으면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요즘 같으면 유튜브 소개해 주었을 텐데). 주소를 묻고 설교 테이프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는데 택시 한 대가 달려와 끽~하고 섭니다. 바로 그 기사분이었는데 영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는지 물었더니 그대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왠지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니까 너무 좋다는 겁니다. 일도 즐겁게 하고 소님들을 친절하게 대할 뿐 아니라 전도까지 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주저앉았던 마음이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이 생기니까 당당히 일어선 겁니다. 그 후에 그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이미 승리한 겁니다. 환경 조건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지 기쁘고 감사하면 된 거 아닙니까! 그러다 보면 고난도 이기고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힘에 겨워 헉헉거릴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힘을 기른다고 애를 쓰게 되죠. 재력, 지력, 권력, 그리고 체력을 키운다고 기를 씁니다. 심지어 정신력을 키운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유익하겠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인생의 짐이 점점 무거워지면 어느 순간 폭삭 주저앉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달리다 굼!”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상황이 악화되어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믿음이 커지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이런 믿음으로 험한 세상 늘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