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요한의 교훈

요 19:25-27

 

   성경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입니다. 이 사람을 ‘세례요한’이라고 구별해서 부릅니다. 다음에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요한입니다. 이 사람을 ‘사도요한’이라고 구별해서 부릅니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에 몇 사람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마가라고 하는 요한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도 요한이고, 공회원 가운데도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요한은 ‘자비로우신 여호와’라는 뜻의 예호하난(יהוחנן)의 줄임말인 요하난(יוחנן)에서 온 이름입니다. 그 뜻이 좋아서인지 당시 유대인들이 이 이름을 많이 지어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많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라는 이름이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각 언어권에서는 자기네 언어로 이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John(영어), Johann(독어), Jean(불어), Jan(폴란드, 체코), Juan(스페인), Ivan(러시아), Giovanni(이태리), Hans(덴마크), 그리고 우리나라는 요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이름을 따라 지어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도요한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의 신앙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마음에서 그 이름을 이렇게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도요한이라는 인물을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걸었던 신앙의 길이 우리에게 교과서처럼 중요한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인격의 성숙

 

   성경을 보면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아직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막 3:17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별명을 붙여주셨는데, 그것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도중에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을 지나시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사람들이 이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 사람을 만나서 함께 예수님을 따르자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그런 사역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금하지 말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참 편협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더 압권은 이런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갑자기 요한이 자기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이런 청을 드렸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청입니다.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메시아로 등극하실 텐데 그 때 자기 형제를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둘을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에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러 가신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이 때 나머지 열 제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요한이 이기적인 사람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 성품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이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훈련을 받았지만 그 성품에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요한의 모습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요한이라는 인물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저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격이 급했습니다. 그리고 편협했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 문제 때문에 참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에 요한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요일 4:7을 보면 요한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리고 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영적 지도자로 사역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 성품이 주님을 닮게 된 것입니다.

 

   저도 돌이켜보면 많이 달라졌습니다. 신학생 시절, 전도사 시절, 부목사 시절, 그리고 위임목사가 되어 20여년 지나면서 과거와 다른 제 모습에 놀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닮지 못해서 괴로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만 과거보다는 성숙해 진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쳐서 쓰시는 분이십니다. 결함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들을 주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처음부터 남달리 예수님 닮은 것 같은 사람 그리고 남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은 잘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훈련시키시고 또 사역하게 하시면서 조금씩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어느새 저만큼 주님을 닮아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면서 너무 형편없다고 낙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님 손에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켜 가실 것입니다.

 

 

변함없는 헌신

 

   성경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가 요한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불린 사람이 요한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대신 쓴 표현이긴 하지만 당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쓸 수 없는 표현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 13:23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한이 예수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요한이 제자들 중에 가장 어리고 또 예수님보다 대여섯 나이가 어렸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 가장 편하게 생각했고 가까이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자리에 가실 때 빠짐없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변화산 위에 오를 때라든지,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같은 경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요한을 마음에 두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예수님 사랑도 남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셨을 때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대제사장 집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입니다. 26-2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요한이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있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모든 제자들이 두려워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의 현장에 가지 못했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이 요한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먼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를 이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이 부탁을 받고 마리아가 세상 떠날 때까지 자기 어머니처럼 모셨습니다.

 

   저는 이런 요한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의리’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의리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서는 “신의를 지켜야 할 교제상의 도리”를 말합니다. 대체로 친구사이에서 또는 서로 신의를 지켜야 할 사이에서 자기가 할 도리를 끝까지 지켜가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도리를 지키기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그 도리를 지켜갈 때 그 사람을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들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주님께 대한 의리를 잘 지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며 늘 그 사랑을 갚을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실 때 그 사랑을 갚았습니다. 더더욱 자기에게 큰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 사랑을 갚으며 살았습니다.

 

  요한의 제자 가운데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 지역의 영적 지도자로 충성을 다하다가 86세 때 체포돼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그 지방 총독 게르마니쿠스의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총독은 폴리갑이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은 총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저는 이 이야기를 오래전 신학생시절 교회사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때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슴이 뭉클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나도 폴리갑처럼 주님께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힘들다고 주님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고 주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버리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끝까지 주님께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믿음의 승리

 

   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초대교회를 든든하게 이끌었습니다.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친 형 야고보는 가장 먼저 주후 30년대 초에 순교했고, 바울과 베드로는 주후 60년대 중반에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주후 90년대 중반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함께 부름을 받았던 형 야고보보다는 60여년을 그리고 베드로보다는 30여년을 더 살면서 초기 교회를 이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일찍 순교하여 주님 품으로 가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초기 교회를 마지막까지 이끌던 요한에게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년에 겪어내야 했던 가장 힘든 일은 점점 더 거세지는 로마의 박해입니다. 그리고 박해로 동요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이 시기가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가장 극렬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로마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습니다. 이때까지 로마 황제들은 죽은 뒤에 원로원에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추대될 경우만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황제들 가운데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클라우디우스 세 사람만 신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아직 살아서 황제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신전을 지어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시범케이스로 무자비하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 때 당연히 요한도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이 체포되어 독배를 받았는데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는데도 살아났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보낸 편지가 요한계시록입니다.

   도미티아누스가 측근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되면서 극심한 박해가 끝이 났습니다. 이후 요한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사역을 하면서 소아시아교회를 영적으로 지도했습니다. 박해로 믿음이 흔들리던 교인들을 다시 굳건히 세웠고, 교회들을 믿음의 반석위에 세웠던 것입니다. 이 때 쓴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이 극심한 박해를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이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 믿음이 흔들리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을까요?

   요한은 요일 5:4에서 그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요한이 이 극심한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믿음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 이기게 해주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이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몽고메리버스스트라이크를 이끌고 있을 때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와 폭파협박이 너무 심해서 견디지 못하고 손을 떼려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답니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하라” 그 때 믿음이 생기면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솟구치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갖가지 삶의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참 많습니다. 게다가 믿음생활을 방해하는 핍박도 있습니다. 가족들 가운데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터에서 상사나 동료들이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 핍박이 너무 힘들어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코로나19사태는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일상이 무너져버렸고, 경제적인 터전도 위협받고 있고, 가족들에 대한 염려도 크고, 교회생활에 대한 걱정도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언제 회복될지 기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요한처럼 기도하며 믿음으로 이겨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이 코로나사태를 이기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