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본문/ 요13:31-38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 가지 질문(퀴즈)을 생각해 봤습니다.
퀴즈
1) 세상에서 쉬운 것 같지만 실천하려고 하면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사랑, 참 사랑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2) 단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이지만 쉽게 오용되는 것은 무엇인가?사랑-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단어이면서도 범죄도 사랑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3) 기독교의 제일의 덕목은 무엇인가? 사랑,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 본문은 ‘그가 나간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요13: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여기서 그는 가룟 유다입니다. 마귀가 벌써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고, 그가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나갔다, 라는 것은 그의 배반, 예수님의 체포, 재판, 십자가 죽음이라는 일련의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보면 그가 나간 것은 큰 위기요, 두려움이 엄습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힘든 시간이 찾아온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했습니다.
요13:3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또요13: 32절에서는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이 두 구절에 영광이라는 단어가 네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어에는 다섯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역설적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지금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계신데,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패배, 치욕을 앞두고 계신데, 역설적으로 영광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치욕이 아니라 영광스런 사건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영광이 될까요?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에 성취되었으며,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끝이 아니셨습니다. 부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있는 상황지만, 오히려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13:33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호칭을 통해서도 보여주셨습니다.
“작은 자들아,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작은 자들’은 원어로 ‘테크니아’인데- 아이들, 나의 자녀들아(my children)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친근한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 이곳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요한 일서에서 7번 사용했고, 사도 바울도 이 단어를 딱 1번 사용했습니다.(갈4:19)
미혼인 예수님에게 육신적 자녀가 없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쓸 기회가 없었겠죠. 하지만 십자가를 앞둔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의 자녀들(테크니아)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호칭을 통해서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라고 하신 것은 정말 이제 죽음이 임박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배반자 가룟 유다가 나간 이상, 곧바로 체포당하고 재판 받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죽음이 임박하면, 유언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서 유언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
요13:34-35절은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요절에 해당합니다. 같이 읽어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러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계명은 아닙니다. 이미 율법에 나오는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이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34절을 보세요.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새 계명은 제자들끼리 그냥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1) 요한복음13장 앞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제자까지도 품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손해를 감수하는 사랑,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2) 결국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목숨까지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요한일서3:16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일3:16절은 요한복음3:16절과 함께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구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사랑이- 감정 가는 대로 하는 것이고, 내 맘에 들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라면 어려울 것이 없겠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아가페 사랑은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축복하는 사랑이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아가페 사랑에 대해 가장 설명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분파가 있었고, 시기와 분쟁에 휘말렸던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아가페 사랑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고린도전서13:4-7절입니다. 고린도전서13장은 예전에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굉장히 좋아하였고 지키려고 애썼던 말씀인데, 요즘 성도들은 이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 성경 지식도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서로 다투고, 서로 자랑하고, 서로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에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고린도 교회와 같은 문제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지만, 정작 그리스도인의 핵심 덕목인 사랑은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크리스천에게 다른 것이 부족한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사랑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말로도 사랑을 표현하고 덕을 세우고 격려하고 감사하는 말을 통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에 관해 세 종류의 성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관찰에 의하면)
- 말로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기를 떨어뜨리고 상처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 말로는 사랑한다고 표현하지만 실천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 말보다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감동을 주지만, 특히 행함과 진실함으로 보여주는 사랑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평가) – 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참 좋은 교회이다’ 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뭔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평가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평가)우리 교회에 부족한 점이 많지만,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 교회 안에 말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고장난 빔 프로젝트 때문에 여러 안수집사님들이 나와서,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높은 사다리를 타고 밀고 다니면서 일했습니다. 퇴근 후에 많이 피곤할텐데 나와서 일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낡은 선도 교체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하던 성가대 마이크고 살려 놓았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 사랑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에 하나는 오래 참는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장에서 사랑에 대해 묘사하면서 바울 사도는 사랑을 참는 것과 관련해서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고전13:4절-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13: 7절- 모든 것을 참으며………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참는다는 말의 의미 – 고난을 참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에 대해 참는 것과 같이, 또는 사랑하는 자녀들에 대해 참는 것과 같이 나와 다른 사람,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새 계명은 쉬운 계명일까요? 어려운 계명일까요?
지키기 쉽지 않은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왜 이 계명을 지키기 쉽지 않을까요?
(쉽지 않은2 가지 이유)그냥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서로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살펴보세요. 열두 명 중에서 똑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 학력도 달랐습니다. 배운 사람도 있었고, 못 배운 사람도 있었습니다.
(2) 성격도 달랐습니다. 내성적인 사람도 있었고, 다혈질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3) 사상도 달랐습니다. 세리 마태처럼 친로마정부적 성향을 가진 제자도 있었고, 열혈당원 시몬처럼 반로마적인 제자도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종과 상관 없이, 사상과 상관 없이, 경제적 차이와 상관 없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난 주에 미국 대선이 끝났습니다. 미국이 크게 둘로 나뉘어 졌음이 드러났습니다. (divided라는 단어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대도시와 소도시, 흑인과 백인, 북부와 남부 등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
· 요13:35절을 말씀을 다시 보세요.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제자됨의 표지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면, 그것을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읽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처럼 서로 싸우고, 하나되지 못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게 되면 세상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전도하려고 할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으로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할 때, 전도가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교회가 싸웁니까? 왜 그렇게 교회가 시끄럽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되지 못할 때, 세상은 우리의 전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보다 삶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통해서도 제자들이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될 것을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서도 제자들이 하나가 될 것을 간구하셨습니다.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삼위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선교적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종이나 지역이나 교파를 초월해서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 36-38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너는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제자야’라고 비난하거나 책망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은 알지만, 아직은 아니냐, 후에는 가능할거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을 베드로가 기억하고,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실을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37절에서 베드로가,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이 말씀이 베드로를 책망하거나 평가 절하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를 격려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안 되겠지만, 후에는 능히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격려해 주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당장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오르지 않는다고 해도,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연약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눅22:31-32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시고 위해서 중보기도해 주셨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사랑지수 체크 리스트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기도하면서 제가 만든 것인데요, 한 번 체크해 보세요.
사랑지수 체크 리스트
1)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2)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형제자매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가?
3)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때, 기꺼이 도우려 하는가?
4) 나는 다른 사람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고 하고 있는가?
5) 나는 다른 사람이 말할 때 귀 기울여 잘 들어주고 있는가?
6) 나는 나와 다른 성격,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고 있는가?
7)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볼 때, 그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용서해 주고, 기다려 주고 있는가?
8) 나는 내 문제 외에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고 있는가?
9) 나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을 믿고, 남에게 주고 나누고 베풀고 있는가?
10) 나는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성도 간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은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다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요, 상호보완적인 지체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모든 성도들은 다양하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 같이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다 같이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간의 사랑과 일치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 구절은 고전12:26절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에 속한 지체들로서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서로 서로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유언처럼 주신 새 계명,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계명을 항상 기억하고 잘 지킬 수 있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