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5:17-32
서론: 2002년 UNICEF가 아시아 17개국, 9-17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부모를 존경하는 비율’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전체 평균 74%가 ‘부모를 존경한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한국은 14%로 가장 낮게 나타났습니다. 한국인들이 무시하는 방글라데시, 파푸아뉴기니, 베트남, 캄보디아 등의 국가들도 부모를 존경하는 비율이 70%가 넘는데, 유독 한국만 겨우 14% 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통계자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한국과 미국교포사회와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이 통계를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 년 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많은 인종그룹(Ethnic Group)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질문 중에 “당신의 부모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꾸겠는가?”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백인학생들의 4%만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꾸겠다’고 답변했는데, 미국 내의 우리 교포자녀들은 19%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꾸겠다’고 답변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인종보다도 자녀들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고,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뒷바라지를 하는 우리 한인 부모들인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래서 그럴까요? 다른 이웃들과의 관계에서도 우리 한인들이 이웃들에게 그리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1년 1월, 뉴욕의 한 신문사가 뉴욕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인종을 대상으로 ‘어느 인종이 인간관계가 가장 좋은가?’라는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한인들은 61번째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미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두 번째로 나타났고, 한인들이 무시하는 다른 소수 인종들이 오히려 한인교포보다 훨씬 더 좋게 평가 받았다고 합니다.
부모를 존경하지 못하는 한인 2세, 이웃과의 관계에서 원만하지 못하는 1 세의 모습은 이웃과 세계인을 품지 못하는 우리 이민사회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지만 우리 자녀들이 부모들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한 원인이 무엇인지, 그 원인의 많은 부분이 우리 부모에게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존경심을 잃어버리면 부모의 권위도 설 땅이 없습니다.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고,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대인관계를 원만히 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현대사회를 가리켜 부성애를 상실한 사회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어른이 없는, 권위가 무너진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있었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권위, 그리고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 무너지고 옛날에 어른들이 하던 말대로 ‘애비 없는 자식’처럼 행동하는 풍조가 뚜렷해졌습니다.
이렇게 권위가 상실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신앙세계에서는 권위, 또는 권세 라는 용어를 아주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기독교를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권세를 부리다’에서 보듯이 ‘권세’라는 단어가 지배하고 군림하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권세, 권위’는 헬라어로 ‘엑수시아’인데 ‘엑스(~로 부터)’와 ‘우시아(존재)’의 합성어입니다. 즉, 권세는 외부에 드러난 어떤 지위, 위치, 소유, 성취, 힘 등을 바탕으로 부풀려지고 꾸며진 행위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또는 ‘내면’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종교인들은 ‘권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카리스마를 나타내려고 쇼맨쉽을 부리는 경우를 봅니다. 가령 손을 대지도 않고 후-하고 불면 사람이 쓰러지거나, 기도하면 척척 병이 낫고, 문제도 해결되어 내게 권세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성경은 권세의 참된 출처와 근원은 내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가 되시며, 따라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 왕권을 가진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막 2:7), 절대적 진리를 계시할 수 있으며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눅 7:8). 하나님은 이러한 권세와 능력으로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십니다(롬 9:21-22).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권세를 거스려 불순종하는 자에게 생명 대신 죽음, 축복 대신 저주를 받는 심판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적 권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권세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행사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마 28:18). 그 권세는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위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가르침에서 권세가 나타날 뿐만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막 1:27), 죄 사하는 권세(막 2:5 이하) 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만유의 주로서 권세를 가지고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이 권세를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는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마 28:18-20). 교회는 또한 사도들의 전통에 의해서 세워졌기에 여기에도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납니다. 교회에 주어진 이 권세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권세를 대하여 어떤 국가나 민족, 사회나 단체, 개인이 대항하여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한 때 부강했던 나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 앗수르, 바벨론제국, 그리고 이어서 헬라와 로마제국, 그리고 근세에 들어와 교회를 박멸하고자 했던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 등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권세에 대항하고서 누가 견고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가두고 압박하고 핍박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은 묶이지 않습니다. 거침없이 전파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세입니다.
1. 교회의 시련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 교회가 거룩을 회복하자 사도들에게 의해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고,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는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라도 덮일까 하고 바랐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고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사도들을 통해서 힘있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기 위해 몰려 드는 것을 보고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가 기득해서 다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행 5:17-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유대교 지도자들은 지금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서 아예 알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전파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 즉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인 예수가 바로 생명의 주’라고 전파하는 것이 너무 너무 듣기 싫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사단은 근본적으로 그 속성 자체가 시기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 피조물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을 시기하다가 타락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것도 결국은 바리새인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은 이제 사도들의 역사도 시기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의 부흥을 막아보고자 발악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세상의 권력의 힘을 가지고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옥에 가둠으로써 침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가 결코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2. 교회의 권세
하나님은 그의 종들이 철장에 갇혀 침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행 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밤에 천사를 보내어 옥문을 활짝 열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그 어떤 세력도 방해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역사에 대한 빛의 역사의 승리입니다. 마귀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로마서 8:31절은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시면 누가 감히 우리를 핍박하여 잡아 가두고 망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시면 그 어떤 세상 권력과 무서운 핍박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결코 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의 장인이었던 사울 왕이 얼마나 다윗을 죽이고자 술수를 쓰고, 악한 일을 도모했습니까? 심지어 사랑하는 딸 미갈을 미끼로 주어서 다윗을 망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왕의 사위가 되는 조건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베어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죽이겠다는 신사인 것입니다. 그에게 악신이 역사하여 크게 고통 당하고 있을 때 그를 낫게 하고자 수금을 타던 다윗을 죽이려고 단창을 집어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다윗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울 자신이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다가 결국 전투에서 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편에 서 계시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들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고 위협적이고 무서울지라도 사도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배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옥에서 끌어내시면서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20절입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하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풀어 주시면서 “빨리 멀리 가서 피신해라” “좀 숨어 있다가 나중에 때를 봐서 복음을 전해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라고 명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가라! 서라! 전하라!”라는 세 개의 명령형 동사로 된, 모두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더구나 지금 성전은 대제사장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사도들을 감시하고 지켜보고 있는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에게 과감하고 도전적인 방향으로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전파가 그만큼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철로에서 놀고 있는데 저 쪽 산기슭에서 열차가 달려오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아무리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고, 바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내버려두고 온 힘을 다해서 달려가며 목이 터져라고 외칠 것입니다. “얘들아 빨리 피해라. 열차가 달려오고 있어. 빨리 피해!” 이것은 아이들에게는 생과 사를 결정하는 생명의 음성이요, 구원의 음성이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들도 아무리 방해하는 세력이 많고 상황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이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절박감 속에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 가운데서 죽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나아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이 말씀에는 복음전파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아직도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해 죽어 가는 자들로 인해서 애간장이 녹는 듯 하십니다.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들을 풀어 주시면서 까지 생명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들을 바라볼 때 지금도 그분은 애간장이 타십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서 가며 누가 이 생명의 복음을 다 전할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아직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 친구, 직장 동료들에게 열심히 생명의 말씀을 전파할 때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합니다. 아무리 사단이 방해해도 복음의 역사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도전적인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들을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전사들로 키우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에 움츠러 들어 숨어서 신앙생활하는 나약한 신자들이 되길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악한 상황과 조건에서도 기죽지 않고, 담대하게 도전해서 승리하길 원하셨습니다. 부활신앙으로 도전해서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온실의 화초와 같이 연약한 자들이 되기를 원치 아니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또 성전에 서서 정면 도전하다가 욕을 먹고 매를 맞기도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사도들이 강하고 담대한 불사조와 같은 믿음의 용사들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4. 복음에 들어 있는 권세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도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즉각 순종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날이 새기도 전에 새벽부터 성전에 들어가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저것 계산하거나 따지지 않고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이 감옥에서 나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심히 당황하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장에 사도들을 잡아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했는데 왜 계속해서 가르치는가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의 열정으로 충만케 된 사도들은 이제 사람에게 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사사로운 목숨에도 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생과 사를 초월한 믿음의 투사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처럼 생과 사를 초월한 믿음의 투사들로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까? 다같이 30과 31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고 그를 높이사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다는 분명한 믿음이 사도들에게 있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확고한 부활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우리가 이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체험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설사 나무에 달려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시고 그들을 높이사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는 부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대제사장의 엄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확고한 부활신앙으로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에 그 누구의 엄포나 엄금이나 엄명도 두렵지 않습니다. 감옥도 두렵지 않고, 핍박도 두렵지 않고, 심지어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세입니다. 남을 누르고 압박해서 자기만 살겠다고 군림하는 권세가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시련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권세입니다.
결론: 예수께서는 붙잡히시던 전날 밤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물론 핍박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 성공과 출세, 부와 명예 누리는 쪽을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믿는 자에게 핍박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하나님의 다른 약속만큼이나 확실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주님의 또 다른 약속,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아주 확실하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상의 권세를 이기고 남을 만한 하늘의 권세를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을 만났을 때 피하고 숨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더 열심히 전도하고, 더 부지런히 성경공부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히브리서 10:38, 39절은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한 저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 모두가 시련과 역경의 순간에 뒤로 물러가서 넘어지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믿음으로 도전해서 환경을 이기며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쉽게 움츠려 들고 소심해지기 쉬운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이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의 복음을 거리낌없이 담대히 전파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이 권세를 힘입어 승리하는 신앙의 용사가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