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25-31
예수님은 본문 말씀에서 굉장히 놀라운 성령의 사역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가시지만, 대신 성령님이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일을 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요14:26절을 보세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다른 분들은 어떤 지 몰라도 - 제게는 성령님께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겐 보혜사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늘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얼마나 기뻤을까요? 가장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은 떠나가게 되지만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일을 믿는 자들에게 그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고, 하나님은 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에게 나침반과 같고, 어둔 밤의 등불과 같고, 여행자들에게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 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길 잃고 방황하는 자에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슬픔과 낙심에 빠진 자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잡한 상황에서 어찌할지 모르는 자에게 지혜를 줍니다.
그래서 말씀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습니다. 그런 생명과 같은 말씀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성령님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억나세요?)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하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하면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게 하기 위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14:16-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오셔서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약속 중에서 가장 귀한 약속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으로 인해 이제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앞에서 잠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성령에 관한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떠나가시지만 대신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모든 영적 진리들을 깨닫게 해 주시고, 예수님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14:25-26절입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 하시는 수 많은 사역 중에 가장 놀라운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제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가장 감사할 일이 바로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지 않고, 생각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목회자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요, 이것은 목회자만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도 마찬 가지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하시고 감동을 주시고, 삶에 적용하게 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성도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이해도 해석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귀한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며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약속과 함께 하늘의 평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것입니다.
요14:27절 말씀을 보세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자신의 평강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 어떻게 다를까요?
-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평안입니다. 즉 주변 환경에 따라서 평안이 있다가도 환경이 바뀌면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예) 돈에 의지한 평안- 돈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건강에 의한 평언- 건강을 잃으면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은 성령의 열매로서의 평안이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은 평안이요, 영원한 평안인 것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인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평안을 ‘나의 평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평안은 예수님이 경험하였던 평안이요,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인간적으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괴롭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도 예수님은 ‘내 마음이 괴로우니’(요12:27)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셨을 때, 그의 마음에 있는 평안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원수 마귀가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빌라도 앞에 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환경과 상관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하루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저녁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셨는지 배에서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파도가 일었습니다. 배에 물이 찼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하였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빼앗겼습니다.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물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후 제자들에게 환경으로 인해 근심하고 두려워한 것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눅8:22-25)
폭풍 앞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세상의 평안과 그리스도의 평안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환경에 얽매인 평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잔잔할 때는 마음이 평안하다가 바람이 불어오고 배에 물이 차오르자 평안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과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환경에 대해 꾸짖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알렉산드리아호 배를 타고 로마로 압송 도중에 풍랑은 만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으로 인해 276명이나 탄 배가 방향을 잃고 어둡고 캄캄한 바다를 떠돌게 된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나흘 동안이나 배가 풍랑 속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처음에는 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꼼짝 없이 바다에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선원도, 백부장도 모든 승객들도 다 마찬 가지였습니다.
그 때에 그 배 안에서 유일하게 낙심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있었던 분이 있었느니, 그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환경과 상관 없는 평안과 소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27:21-26절을 보세요.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피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이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의 말 속에서 우리는 그가 환경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환경으로 인해 두려워하지만, 바울은 아직 환경이 나아진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인해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4:6-7절에서는 평강을 기도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마음에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 올 때는, 오히려 기도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감사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평강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 주시는 평안- 환경으로 인한 평안은 아닙니다. 가는 길이 잘 순탄할 때 뿐 아니라 무서운 풍파가 몰아칠 때에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찬송가 413장에 얽힌 간증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작사자가 H. G. Spafford 변호사인데요, 1873년에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슬픈 시간에 작사했습니다. 그가 이 찬송가 작사를 쓰게 된 사연을 들으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는 19세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시카고 무디 전도단의 재정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1) 1871년 시카고 대 화재 사건으로 많은 재산을 잃게 되었습니다.
(2) 그 사건이 있기 1년 전에 4살 배기 아들을 열병으로 잃었습니다.
(3) 연거푸 슬픔을 겪은 그는 의사의 권유로 아내와 네 명의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계획하였습니다. 때마침 무디가 영국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기로 되어 있어서 거기 참석하여 휴식 겸 위로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4) 그런데 떠나기로 한 날에 스패포드 변호사는 갑자가 처리할 법률 업무가 생겨서, 아내와 네 딸을 먼저 배에 태워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5) 그런데 313명을 태우고 가던 그 배가 그만 승객들이 잠들어 있던 새벽 2시에 큰 영국 배와 정면 충돌하였습니다.
그의 아내 안나는 가까스로 살아 남았지만, 딸 넷을 잃었습니다. 11살, 9살, 5살, 2살.
스패포드는 안나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혼자 살아 남았음- Saved alone”
(6) 여러분,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의 욥과 같은 슬픔을 당한 것입니다.
(7) 그는 사태 수습하게 위해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는데, 사고 지점을 지날 때, 선장이 ‘이곳이 바로 그 비극이 일어난 지점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스패포드는 바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찢어지는 아픔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슬픔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했으며, 주님의 일을 가장 귀하여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절규했습니다.
그의 절규는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형용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주신 평안을 찬송가 가사로 만든 것입니다.
“내 인생 길에 강 같은 평화가 흘러갈 때에도, 거친 파도 같은 슬픔이 몰아칠 때에도 내 운명이 어떻든지, 주님은 날 이렇게 말하도록 가르치셨네, 평안해요. 평안해요. 내 영혼이 평안해요.”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찬송가 413장 1절에서는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외적 환경과 상관 없는 평안일까요?
이 평안의 원천(source)이 밖이 아니고 안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오는 평안이라면 환경에 따라서 흔들릴 수 있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이기 때문에 외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욥이나 스패포드 변호사와 같은 아픔이나 슬픔은 아닐지라도 여러 가지 일로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린 성도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관계의 문제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환경과 상관 없는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재 상황이 폭풍 속에 있고, 혼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보혜사 성령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내적 평안으로 넘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 본문 요14: 29-30절에서 예수님은 이제 최종적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말씀해 주신 이유를 설명하고 이제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여기서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악한 사탄에 대한 승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더 명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 → (세상의 통치자)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서, 겉으로 보면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죄를 정하고 십자가에 죽게 할 때에, 예수님이 패하시고 사탄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예수님께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오히려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죽기를 두려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히2:14)
예수님은 십자가로 이기셨을 뿐 아니라 부활을 통해 그 승리를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평화)는 완전한 평안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사탄의 고발도 무력화시키는 완전한 평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절대적 평안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어떤 환경도 우리의 내적 평안을 빼앗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열흘 정도 남았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가장 많이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은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는가?’라는 질문들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사야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 깨어진 관계를 화해시키기 위해 화해의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찬송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사건이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평화,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또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써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대림절을 지내시고, 무엇보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평안을 누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코로나 환경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다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